[박관용 회고록] 일단 ‘필’이 꽂히면 내달리는 YS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4.0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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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동력이 됐지만 ‘삐끗’할 소지 다분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김영삼(YS)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 않는 진리의 말씀이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그의 취임 첫해인 1993년 11월 중순 청와대 영빈관 행사장에서다.

 

일주일 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일본 총리와 경주 한·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YS는 장애인 300여 명에게 다과를 베풀었다. 초청된 이들은 협회 대표와 선행이나 각종 경기 우승 등으로 모범을 보인 장애인들이다.

 

“세상에는 못된 사람들이 참 많다. 비록 몸이 성치 않더라도 남을 위해 훌륭한 일을 앞장서 하시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진짜 건강한 분들이다.” 대통령의 연설에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참석자도 여럿이었다. 감동이 물결치는 뜨거운 반응에 대통령도 사뭇 상기됐다. 

 

“내 지난 주 호소카와 일본 총리와 경주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그는 ‘내가 한국의 민주화를 이룩한 지도자라면서 앞으로 나를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박수 소리는 더 커졌고 신명이 오른 대통령은 말을 이어갔다. 

 

“정상회담 둘째 날 아침 호소카와 총리와 함께 조깅을 했는데 나더러 어찌 그리 잘 달리시느냐고 감탄하더라. 그래서 내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그 순간 장내엔 찬 서리가 내렸다. 대통령 자신도 아차 싶은 듯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버스는 떠난 뒤’였다. 비서실장이 다음은 건배 순서라며 적당히 말을 끊는 것으로 그 얼얼한 순간이 지났다. ‘실수(失手)’를 빼놓고 YS를 얘기하기 어렵다지만 이 상황은 어물쩍 넘기기가 고약했다. 단순히 ‘YS는 못 말려’의 한 페이지나 장식할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악의적’으로 던진 말이 전혀 아니었기에 대충 넘어갔다. 국민의 뜻을 헤아리고 국민을 챙기려는 의지에 관한 한 역대 누구 못지않은 대통령이 YS다. 하지만 이렇듯 ‘잘나가다가 삐끗’하는 패착도 그의 열정과 고집만큼이나 적지 않아 대세를 그르치기도 했다. 굳이 ‘지지율 90%에서 5%’까지 끌어댈 것은 아니겠으나, 때문에 참모들의 애를 태우게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았다. 아무튼 앞의 사례는 해프닝이지만 국정에서도 일단 ‘필(feel)’이 꽂히면 내닫는 YS임은 확실하다. 문민정부 초기 청와대를 지킨 박관용 비서실장이 부심한 것도 YS의 이런 개성 내지 스타일에 맞춘 보필이다.

 

1993년 11월 하순, 미국 시애틀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김영삼(YS) 대통령. 시애틀 앞바다의 블레이크 섬 회의장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 호소카와 일본 총리와 포즈를 취했다. 취임 첫해 일련의 개혁 작업을 성공리에 마친 YS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친다. ⓒ 김영삼 회고사진집  

前 안기부장 “여성 스캔들은 보고 말라” 조언

“YS는 장황한 설명은 질색했다. 논리보다는 직관에 의존하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고서는 A4용지 2장 이내로 작성토록 지침을 줬다. 아무리 복잡한 사안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자칫 보고가 늘어져 내용을 달리 이해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박 실장의 말이다. YS는 눈치 없는 경제장관 등이 보고를 오래 하거나 거슬리면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거기에 더해 아랫입술을 삐죽이 하는 것은 난리의 예고편이었다. 이런 게 IMF 사태 초래와도 무관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  

 

“비서실장을 맡으라는 YS의 명령을 받은 뒤 역대 청와대 비서실장들을 차례로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김정렴 실장을 제외하곤 거의 다 만났다. 소공동 롯데호텔에 차린 임시 사무실에서다. 여러 분들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았는데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이후락(HR) 실장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핵심은 ‘정책 결정 땐 최대한 신중하게 하라. 일단 하기로 했으면 일관되게 밀고 나가라. 국가권력 최고의 자리에 있는 윗분을 모시는 만큼 거스르지 않으면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일이 되도록 하는 게 요체다. 너무 나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는 등등이다.” 박 실장은 HR 등 역대 실장들의 경험을 살린 제언들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회고한다.

 

박 실장은 하나회 숙청 등으로 군부의 반발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개방, 경호실에 파견됐던 공수부대 요원(27특공대 180명) 원대 복귀를 비롯한 경호 완화 조치 등은 YS였기에 감행할 수 있었던 개혁이라고 했다. 문민정부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이를 가능케 했다면서 박상범 경호실장의 열린 자세도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YS가 여론에 민감한 데다 지는 것을 원체 못 참는 승부욕 때문에 완급을 조절하는 데 애로가 따르는 것쯤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도 했다. 박 실장은 “YS가 ‘진’ 상대는 차남 현철뿐”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상연 전 안기부장의 조언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청와대 민정수석·내무장관도 역임한 이 전 부장은 안기부 등 공안기관의 통솔 요령 등을 상세히 설명한 후 ‘지도층의 여성 스캔들’이 대통령에게 절대 보고되지 않도록 하라고 내게 당부했다. 그는 ‘대통령은 각급 기관이 올린 정보의 최종 사용자다. 거기엔 불필요한 보고 내용도 많다. 그런 것들이 걸러지도록 실장은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대통령은 의외로 각계 인사들의 스캔들 관련 보고에 솔깃해하므로 특히 이 부분을 유념해야 한다. 정보기관들이 수시로 정치인, 고위 관료, 재벌 총수들의 동정 보고라며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을 올리는데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대통령이 여야 정치인 등의 약점이나 잡아 그들을 틀어잡으려는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박 실장은 이 전 부장의 충고를 새겨들었다고 했다. 사실 역대 대통령 대다수가 ‘여자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YS는 이 부문에 관한 한  ‘중간 이상’이다. 퇴임 후 벌어진 ‘숨겨진 딸’ 해프닝을 포함해 왕년에 여배우 L·J·D를 비롯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린 YS이고 보면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예전에 그랬던 YS라도 권력의 정점에서 나라 전체를 통수하는 입장이 되면 바뀔 수 있고, 박 실장은 그럴 경우 이에 따른 역작용 가능성을 충분히 감지한 듯하다. 하지만 안기부 도청 전담 미림팀의 암약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어 박 실장도 모르는 새에, 아니면 청와대가 아닌 하부 권력기관에서 이를 ‘활용’했을 여지를 암시하고 있다.

 

외곬 대통령이 펄쩍 뛸까 완급 조절 부심


‘지도층의 여자 문제’와는 종류가 다른, 그러나 여론이 원하면 밀어붙이는 YS가 ‘걱정’돼 생겼던 이런 일도 있다. “1980년대 이래 사회문제가 된 것 중의 하나가 범람하는 성(性)이었다. 언론은 퇴폐 안마시술소·이발소 등을 ‘주범’으로 지목했고, 정부는 관계기관 합동 단속 실시 방안을 마련했다. 이럴 무렵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던 민주계 중진 P 의원과 민정계 K 의원이 박 실장을 찾아와 엄격한 단속에 따르는 부작용을 설명하면서 ‘자제’를 권유했다. 자칫 성매매업소가 널리 확산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들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어찌하느냐’는 농반진반(弄半眞半)도 곁들였다. 그런대로 일리 있는 얘기였다. 이런 경위로 강력한 단속 계획은 유보됐다(실제 다음 정부에서 이뤄진 홍등가 일제 단속으로 성매매 업소가 주택가까지 퍼지게 됐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J사 K 기자의 증언이다. 박 실장은 대통령 취임 후 기독교에 더욱 몰입한 YS의 성정에 미뤄 이 내용을 보고받으면 ‘엄중 단속’ 지시는 빤히 예상되는 일이었기에 자신이 ‘단속 유보’를 관계 장관에게 권했다고 털어놓았다.

 

민자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골프 회동 중 헛스윙으로 엉덩방아를 찧는 YS. 뒤에서 웃는 이는 김종필 최고위원. YS 자신도 웃기는 했지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속은 달랐다. ⓒ 김영삼 회고사진집

 


선거를 위해선 미워도 참는 YS가 진짜 프로

 

YS의 고집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종교다. 대통령 당선 전에는 불교계 표를 의식해 사찰에 갈 때면 합장 시늉이라도 냈던 YS지만 일단 청와대에 입성하자 달라졌다. 성경 이사야 41장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니~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니’ 대목을 즐겨 암송한 충현교회 장로 YS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목사를 청와대 경내로 불러 예배를 올렸다. “당선되면 청와대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기독교인들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약속 당시 불교계가 반발하자 종교적 발언이라며 적당히 눙쳤지만 이젠 눈치를 볼 YS가 아니었다. 그가 1993년 2월25일 공식 취임식에 앞서 상도동 집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을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이런 YS였기에 앞서 방한한 호소카와 일본 총리가 불국사를 참배할 때도 무심히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뭘….” 동행 취재한 기자가 의아해하자 곧장 던진 한마디다. 정교(政敎) 분리 운운은 YS에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가창 실력은 영 아니었으나 찬송가를 부를 때는 실내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목청을 높이는 YS다. 박자·음정과 상관없더라도 진정성은 충분히 깃들어 있다는 게 일치된 전언이다. 그의 노래 솜씨는 신민당 총재 시절인 1970년대 말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당시 <아침이슬>로 이미 알려진 것인데 경찰 병력과 대치하는 초긴장 상태 속에서 그가 박자 상관없이 <아침이슬>을 소리 높여 부르자 여공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었다. 이런 YS이니, 하물며 이 나라에서 제일 높아진 YS가 한 번 마음먹으면 무슨 일인들 주저했을까 싶다.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골프 금지령이 그것이다.

 

대통령이 칼국수와 수제비를 상식(常食)하며 개혁을 외치니 공무원들이 죽을 맛이었다. 바로 전임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 잔디에서 골프를 칠 정도의 마니아여서 골프 인심이 후했기 때문인지 더 안달했다. 그래서 꾀를 낸 게 기자들이 골프 해금을 진언하는 것이었다. 그 서슬 퍼런 YS도 언론에는 한없이 유(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언제 치지 말라고 했나”라는 대꾸가 고작이었다. 

 

사실 YS의 이 같은 골프 배척이 공직 기강 해이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골프에 대한 달갑지 않은 기억도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 야당 생활을 했던 YS는 골프를 몰랐다. 그런데 3당 합당을 하자 노 대통령을 한 식구로 만나야 했고, 노 대통령은 필드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효과적이라며 골프장 회동을 원했다. 급기야 YS는 남몰래 레슨을 받았다. 레슨 담당은 제주 출신 강보성 의원. 한적한 제주 O CC에서 기초를 닦은 민자당 대표 YS는 민자당 총재인 대통령, 김종필(JP)·박태준(TJ) 최고위원과 라운드에 들어갔다. 대통령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YS는 힘차게 스윙을 했다. 그러나 공은 티 위에 그대로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골프채를 휘두른 YS는 한 바퀴 360도를 완전히 돌고는 넘어졌다. 폭소가 터졌다. 그냥 웃은 웃음들이었지만 YS의 안색은 벌겋게 상기됐다. 가뜩이나 지기 싫어하는 YS로서는 JP·TJ 면전에서 보인 자신의 모습이 무척 불쾌했던 모양이다. 이후 골프 얘기가 나오면 찡그렸다. 골프를 가르쳐준 강 의원에겐 농림부 장관 임명으로 보답을 했지만 자신은 골프 단어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와 민자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호오(好惡)가 분명한 YS의 성격은 국정 운영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최고 권력자인 그에게 한 번 찍히면 끝장이었다. 이병태 국방부 장관의 임명·경질 과정은 그 대표적 사례다. 호오 가운데 ‘오(惡)’가 분명함에도 대접을 받은 인사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정도다. 이 파격은 물론 총선을 앞둔 YS의 정치적 고려,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YS가 진정한 프로 정치가였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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