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총리, 부러운 그의 약속
  • 남인숙 작가 (.)
  • 승인 2016.04.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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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명한 군주라도 신의를 지키는 것이 불리할 때나 그 동기가 사라졌을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란 본래 사악하고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군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항상 둘러댈 수 있습니다.’

필자가 최근 다시 읽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한 대목이다. 책 자체는 사악한 정치론의 결정체라고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온 것이지만, 일개 정치인의 독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찜찜하다. 낯설지 않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새로 총리로 당선된 저스틴 트뤼도의 공약과 그 실천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남녀, 인종, 그리고 계층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안배한 파격적인 내각 구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가 내각의 50%를 여성에게 할당하겠다고 했을 때, 왜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응수한 답변은 한동안 회자될 어록으로 남게 되었다. 필자는 ‘우리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하는 그곳 지인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러웠다.

물론 캐나다 정치판이라고 해서 마냥 동화 같은 꿈동산은 아닐 것이다. 전문 모델이나 배우를 연상케 하는 트뤼도의 수려한 외모와 정계 거물인 아버지의 영향력이 당선의 주요 변수였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정치적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필자가 이 일을 보고 부러움을 느낀 건 그 나라의 국민들이 정의롭고 젊고 잘생기기까지 한 총리를 두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약속’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한 약속과 그 실천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의 빛나는 외모까지 돋보이게 해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약속을 중히 여기는 성숙한 사회라는 의미가 된다.

약속 따위는 무시하라는,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의 이탈리아는 고만고만한 여러 나라가 이합집산하며 자고 일어나면 군주가 바뀌는 어수선한 곳이었다. 21세기의 이 나라는 그런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

살면서 한 번이라도 정치인의 온당한 공약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정치인들은 선거를 치르고 당선이 되어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혹은 지키지 않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사람들은 애초 약속 자체에 관심이 없다. 당색과 출신 지역, 혹은 단순히 ‘아는 얼굴’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표를 던진다.

이제 멀지 않은 또 하나 정치적 선택의 기회, 이제는 그것이 약속을 보고 누군가를 선택하고 그 약속이 지켜지는지 끝까지 지켜보는 장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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