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2주기] 당신이 잊은 사이에도 우리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 조유빈·조해수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6.04.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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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초원 선생님 아버지와 故 최윤민양 언니가 말하는 세월호 참사 이후 2년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3반(명예 3학년 3반) 교실. 2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리움은 더 깊어졌다. © 시사저널 조유빈

또 다른 그리움의 공간, 시간이 멈춰버린 교무실
고 김초원 선생님 아버지 김성욱씨 이야기

교무실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한쪽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는 4월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의 수학여행 일정이 예전 그대로 적혀 있었다. 4월21일로 예정된 2학년 영어 듣기평가 일정은 지켜지지 못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오지 못한 그날 이후, 단원고 2학년 교무실의 문은 닫혔다. 고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 김성욱씨(57)는 딸의 흔적을 찾아 교무실에 왔다. 텅 비어 있는 책꽂이가 야속해 다른 책장에 있는 화학 책을 가져다 꽂아뒀다.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다른 선생님들의 책꽂이에도 담당 과목의 책을 꽂아줬다.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을 선생님들이 자기 자식처럼 느껴져서다. 사진을 액자에 끼워 세우고, 국화를 한 송이씩 책상 위에 놓았다. 자리들이 조금은 덜 휑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김성욱씨는 딸과 유난히 친했다. 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바쁘게 출근을 하느라 어질러진 방을 치워주며 구박도 했다. 술마신 딸의 투정을 받아주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닥쳐온 이별이 더 힘겨웠다. 예쁘기만 한 딸을 생일인 4월16일에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배가 완전히 뒤집혔을 때 그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고 했다. 진도에서 가장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딸이 수영을 잘한다는 것에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딸이 혼자만 살아올까 봐 겁이 났다. “학생들은 바닷속에 묶여 있는데 선생만 살아 돌아왔느냐”라는 질책을 들을까 봐 무서웠다. 차갑게 돌아온 딸을 보고도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의 부모님들에게 미안했다. 학생들의 장례식장을 찾아 서로 껴안고 함께 울었다.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기억하게 해달라”

주변 사람들이 미웠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친구는 보상금 얘기를 했다. 고향에 내려가 만난 친척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변한 것도, 해결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뭘 그만하라는 건지 서러워 연락을 끊었다. 딸의 사진이 놓인 분향소로 가는 택시 안, 택시기사는 그에게“로또 맞았다”고 했다. 어떻게 자식의 죽음을 돈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돈 한 푼 없더라도,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빚을 지더라도 내 딸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었다. 고향에 계신 노모에게는 딸이 떠났다는 얘기도 못 꺼냈다. 유난히 손녀를 예뻐하시던 할머니다. 할머니는 손녀가 외국유학 가 있는 줄 안다. “우리 손녀 시집가야 되는데, 눈이 높아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신다. 잘 있다는 거짓말을 할 때면 아직도 가슴이 찢어진다.

학생들에게 입히느라 자신의 구명조끼도 벗은 김초원 선생님을 정부는 기간제교사라는 이유로 ‘순직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 1월 기간제 교사의 순직을 인정하는 것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눈물로 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한 아버지에게 답변은 가혹했다. 그래도 학생들의 선생님이었던 딸이다. 1월10일 단원고 기억교실에서 열린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겨울방학식에서 그는 학생들의 담임선생님이 됐다. ‘졸업식’이 아닌 미수습자를 끝까지 기다리기 위한 ‘방학식’이었다. 그는 교실에 오지 못한 딸 대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유가족을 위로했다.

단원고 2학년 교무실에서 고 김초원 선생님 아버지 김성욱씨가 딸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 시사저널 조유빈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이 있지만 학교 측은 4월25일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이 사용했던 기억교실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이날이 지나면 기억교실에 2년 동안 쌓인 그리움의 기억은 모두 거둬진다. 유가족들은 그 전에 세 가지 안을 제시했다. 기억교실을 존치하는 것, 세월호 인양 때까지 남겨두는 것, 추모공원의 첫 삽을 뜰 때까지 정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원히 교실을 남겨달라고 고집부린 일도 없었다. 확신을 달라는 것뿐이었다. 유족들이 무조건 교실을 남겨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하는 언론이 원망스러웠다.

세월호 인양 문제가 마무리될 때까지만, 추모공원이 만들어진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만 아이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교실을 남겨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무실 책상 서랍 안에는 딸이 쓰던 화장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교무실을 찾아온 학생들이 적어놓은 ‘조퇴 사유서’도 보인다. 조퇴 날짜는 4월16일, 조퇴 사유는 ‘김초원 선생님을 보기 위해서’다. “25일이 되면 교무실도 같이 정리가 될 것”이라며 그는 딸 자리에 있는 물건들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딸은 키가 컸다. 키 큰 여자들을 보면 초원이 생각이 더 난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잠이 들었다 깬 그의 앞에 딸만큼 키가 큰 아가씨가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잡았다. 바로 자리가 나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사과하자 아가씨는 손을 맞잡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 마음이 생전의 초원이처럼 느껴져 더 울었다고 했다. 1년에서 2년, 시간이 지나도 그리움은 줄지 않고 오히려 배가 됐다.

도보행진에서 본 벚꽃이 다시 핀 잔인한 봄
고 최윤민양 언니 최윤아씨 이야기

4월의 안산에도 벚꽃이 피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번째 맞이한 봄이다. 안산으로 이동하는 길, 고 최윤민양의 언니 최윤아씨(26)는 거리에 만개한 벚꽃을 보며 “꽃구경은 하셨느냐”며 입을 뗐다. 올해부터 다니기 시작한 회사의 동료들과 꽃구경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누군가는 군항제 하루 전날 진해에 다녀왔다고 했고, 누군가는 여의도 벚꽃축제를 얘기했다. 그러다 대화는 지난해 벚꽃놀이로 거슬러 올라갔다. ‘작년에 어디서 벚꽃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윤아씨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지난해 벚꽃은 상복을 입고 도보행진을 하며 봤다고. 지난해 4월 초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이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 폐기를 촉구하며 안산에서 서울까지 걸었던 도보행진 말이다.

윤아씨는 2년의 시간을 길게도 보냈다. 사고 직후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소주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세 병이 됐다. 몇 주째 그런 날이 계속됐다. 낮에는 억지로 사회생활을 했다.집에서 부모님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에서 우울함을 다 내보일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진실을 밝히자고 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회사도 그만뒀다. 부모님과 함께 국회에서 농성을 하고 광화문에도 나갔다.

한참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을 할 때쯤, 어른들이 무작정 싫어졌다. 진도체육관에서 유가족들을 속인 사람들과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준 이들은 모두 어른이었다.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어른들의 얼굴이 보기 싫어졌다. 어른이 싫어지면서 유가족들을 보는 것도 힘들어졌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윤아씨는 동굴로 들어갔다. 갑자기 활동에서 빠지는 윤아씨를 보고 엄마는 서운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부는 위로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아픔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려 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동굴에 들어가 있는 아이들에게 견학을 다녀오는 일회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윤아씨의 눈에는 이 프로그램들 속에 유가족들을 위한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상담사를 배정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세월호 참사 이후 내놓은 일시적인 이벤트처럼 여겨졌다. 지난해 죽고 싶다고 얘기하던 엄마가 걱정돼 상담사에게 걸었던 전화에서 ‘자살 방지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거기 가세요’라는 말을 들은 이후 윤아씨는 세월호 형제·자매들이 모이는 안산 지역공동체 네트워크 ‘우리함께’를 제외하고는 유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다.

윤아씨가 아직 희망을 갖는 이유는 윤민이에게 떳떳한 언니가 되고 싶어서다. © 시사저널 조유빈

“꼭 행복해질 거예요”

언론에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형제·자매들은 ‘제발 진정성 있는 보도를 해달라’고 했지만 계속해서 단편적인 얘기들만 보도됐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카메라가 두려워 웅크려야 했다. 가해자, 심지어 살인범들도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쓰는데 피해자인 유가족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보도됐다. 돈 받고 떨어지라는 말에 분노를 표출하면 ‘갑질한다’며 욕을 먹고, 웃으면 ‘가족을 잃고 웃음이 나오느냐’고 비난했다. 언론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우리가 울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울고만 있을 텐데 그러기에는 밝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윤아씨는 유가족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장 나쁜 표본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어른들과 반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들의 삭발식 이후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광화문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열린 ‘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퍼포먼스가 그 시작이다. 힘든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제 유가족들 앞에서 농담을 건네며 웃기도 하고, 더 어린 형제·자매들 앞에서 아픈 기억을 블랙코미디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조금은 단단해진 지금도 물론 아플 때가 많다. 지난해 수능 날, 남자친구와 식당에서 밥을 먹다 뉴스를 봤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험생 수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수험생 수는 6000명 이상이 줄었는데 250명이 떠난 참사에 대한 얘기를 굳이 또 해가며 유가족들의 마음을 할퀴어야 하는지, 언론에 대한 불신이 다시 밀려왔다. 수능을 보지 못한 동생에 대한 그리움도 몰아쳤다. 결국 눈물을 쏟는 윤아씨에게 남자친구는 “애기(윤민이)가 생각나느냐”며 다독였다고 했다.

유가족들의 이 긴 싸움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특별법에 보장된 조사 기간은 올해 6월까지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6월까지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희망을 갖는 건 동생 윤민이에게 떳떳한 언니가 되고 싶어서다. 부모님들과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뭐라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끈을 절대 놓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피해자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윤아씨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전 꼭 행복해질 거예요.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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