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선거를 왜 하나”
  • 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4.13 17:24
  • 호수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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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도, 역사적 교훈도 무시당한 4·13 총선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4월6일, 멀어진 텃밭 민심에 놀란 새누리당 대구 지역 후보자 전원이 시내 한 공원에서 공천 파동 사죄와 대구 경제 발전 공약 실천을 다짐하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다. 진짜 뉘우치는 것인지, 뒤늦게 읍소(泣訴)한다고 성난 민심이 돌아설지는 의문이다. © 뉴시스

4월13일은 지긋지긋했던 제20대 총선 전쟁 종전일(終戰日)이다. 따라서 ‘지긋지긋’도 끝나야 맞지만 대다수 국민에겐 ‘아니다’다. 새로운 ‘지긋지긋’이 기다릴 뿐이다. 그토록 국민 속을 썩였던 우리 정당을, 정치인들을 또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각오는 했지만 이런 기막힌 총선은 헌정 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상식을 초월할 만큼 황당한, 괴이하기까지 한 사태가 하도 많아 헤아리기 숨찰 정도다. 말실수 하나가 대세를 그르칠 가능성이 있기에 입조심·몸조심을 하는 게 상례인데 이번엔 정반대였다. 18대 총선 당시 민주당 수도권 의석 20개쯤 날리게 만들었다는 ‘김용민 막말 파문’급(級) 사태는 널려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쟁적’으로 ‘초대형 악재(惡材)’를 자체 생산해냈다. 때문에 막판 돌발변수 운운하는 게 싱거울 정도였다. 이보다 더 강도 높은 돌출변수가 있으려야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양적으로, 질적으로도 지난 역대 총선 서너 차례의 것들을 합쳐도 부족하다.

초대형 악재 자체 생산은 역대 최고·최다

야당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여당 대표가 당 공천 후보자의 선관위 등록을 막기 위해 당인(黨印)을 감추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옥새 투쟁’은 단연 압권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그의 정치 스승인 김영삼(YS) 대통령의 민자당 대표 시절의 ‘마산행’을 본뜬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다르다. YS의 낙향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당 대표 권한 보장과 내각제 개헌 포기를 요구하는 벼랑 끝 저항이긴 했지만 선거 때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와 엇비슷한 소동으로 야당에 있던 것은 1971년도의 이른바 ‘진산(珍山) 파동’인데 이번 ‘옥새’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이다. 그 시절 제1야당인 신민당 유진산 당수가 지역구(영등포)를 포기하고 후보등록 마감일에 전국구 1번으로 몰래 등록해 벌어졌던 해프닝인데, 비주류 눈을 속이기 위해 선관위로 향하는 도중 명단에 끼워넣었다. 이 옥새 투쟁과 짝을 이루는 ‘유승민 공천 배제 사건’도 전대미문의 사태다. 사건의 배경과 진행, 마무리까지 표를 쫓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부러 그리 ‘고약하게’ 만들기도 어려울 만큼의 패착 덩어리였다. 18대 ‘친이(親이명박)계에 의한 친박(親朴박근혜)계 공천 학살과 친박연대 결성’, 19대의 ‘친박에 의한 친이 공천 학살’ 극(劇)이 있었으나 선거 임박해서까지 추태(醜態)를 연출하지는 않았다. 선거 이후 당권과 대권까지를 내다본 친박과 비박(非박근혜)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지만 국민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었다. 여권의 본거지인 대구에서 역풍(逆風)이 가장 거세게 몰아친 것은 필연이다. 대구 시민들 인내의 임계치(臨界値)를 넘어섰기 때문에 출마자 전원이 길거리에서 단체로 무릎을 꿇고 애소해도 소용없었다.

군사독재 시절, 야당은 멱살잡이를 해도 너그럽게 봐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비례의원 매매 사실이 들통나도 “오죽하면, 돈 없이 정치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때론 동정까지 보냈다. 그러나 이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고, 세상이 달라졌음에도 그보다 추하고 한심한 장면을 수차 연출했다. 민심 이반이 극에 달했다고 스스로 판단, 선거 100일 전 당 간판까지 더불어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에서)으로 갈아 끼운 제1야당은 선거 석 달 전 둘로 쪼개졌다. ‘친노 패권주의’를 둘러싼 문재인·안철수 두 사람의 갈등이 막다른 골목에서 폭발한 것이라지만 지도자라는 이들이 취할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정책이나 노선의 문제라면 그럭저럭 봐주련만 순전히 2017년 대선 후보 자리를 겨냥한 밥그릇 선점 싸움이었기에 자기네 지지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특히 수도권에서 ‘1여 2야’ 구도가 필패(必敗)라는 선거판의 철칙까지 외면했다. 또 호남 맹주 자리를 놓고 물고 뜯은 행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증거다. 1996년 15대 총선이 본보기적 사례임에도 그렇다. 당시 통합민주당(이기택)에서 뛰쳐나온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는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YS의 신한국당(YS도 실추된 이미지 개선을 위해 선거 4개월 전 본래 당명인 민자당을 바꿈)에 서울에서 참패(27 대 18)했다. 1000~2000표, 때론 수백 표로 당락이 엇갈리는 선거에서 지지층 분열이 초래한 결과는 자명했다. 뒤늦은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과 ‘후보 단일화’ 제의는 부질없는 ‘쑈’처럼 비쳤고 개인 차원의 단일화 호소는 약세만 확인시키는 꼴이 됐다. 또한 영입한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가 ‘경제 살리기’로 위기를 넘기고 당내 기반을 굳히는 듯하자 ‘셀프 비례대표’ 면박 공세를 전개하는 조급증도 빠지지 않았다. 결국 배후에 잠복하던 ‘친노’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탄력을 받는 듯했던 중도 보수층으로의 외연 확장마저 멈춰 서게 만들었다.

목전 이익 급급도 여야 다르지 않아

역사적으로 제3당으로서 체면치레를 한 정당은 김종필(JP)의 자민련과 현대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정도다. 각기 충청도라는 지역적 기반과 현대그룹의 돈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단순히 공천 갈등으로 딴 살림을 차렸던 제3당은 포말(泡沫) 정당이 돼 사라졌다. 2000년 제16대 총선 당시 민주국민당이 대표적인 경우다. 민주국민당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대규모 물갈이의 제물이 된 ‘거물 정객’ 중심으로 창당했다. ‘킹메이커’ 김윤환(전 대표), 신상우(전 국회부의장), 김광일(전 대통령 비서실장), 문정수(전 부산시장)에다 조순 전 총재,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이수성 전 국무총리, 그리고 김상현 전 민추협 대표와 재야 대부라는 장기표 등 면면으로는 호화찬란했다. 여기에 탈당파 의원을 끌어들였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지역구로는 춘천에서 한승수(후일 국무총리) 하나 건졌다. 그나마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은 다르다. 급조(急造)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금배지 달기’라는 이유만으로 뭉친 민주국민당과는 차별화된다. 양당 체제 타파라는 명분이 있다.

여야는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 등 잇단 대남 위협에도 성명서 한 장 내지 않았다. 과거 선거에서 단골 메뉴였던 ‘북풍(北風)’ 카드가 없어진 것은 다행이지만 목전 이익에 급급한 이 기막힌 소아병적(小兒病的) 행태는 한심스럽다. ‘김정은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정말 (미사일을) 쏠까 우려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판이다. 정책 대결이라곤 ‘맛보기식’ 복지 정책 서너 개가 고작이었다. 김종인 더민주 대표의 경제 공세를 ‘강봉균 맞불’로 가라앉히고, ‘할배 경제 배틀’로 희화화(戱畵化)한새누리당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는지 모르나 그나마 낮은 선거 수준을 더 낮췄다.

선거의 기본 중 기본인 선거구 획정을 선거일 42일 전에야 정했을 때, 아니 여야 모두 당 내분으로 삐걱거릴 때 예상했던 터이지만 해도 너무한 선거다. 역사의 교훈에서 배운다는 말은 다른 나라 얘기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오만(傲慢), “쟤도 잘못하니까 상관없다”는 막가파식 사고가 자리를 잡은 우리 선거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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