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만 얻는다면 무슨 말인들 못할까”
  • 김원식│국제문제 칼럼니스트 (.)
  • 승인 2016.04.14 18:55
  • 호수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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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한반도 핵개발 용인론’은 지지층 결집 위한 선거 전략

올해 초 미국 국무부의 한반도 담당 고위 당국자가 당시 불거진 북핵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국을 방문했다. 비공식 기자간담회가 끝나고 한 한국 기자가 이 당국자에게 당시 미국 대선에서 막 돌풍을 일으키던 도널드 트럼프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 미국 외교관 신분인 이 당국자는 마치 지나가는 소리처럼 “그 크레이지(crazy, 미친X) 말이냐”고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답변했다. 아무리 사석이라도 상상 외의 답변을 들은 기자들은 “그래도 대선 후보인데”라면서 더 이상의 질문을 접어야 했다. 물론 당시는 트럼프가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자리 잡기 전의 일이다.

미국의 기존 외교·군사 전략 완전히 무시
 

2015년 9월9일(현지 시각)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워싱턴D.C. 연방의회 앞 서쪽 잔디광장에서 이란 핵합의 반대 집회를 마친 후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AP 연합

그런데 정말 미국 외교정책을 수행하는 외교관들 입장에서 ‘크레이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근 트럼프는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파격적인 돌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는 3월26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미군 주둔 비용 분담을 상당히 늘리지 않으면 철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NYT는 또 “일본과 한국이 북한과 중국에 대응해 자체 핵무기를 제조하는 걸 용인할 수 있다고 트럼프가 말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4월2일에도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들이 (전쟁을) 한다면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미국의 국가 부채가 곧 21조 달러로 늘어날 상황에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할 수는 없다”면서 불개입 방침을 분명히 했다. 특히 기존 주한미군 부담금 증액 주장을 거듭 내놓으며 “그들(한국과 일본)이 (핵무기로) 무장하지 않는 편을 바라지만, (주한미군 주둔으로) 엄청난 돈을 계속 잃을 수는 없다”면서 주한미군마저 철수할 수 있다고 다시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 같은 발언이 나오기 전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마저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트럼프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바마는 “외교나 핵 정책, 한반도, 세계 전반에 무지한 것으로 (핵무장 용인의)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이 백악관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4월3일, 트럼프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술 더 떴다. 그는 “파키스탄과 북한, 중국, 러시아, 인도까지 모두가 핵을 갖고 있다”며 “북한의 핵이 일본에 큰 문제이기 때문에 일본이 핵을 갖고 스스로를 보호한다면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한국도 바로 이웃 나라로서 마찬가지”라면서 모두가 핵을 가져도 무방하다고까지 발언했다. 이에 놀란 사회자가 “한반도에서 핵무기 경쟁을 용인하겠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트럼프는 “그렇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우리는 더는 한국과 일본을 보호해줄 여력이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쉽게 말해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하려면 돈을 더 내놓든지 아니면 핵을 개발하든 전쟁을 하든 맘대로 하라는 것이다.

“돈을 더 내라”…‘손해 볼 것 없다’는 트럼프

트럼프의 이 같은 발언에 대다수 언론은 미국의 오랜 핵억제 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한반도 주변 사태에 대한 미군의 불개입 원칙을 밝힌 것으로 해석하고, 그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 같은 발언을 단순히 외교정책에 관한 무지로 치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트럼프의 이러한 주장과 발언은 다분히 고도로 계산된 의도적인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막말의 대가로 알려진 트럼프는 그 명성에 걸맞게(?) 낙태 반대를 주장하며 낙태한 여성도 처벌해야 한다고 말해 엄청난 후폭풍을 맞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채 3시간도 되지 않아 여성이 아니라 의료진이 처벌받아야 한다면서 말을 슬쩍 바꿨다. 더 나아가 현행 낙태법도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다는 발언까지 했다. 문제가 되면 말을 180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핵개발 용인론이나 한반도 전쟁 불개입 발언에 대해서는 철회하기는커녕 더욱 키우고 있다. 즉 손해 볼 것 없는, 고도로 계산된 발언이라는 방증이다. 사실 미국 국민은 부시 행정부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 중동 개입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엄청난 피로감에 싸여 있다. 특히 백인 저소득층 등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내하면서 국내 경제가 얼어붙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세계 경찰’이라는 미명 아래 ‘중동의 늪’에 빠져 국내 경제를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런 불만을 알고 중동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이른바 ‘아시아 중시 전략(Pivot to Asia)’으로 중동에 파견된 군사 물자들이 다시 한반도 주변에 배치되자 중국과 맞닥뜨린 아시아가 ‘제2 중동의 늪’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파다하다.

트럼프는 바로 이 부분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비확산 정책이나 군사 동맹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요한 지지 계층인 백인 저소득층의 심리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의미다. “우리도 살기 바쁜데 왜 남의 나라 방위까지 챙겨줘야 하며, 그들의 전쟁에 또 개입하면 다시 우리 경제를 말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주장이 그를 지지하는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먹혀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노림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기존 외교·군사 전략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대내외에 한껏 과시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가장 위험하고 위태로운 발상”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즐기고 있는 형국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주장을 “상식이며 거래(trade)”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방위를 책임지게 하려면 “돈을 더 내라”는 것이다. 미국이 장기적인 이익 관점에서 비확산 정책과 군사동맹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권자들로서는 이 말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는 외교 전략에서도 상대 국가가 아니라 국내 유권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영리한 선거 전략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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