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못하는 유럽파들을 어찌할꼬
  • 서호정 | 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6.04.14 18:59
  • 호수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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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진에 빠진 유럽파로 인해 고민 빠진 ‘슈틸리케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에 2015년은 최고의 해였다. 아시안컵 준우승을 시작으로 8년 만의 동아시안컵 우승으로 월드컵 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났다. 지난 한 해 동안 16승 3무 1패로 승률 80%와 7경기 연속 A매치 무실점 기록도 썼다. 대표팀 재건을 맡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지도력도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 2016년은 새로운 도전의 해다. 6월에는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한 후 처음으로 유럽 원정을 떠나 스페인·체코 같은 강호들과 일전을 치른다. 9월부터는 2018년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최종예선에 돌입한다.

그런데 2016년의 첫 출항이 불안했다. 레바논과의 월드컵 2차 예선 7차전, 태국과의 평가전을 치른 슈틸리케호는 두 경기 모두 1-0 승리를 거뒀다. 이 2연승으로 무실점 8연승이라는 대기록에 도달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경기 내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바논을 상대로는 추가 시간에 터진 이정협의 골로 간신히 이겼다. 태국 원정에서는 석현준이 전반 4분 만에 선제골을 뽑았지만, 후반에는 태국의 공세에 고전하며 힘겨운 승리를 거뒀다.

3월24일 경기도 안산 와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왼쪽 측면 수비수로 출전한 김진수가 넘어지고 있다. 소속팀에서 뛰지 못하고 있는 김진수 역시 대표팀의 고민거리다. ⓒ 연합뉴스

불안한 경기력의 중심에는 ‘뛰지 못하는 유럽파’라는 난제가 있다. 레바논전(戰)이 끝난 후 슈틸리케 감독은 선발 출전한 왼쪽 측면 수비수 김진수에게 “안정감이 너무 떨어졌다”라는 냉정한 평가를 남겼다. 김진수는 아시안컵부터 슈틸리케 감독의 총애를 받아온 황태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소속팀인 독일 분데스리가 호펜하임에서 한 달 넘게 엔트리에서 제외된 상태다. 태국전에는 그 자리에 박주호가 투입됐지만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박주호도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에서의 상황이 김진수와 흡사하다. 기성용(잉글랜드 스완지시티)과 함께 대표팀 허리의 쌍두마차였던 이청용(잉글랜드 크리스털 팰리스)도 예전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 역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유럽파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이 실패한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에서 홍명보 감독을 무너뜨린 결정타는 ‘의리 축구’ 논란이었다. 실력이 부족한 선수를 인맥·학연 등 경기력 외적인 이유로 뽑았다는 팬들의 주장이 일으킨 프레임이었다. 당시 소속팀에서 활약이 저조하던 박주영·윤석영 등 유럽파가 뽑히고, 이명주를 비롯한 K리그 선수를 외면했다는 게 그 근거였다. 홍 감독은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이미 이 프레임에 갇혔고, 강한 지지를 보내야 할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상황에 처해 실패를 예고했다.

사실 ‘의리 축구’의 정체는 감독 한 명의 잘못된 선택이 아닌, 한국 축구가 맞고 있는 거대한 딜레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점으로 대표팀 구성에서 해외파, 특히 세계 축구의 중심에서 뛰고 있는 유럽파가 메인이 됐다. 지난 브라질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 중 17명이 해외파였고, 그중 10명이 유럽파였다. 골키퍼는 현실적으로 유럽파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드플레이어 절반이 유럽파라는 얘기다.

홍명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슈틸리케

과거에는 차범근·허정무·서정원 등 간헐적으로 1~2명의 유럽파가 대표팀에 존재했다. 하지만 박지성·이영표의 성공을 필두로 유럽에 진출하는 선수가 대거 늘어나며 그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졌다. 기성용·손흥민(잉글랜드 토트넘)·구자철(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같은 현 대표팀의 간판선수도 모두 유럽파다. 유럽파의 비중 확대는 한국 축구의 위상과 질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얘기한다. 문제는 그 뒤에 숨은 숙제를 대표팀 감독이 고스란히 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뛰지 못하는 유럽파’의 경우다. ‘의리 축구’의 본질도 거기에 있었다.

유럽에 진출하는 선수는 기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전제가 깔린다. K리그와 대표팀에서 최상의 실력을 증명한 선수만이 유럽 진출의 기회를 얻는다. 유럽에 진출했다고 끝이 아니다. 그곳에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다.

박주영은 유럽파에게 생존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를 보여준 경우다. 2008년 여름 FC 서울에서 AS 모나코로 이적한 박주영은 프랑스 무대에 순조롭게 적응하며 3년간 25골을 넣었다. 특히 마지막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12골을 넣었고, 세계적인 명문 클럽인 잉글랜드 아스널로의 이적이라는 꿈같은 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스널에서 아르센 벵거 감독의 믿음을 얻지 못하며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그 여파가 결국 브라질월드컵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명문 팀의 일원이 됐다는 커리어의 성공 이면에는 경기에 나서지 못해 기량이 떨어지는 거대한 위험 요소가 숨어 있는 것이다.

박주영과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더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김진수·박주호·이청용이 현재 맞이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김진수는 지난 시즌 호펜하임에서 붙박이 주전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 팀이 강등권으로 떨어지고 시즌 중에만 두 차례나 감독 교체가 벌어지는 과정 속에서 외면을 받게 됐다. 새 감독의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박주호는 마인츠 시절 감독이었던 토마스 투헬이 도르트문트로 옮기며 이적을 제안받았다. 투헬 감독은 박주호가 지닌 기량과 멀티플레이어 능력을 높이 샀다. 그러나 도르트문트라는 빅클럽에서 박주호가 가진 기량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올 시즌 도르트문트에서 5경기 출전에 그치고 있다.

이청용은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11경기에 출전했지만 그중 8경기가 교체 투입이었다. 그 역시 한 달 넘게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팀 합류 후 이청용은 “파듀 감독으로부터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상황이다”라며 현재 자신이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임을 냉정하게 인정했다. 분데스리가에서 3시즌 연속 10골 이상을 기록하며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유럽파로 평가받은 손흥민도 예외가 아니다. 토트넘으로 이적해 새로운 무대에 입성한 손흥민은 21경기에 나섰으나 선발 출전은 9회에 불과하다. 이적 초기에 연속골을 넣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후 들쭉날쭉하며 팀의 주력 선수에서 제외됐다.

박지성 못지않은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지만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모두 실패하고 돌아온 이천수 JTBC 해설위원은 “아시아 선수가 유럽에서 버티기 위해선 변수가 너무 많다. 수준 높은 선수와의 경쟁, 감독의 신뢰를 얻는 것, 아시아 축구 수준에 대한 편견, 거기에 언어와 현지 생활 적응 등 K리그에서 성공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유럽파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의 실력은 수준이 높다. 그런데 경기에 꾸준히 나서지 못하면 감각이 떨어진다. 대표팀 감독 입장에선 유럽파의 기본 수준과 경기 감각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전임 대표팀 감독들이 부딪혔던 이 딜레마를 슈틸리케 감독도 피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다. 그는 선수들의 경기 감각을 걱정하면서도 “만일 주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럽파를 모두 배제한다면 대표팀에 뽑을 선수 절반이 사라진다”고 현실적 고민을 드러냈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력이 좋지 않으면 대표팀에 올 수 없다”며 유럽파의 분발을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유럽파에만 의지하지 않는 ‘플랜 B’ 필요

일단 슈틸리케 감독은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쓰기로 했다. 이번 소집에서 부진했던 유럽파의 경기력을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개별 면담을 통해 선수들의 계획을 듣고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했다. 명선수 출신으로 갖고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유럽파의 소속팀으로부터 무엇이 문제인지도 수합하고 있다. 그는 “일단 엔트리에 꾸준히 들어 경기를 뛸 수 있는 준비를 해라. 그 정도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는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이 강경책을 가동했다. 그는 최근 대표팀을 소집하며 “유럽에서 뛴다고 대표팀 주전 자리를 선물할 생각이 없다. 경기력이 좋지 않으면 올 수 없다”라는 말로 선을 확실히 그었다.

뛰지 못하는 유럽파에 대한 딜레마는 앞으로도 한국 축구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이재성(전북 현대)·권창훈(수원 삼성) 등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젊은 스타들은 유럽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황희찬(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류승우(독일 빌레펠트), 백승호·이승우·장결희(이상 스페인 바르셀로나 후베닐A) 등 향후 대표팀에 입성하게 될 차세대 스타들은 이미 유럽에 건너가서 성장하고 있다. 이 거대한 딜레마를 해소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선수들 자신의 노력과 분발에 달렸다. 동시에 대표팀에도 유럽파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는 플랜 B를 준비하는 주도면밀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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