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기 위한 마음의 먹거리 책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4.21 19:10
  • 호수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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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 레프 톨스토이의 명작 타이틀이기도 한 이 본원적 질문 하나를 줄기차게 던지며 살아온 한 사람을 만났다. 올해로 창간 40주년을 맞은 출판사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71)다. 출판사 이름처럼 책이라는 ‘한 길’만 걸어왔다는 그를 4월15일 파주출판도시 한길사 사옥에서 만났다.

사옥 4층 대표실에는 종이 냄새와 비릿한 먹물 냄새가 가득했다. 한길사뿐만 아니라 국내외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과 화선지, 그리고 붓이 눈에 띄었다. 서예는 그의 취미 중 하나다.

“책은 잘 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시사저널 최준필

지난 4월5일 그는 스스로 쓰고 찍은 글과 사진을 담아 책으로 냈다. ‘중앙선데이’에 연재하던 칼럼을 대폭 손봐 <세계서점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전 세계 16개 도시의 22개 서점에 대한 이야기다. 1294년에 지어진 고딕 교회 건물을 서점으로 변화시킨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의 도미니카넌 서점, 가난한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안식처가 돼준 프랑스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와이,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주인이 버려진 방앗간을 손봐 서점으로 탈바꿈시킨 미국 매사추세츠의 북밀, 저 유명한 뉴욕의 스트랜드, 중국 베이징의 완성서원, 싼롄타오편서점, 단샹공간에 한국 부산 서점가의 ‘자존심’ 영광도서까지. 600장이 넘는 두꺼운 책 속에는 그가 직접 취재하고 촬영한 서점의 모습과 함께 서점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 앞날개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우리 서점문화의 현실을 한 출판인으로서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기에 만용을 무릅쓰고 세계의 서점들을 찾아 나섰다. 고단한 문명적 현실에서도 변함없이 서점의 가치를 지키는 서점인들과 만나 대화하고 싶었다. 경험과 지혜를 얻고 싶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궁극적으로 ‘나도 좋은 서점을 하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김 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다.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촉발된 동아일보 기자 대량 해고 사태 때 그도 동료들과 함께 해고돼 신문사를 떠났다. 1975년의 일이다. 이듬해인 1976년 그는 한길사를 창립했다. 이후 40년간 줄곧 책만 만들어왔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히트작도 있었다. 어느새 고전 반열에 올라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가 있었고, 최명희 작가의 스테디셀러 <혼불>도 처음에 한길사에서 나왔다. 베스트셀러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책을 잘 만들자’는 일념하에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인문학 출판사 가운데서 손꼽히게 됐다. 그런 그를 세계의 서점을 찾아 나서게 한 이유인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던” 현실은 뭐였을까.

“책은 사람이 ‘잘’ 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지혜 행동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자 대답이 바로 책이다.”

단순히 ‘책쟁이’여서 하는 말들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그의 고민과 성찰이 녹아들어간 단단한 문제의식이었다. 책을 단순한 정보 전달의 매체가 아닌 지식과 지혜의 집약체로서 보는 인문학적 사고가 기반에 깔려 있었다.

“세계 서점들을 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서점이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닌 ‘문화’로서 존재하는 거였다. 어떻게 ‘여성’ 코너에 임신·출산·육아 관련 책만 있을 수 있나. 여성 작가가 쓴 책, 여성 리더십에 관한 책,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처럼 여성이 제목으로 들어간 책이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는 이른바 ‘먹방’과 같은 말초적 자극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와 그런 대중의 입맛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출판사의 현실을 개탄했다. 누구보다 책과 출판업계에 강한 애정이 있기에 나오는 안타까움이었다. 접이식 명함에 가득 적힌 출판 관련 타이틀이 그 애정을 대변했다. ‘한길사 대표이사, 파주북소리페스티벌 조직위원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은 올해 3년 더 연임하기로 했다. 인터뷰 시점 기준으로 다음 주에는 홍콩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책과 관련돼 있어 보였다.

김언호 대표가 직접 발로 뛰며 쓴


“종이책 가치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김 대표는 여전히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다. 출판 시장이 죽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이 종이로 된 책을 찾으며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습득한다. 이번 세계서점기행을 하면서 이 같은 가능성은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책 서두에도 썼듯이 세계 명문 서점가를 중심으로 종이책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전자책 시장은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들 말한다. 선진국들에서는 전문화되고 특정 주제에 특화된 독립서점도 늘어나고 있다.”

그에게 책은 먹거리였다. 늘 곁에 두고 섭취하는 것이고 ‘잘 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었던 셈이다. 책 만들기 40년, 그는 ‘다시 독자들과 함께’를 올해의 모토로 세웠다. “저자·출판인과 함께 출판문화를 이끄는 한 주체인 독자의 독서력을 신뢰한다.”

평소 독자들과 만나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즐기는 그는 올 하반기 좀 더 본격적으로 독자와 교류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바로 ‘독서학교’다. 그는 올해 안에 서울 중구 모처에 독서학교를 개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독서학교에서 독자들과 ‘왜 책인가, 책 읽기란 무엇인가, 왜 서점인가, 나아가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토론을 하고 싶다. 그런 자유로운 사고를 가능케 하는 게 책이며, 그게 우리가 책을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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