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YS “청와대에 들어오면 감옥 같아”비서실장 “저는 지옥 같습니다”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4.28 17:46
  • 호수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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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 들어주고 반대 주장도 수용한, 유머감각 있는 대통령

김영삼(YS) 대통령을 말할 때 빼놓아선 안 될 인물이 몇몇 있다. 이원종(李源宗) 청와대 정무수석이 그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11월 YS 빈소 앞에 꼼짝 않고 서서 조문객을 맞는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으로 기억된다. 문상 기간 내내 접객실 의자에 몸 한 번 얹지 않은 충직은 ‘역시 핏대’라는 후일담을 낳게 했다. ‘핏대’는 이 전 수석의 별명이다. YS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은 참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 ‘핏대’의 의리는 ‘주군(主君)’이 떠난 후에도 여일(如一)했다.

 

YS의 판단 기준은 ‘국민’…“정치는 문제 해결”


보통의 경우 모시는 사람이 특정 부문에 정통하면 해당 분야 참모는 빛을 잃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정치 9단 YS 밑에서 정무를 담당한 이 전 수석은 ‘실세(實勢)’ 장관급 참모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른 상도동 가신들이 그 ‘흔한’ 장관 자리, 의원 배지를 챙긴 것과는 달리 조용히 물러나 대학교수(한양대)로 있는 그의 지론은 ‘국민 중심’이다. 올해 초 그가 펴낸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이란 책 제목이 암시해주듯이 ‘오늘의 발전한 대한민국은 정치인·관료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현명한 국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하는 공동체의식으로 무장한 국민의 탁월한 역량이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진단에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함이 느껴진다.

 

‘국민을 떠나서는 좋은 정치가 나올 수 없다’는 ‘지당한’ 이론도 그렇다. 24년에 걸친 정치 현장 경험과 강단에서의 고뇌가 어우러진 산물이 아니었다면 공감은 고사하고 되레 싱거웠을 터다. 이런 그가 2016년 4·13 총선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에게 집권당은 협력의 대상이지 통제·관리 대상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을 나무라지만 말고 우선 여당이 화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야당과의 화합도 있다.” 그는 216석이던 민자당이 149석으로 궤멸한 1992년 14대 총선 당시를 회고하면서 “국민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고 했다. 그는 또 “대통령은 국민이 야속하겠지만 국민이 협조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줘야 한다. 우리 국민은 신바람 나면 움직인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국회를 호령했던 YS 시절을 돌이키면 아리송한 감이 없지 않은데 이 전 수석은 “민의를 수렴·존중했다”는 말로 그 괴리를 메운다. 역시 YS 가신(家臣)답다.

 

ⓒ 김영삼 회고사진집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이원종 수석 등의 참모진을 통할하며 YS 정부 초기 청와대를 이끌었던 이가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다. 그는 “한국 정치가 타협과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시험대에 올랐다”면서 “여당이니까 정부를 무조건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협치(協治)를 거듭 강조했다. ‘영원한 의회인(議會人)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다운 지적이다.

 

이런 박 전 의장에게 “YS 청와대는 국회를 쥐락펴락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곧바로 이어진다. 이에 그는 자신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말하는 것과 국회의원으로서 주장하는 게 다를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율배반(二律背反)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같은 대상이라도 입장에 따른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명분과 타당성이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국민의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소리가 나는 것과 일방적 내리누르기 내지 밀어붙이기를 착각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치학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정치에 학(學)은 없다.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정치이므로 (이것만이 옳다는) 교과서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정답이 없다는 얘기다. 결론 도출 과정의 합리성과 국민의 공감·지지가 잣대라는 얘기로 들린다. 이원종 전 수석의 “정치는 바른 사람이 아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지론과 엇비슷하다.

 

한다면 하는 YS, 대책 없이 “당도 돈 받지 마!”


“국민들에겐 우리가 민주적으로 일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군사정권과 다름을 믿어줬다. 한 수 접어줬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얼핏 강압적으로 비치는 부분이 있었겠지만 과거의 그것과는 아주 달랐다. 국민들도 ‘위로부터의 개혁’에 따르는 불가피성을 이해해줬다. 때문에 국회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국민적 지지와 국회의 순응)엔 YS의 솔선수범이 결정적이었을 게다. 먼저 (관례처럼 됐던 재벌)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고, 자기 재산을 공개하면서 부정부패 근절을 정치권과 국민에게 요구하는데 국회인들 반대할 수 있겠나. ‘(청와대) 마음대로 했다’고 하는 게 적확하다. 명분과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있었기에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박 전 의장은 YS 정부가 강력하게 개혁 과제를 밀어붙였지만 잡음과 반발이 적었던 데는 그에 앞선 진지한 내부 토론이 있었던 게 주요한 이유라고 했다.

 

“내겐 4선 국회의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비서실장 제의를 받고 수차 고사했던 나로선 거리낄 게 없었다. ‘제대로 일해보자’는 각오를 다지며 ‘(대의를 위해선 대통령에게) 못할 말이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대통령의 ‘꼬붕’이 아닌 ‘상담역’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국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무슨 얘기건 대통령에게 했다. 농담도 했다. 국가원수에게 무슨 농담이냐고 할지 모르나 정말 모르는 소리다. 적당한 유머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진솔한 대화를 가능케 하고 그런 가운데 합리적 대안도 도출된다. 지도자가 이를 안 받아주면 그건 불행이다. 그러나 YS는 스스럼없이 받아줬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맘에 안 든다고 ‘할 말이 그리 없으세요’ 하는 식이면 참모는 입을 닫게 마련인데 ‘기본적으로’ YS는 참모와 토론을 즐겼다(마음에 안 드는 모 장관 등에 대해선 곁에 오는 것조차 꺼리고 때론 단칼에 ‘박살’을 낸 비화가 두드러져 오해를 하지만 YS의 진면목은 그게 아니라는 것). 열심히 준비한 참모의 보고가 충정을 담은 것은 정한 이치니 설령 채택되지 않더라도 국정에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하다. 한창 사건·사고가 터져 골치 아플 때다. 그게 아니라도 YS가 답답한 청와대 생활에 짜증이 날 무렵이다. 집무실에 들어서는 내게 YS가 ‘청와대 들어오면 감옥(監獄)에 들어오는 것 같아’라고 했다. 나는 ‘저는 지옥(地獄)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고 즉시 응수했다. YS의 얼굴이 펴졌다. YS는 유머를 알았고, 아량(雅量)으로 참모의 충심을 받아주는 지도자였다.” 박 전 의장은 YS가 권위(authority)를 중시했지 ‘권위주의적’은 아니었다고 했다. 또 고집이 세지만 고집불통(固執不通)이 아니라고 술회한다.

 

“시대를 읽는 YS의 통찰력은 모두들 인정하는 바대로다. 고집과 결단·추진력도 소문만큼이다. 이런 대목에 집중하다 보니 간과하는 게 있다. 유머감각과 함께 참모들의 진언(進言)을 경청한다는 부분이다. 지도자에게 없어선 안 될 불가결(不可缺)한 덕목을 YS는 지니고 있었다. YS는 합리적 대안이나 제언은 서슴지 않고 수용한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라도 그렇다. 대통령이라고 일방통행식 일 처리를 하지 않았다. 물론 납득이 안 되면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지만 정책 결정 단계에서 허심탄회한 토론을 빼먹지 않았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알려진 1993년 8월의 ‘총독부(중앙청) 건물 철거’ 때 일이다. YS는 ‘총독부 건물이 꼴 보기도 싫다. 헐어내야겠다(김정남 교육문화수석 등이 적극적으로 철거를 주장했고, 일각에선 역사 바로 세우기 의지와 상징성 제고를 위해 철거도 단순 허물기가 아닌 폭파 방식 의견까지 제시)’고 했다. 나는 반대했다. YS의 뜻이 원체 확고했으므로 ‘충돌’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정도다. ‘총독부 건물이 거슬리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다. 잘된 것, 잘못된 것도 역사라는 데는 차이가 없다. 잘못된 것이라고 치워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치욕의 현장을 역사 교육장으로 쓰자’는 게 나의 반론이었다(YS는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주례회동에서 ‘중앙청 국기 게양대라도 남기자’고 한 제안도 ‘씰데 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YS는 내친김에 청와대 경내의 구본관마저 헐어버렸다. 구본관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이후 노태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집무한 유서 깊은 건물).”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YS는 민자당도 기업에 손을 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내가 말렸다. ‘당 살림을 해야 하는데 대책도 없이 받지 말라고만 하면 어찌합니까. 당 총재인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대통령도 안 받겠다고 했으니 돈은 어디서 구합니까. 정치자금 조달 대책부터 세운 뒤 금지 명령을 내려야죠.’ 소용없었다. YS는 단호했다. ‘돈 받으면 안 돼’였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다면 하는 게 YS다.

 

영원한 YS맨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YS를 지킬 때는 ‘핏대’였지만 내부적으로는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은 의리파 실세였다. ⓒ 시사저널 임준선

 


“비서실장에게 먼저 보고하고 나한테 와라”

 

“YS가 ‘새마을운동’을 없애겠다고 했다(YS는 자신을 핍박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와 겹치는 새마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군사정권이 독재 체제를 다지는 데 ‘새마을’을 동원했다는 등이 폐지 명분이었다). 대통령의 ‘새마을’ 기피증이 원체 강해 논전은 뜨거웠다. 폐지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내무장관더러 반대 논리를 정리해 보고토록 하는 등 여러 궁리를 했지만 대통령은 확고했다. 최종 토론이 벌어진 것은 추석 연휴 직후였다. 마침 귀성객들이 버린 쓰레기더미가 언론에 한창 오르내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변 등지의 쓰레기를 치울 수 있는 조직은 새마을밖에 없다. 사회 각 현장에서 이런 궂은일까지 해낼 수 있는 게 새마을이다. 바람직한 조직이니 살려야 한다.’ 생생한 사례 제시에 YS는 고집을 꺾었다. 타당하다고 여기면 선선히 자신의 뜻을 접는 YS다. 일반 정책뿐 아니라 인사 때도 그랬다.”

 

“YS는 내무부 장관에 K의원을, 총무처 장관에 S의원을 각각 임명하려고 했다. 내가 반대했다. ‘그릇이 못 된다’ ‘신세졌다고 장관 시키면 대통령 이미지나 그르칠 것’이라고 했다. YS는 아쉬워하면서도 수긍했다. 물론 대통령이 당초의 구상을 관철한 경우가 대다수다.” 그는 주위 만류에도 밀어붙였다가 ‘불가(不可) 이유’가 ‘현실화’되면 계면쩍어하면서 다음엔 조심했다고 한다.

 

군사문화라면 진저리를 낸 YS다. 정보·공안기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그 연장선상에서 비롯했다. 요긴한 통치 수단이라 차버릴 수는 없지만 ‘버릇’은 고치려고 했다. ‘군기(軍紀)’를 잡는 YS의 방식은 절묘했다. “기무사령관이나 치안본부장은 나한테 보고하기 전 박관용 비서실장에게 우선 보고하라.” 이로써 권력기관장이 대통령 독대(獨對)와 직보(直報)를 세 과시 밑천으로 삼던 시대는 끝났다. 독대 기회를 이용한 ‘별도 보고’로 ‘재미’를 보려던 권력기관장들의 꼼수도 사라졌다. 별도 보고란 여야 정치인·재벌들의 ‘여성 스캔들’ 등을 가리키는데, 대통령의 흥미나 돋우는 이런 유형의 보고는 국정 농단의 소지가 다분했다. 

 

비서실장 부임 전 역대 정권 비서실장으로부터 이런 폐습 차단을 당부받은 바 있는 박 전 의장은 정보·공안기관들의 ‘장난’을 철저히 차단했다고 했다. “내가 ‘소통령’ 소리를 들은 데는 ‘사전 보고’도 한 몫한다. 정부기관에 대한 장악력 강화는 국가원수 보필과 국정 추진에 많은 도움을 줬다.” 박 전 의장은 “YS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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