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해산하고, 위장 폐업신고 하고…
  • 이석·송응철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6.05.04 11:18
  • 호수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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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수사 대상 기업들의 책임 회피 행태…검찰 수사 시작되자 뒤늦게 ‘사과’
4월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제조기업 처벌 촉구 및 옥시 상품 불매 선언 시민사회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옥시 상품 불매를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연합뉴스

“아이를 살려내라.” “옥시는 피해자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라.” “내 아이와 아내가 하늘에서 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관련해 4월26일 검찰에 출두한 신현우 전 옥시 대표에게 쏟아진 피해자 가족들의 한 맺힌 외침이다. 검찰은 최근 수백여 명의 피해자와 사망자를 양산한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부장검사)의 첫 타깃은 영국계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옥시)다. 검찰은 앞서 이 회사 임직원들을 소환한 데 이어, 신현우 전 대표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그는 유해 가습기 살균제 ‘옥시싹싹 뉴 가습기당번’이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2001년 무렵 옥시 대표를 맡고 있었다. 신 전 대표는 검찰 조사에서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사전에 몰랐다며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검찰은 옥시가 제품위험성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은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틀 후인 4월28일엔 유해 가습기 살균제 ‘세퓨’ 제조사인 버터플라이이펙트의 오 아무개 전 대표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또 이날 세퓨 원료물질인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수입·공급업자 김 아무개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함께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오 전 대표가 옥시와 마찬가지로 제품 출시 전 PGH의 흡입 독성검사를 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이유를 집중 추궁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전 대표의 진술도 신 전 대표와 다르지 않았다. 제품의 유해 가능성을 사전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오 전 대표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관련해 4월26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신현우 전 옥시 대표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제품 유해 가능성 사전에 몰랐다” 이구동성

검찰은 이들 업체 외에도 홈플러스(‘홈플러스’)와 롯데마트(‘와이즐렉’)를 수사 선상에 올려놓은 상태다. 이 밖에 애경산업(‘가습기메이트’), 이마트(‘이플러스’), GS리테일(‘함박웃음’) 등도 수사 대상으로 거론돼왔다. 그러나 이들 회사는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직접 제조한 것이 아니라 판매만 했다는 이유에서다. 법조계에서도 도의적인 책임 외에 이들 회사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이들 회사는 사과나 보상 계획이 현재까지도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들 기업까지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여론이 악화되고 있어서다.

이번 사건이 처음 불거진 건 2011년이다. 그해 4월부터 호흡곤란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임산부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부터 급성호흡부전으로 입원한 임산부들이 원인 불명의 폐 질환으로 사망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질병관리본부는 즉시 역학조사에 들어갔고, 폐 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는 2012년 8월 가해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를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이후 수사는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문제가 불거진 지 5년여가 흐른 올해 초에 와서야 전담 수사팀을 꾸려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이는 검찰이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가습기 살균제가 폐 질환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한 과학적·의학적 견해가 필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수사를 진행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그동안 계속해서 피해자 규모를 집계해왔다. 앞서 1·2차 조사를 통해 공식 집계된 피해자 수는 530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 중 146명이 사망했다. 피해자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정부가 752명의 추가 피해자에 대한 3차 조사를 진행 중인 데다, 4차 피해자 접수도 앞두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일부 환경단체들은 피해자만 1500명이 넘으며, 잠재적 피해자는 훨씬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피해자는 넘쳐나지만,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들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책임지기는커녕 잘못을 은폐·축소하는 데 급급한 모습만 보여 왔다. 피해자 가족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공분이 최근 더 높아진 이유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기업들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피해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보상안을 제시하는 등 바짝 몸을 엎드리고 있다. 가장 먼저 사과에 나선 건 롯데마트다. 김종인 롯데마트 대표는 4월18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 앞에 나와 피해자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100억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나 롯데마트의 사과는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5년이나 지난 시점에, 특히 검찰의 문제 업체 소환조사를 하루 앞둔 날 사과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특히 롯데마트는 사과문 발표에 앞서 피해자들에게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롯데마트의 사과는 유가족들 사이에서 책임을 덜기 위한 ‘면피성’ 내지는 언론을 통한 ‘보여주기식’이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롯데마트가 사과문을 발표한 당일 홈플러스도 부랴부랴 보상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역시 홈플러스의 대응도 그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정식 사과문 발표가 아닌 기자회견 수준으로 진행됐고, 구체적인 보상 계획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롯데마트의 ‘선수(先手)’로 궁지에 몰리자 어쩔 수 없이 대응에 나섰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자 홈플러스는 8일 후인 4월26일 공식 사과에 나섰다. 또 보상 전담기구를 설치하고 정부 기관과 함께 협의해 원활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보상 전담조직이 구성되는 시기와 규모, 구성원을 비롯한 구체적인 보상 계획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롯데마트 대표(왼쪽 사진)와 김상현 홈플러스 대표는 4월18일과 26일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을 상대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 연합뉴스

검찰, 옥시 영국 본사 직접 수사 방안도 검토

롯데마트나 홈플러스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다른 회사들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옥시가 그렇다. 이 회사는 앞서 폐 질환 사망원인을 가습기 살균제로 지목한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 결과를 반박하기 위해 서울대 등에 의뢰한 실험 결과를 조작하려 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불리한 조사 결과 내용을 빼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올해 초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상황에서도 유리한 내용만 선별적으로 검찰에 제출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옥시는 또 자신들의 제품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를 위해 황사와 가습기 자체에서 번식한 세균 등이 폐 손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놔 전문가들을 황당케 하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옥시의 사과만큼은 받지 않겠다며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것도 이런 행태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옥시는 책임을 피할 목적으로 주식회사를 유한회사 형태로 변경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옥시는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직후인 2011년 12월, 주식회사 옥시를 해산했다. 그리고 동명의 유한회사를 설립해 주주와 임원·상호를 모두 넘겨받았다. 사실상 법인만 바꾼 채로 영업을 계속해오고 있는 셈이다. 2014년에는 아예 ‘RB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달기도 했다. 형사소송법 제328조에 따르면, 피고인이 사망하거나 피고인인 법인이 존속하지 않게 됐을 경우 공소기각을 결정할 수 있다. 주식회사 옥시가 사라져 책임을 물을 주체가 없어지게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검찰은 옥시의 신설 법인과 이전 법인이 사실상 같은 회사라는 점을 입증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옥시 영국 본사의 입장도 한국 지사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 지사와는 법적으로 별개의 독립적인 회사여서 법적인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 가족들은 검찰이 이들의 소유관계를 명확히 파헤치고 살균제의 출시부터 회수까지 본사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입증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검찰도 살균제 개발 당시 위험성 여부에 대한 보고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영국 본사 개입 정황이 확인되면 본사를 직접 수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세퓨는 진즉에 사업장을 정리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불과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폐업신고를 하고, 사실상 잠적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왔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검찰 수사로 세퓨의 유죄가 인정되더라도 사실상 피해보상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세퓨도 위장폐업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세퓨는 오 전 대표가 혼자 운영하는 사실상 개인회사였다. 그러나 그를 대신해 부인인 김 아무개씨가 아직도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친환경 제품’을 팔고 있는 것이다. 과거 이 카페에선 세퓨 제품을 홍보하는 각종 이벤트가 열린 바 있다. 김씨가 운영 중인 인터넷 쇼핑몰 사업장 주소가 과거 세퓨의 주소와 동일하다는 점은 위장폐업 의혹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이를 두고 피해자 가족들은 세퓨가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꼼수를 부렸다며 분노하고 있다.

현재 피해자 가족들은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와 기업의 사과,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특히 정치권에서 팔을 걷고 나선 모습이다. 여당은 검찰 수사가 미진할 경우 국회 차원에서 대응하겠다고 밝혔고, 야당은 한발 더 나아가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을 제정하고 청문회도 추진하자고 했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국무회의에서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고 나섰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이번 사건의 수사가 어디까지 확산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정부도 여론 들끓자 뒤늦게 강경 대응

2013~14년 마무리된 정부의 1·2차 피해자 조사와 2015년 진행된 3차 피해자 접수로 확인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모두 1282명이다. 이 중 17%인 218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도 민간 신고센터를 통해 피해 신고가 계속 접수됐다. 1월1일부터 3월25일까지 접수된 피해자만 246명(사망자 14명)에 이른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싹싹’ 제품만 12년간 453만개가 판매됐다. 제조사인 옥시레킷벤키저가 2011년 호서대에 의뢰한 노출 시험에 따르면, 60회 중 2회가 고농도로 조사됐다. 단순히 계산해도 15만1000개의 사용자가 위험 농도에 노출됐다는 얘기다.

이전에 정부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제품의 피해자 역시 계속 늘어나고 있다. 향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현재까지 신고된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1990년대 말부터 연간 60만개의 가습기 살균제가 판매된 만큼 추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환경부는 2015년 말 피해 신고 접수를 마감했다. 피해 유족과 시민단체들이 피해 신고 연장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1월 서울중앙지검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조사를 위해 특별조사팀이 꾸려졌다. 검찰은 살균제 제조·판매업체뿐 아니라 경영진의 자택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등 조사 강도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업체가 외부 기관에 의뢰한 독성 실험 결과를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과 함께 진상조사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정부가 입장을 바꿨다. 정부 고시를 개정해 5월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조사 접수를 재개한다고 밝혔다. 3차 조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청을 받지 않겠다는 기존 방침을 바꾼 것이다. 폐 이외의 다른 신체부위 피해에 대한 진단 판정기준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는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와 사망자의 인과관계가 무관한 것으로 나온 4단계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생사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기존 질환이 더 악화되는 기저질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가 여론에 떠밀려 대책을 내놓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실제로 정부는 2011년 원인 미상의 폐 손상 환자가 늘어나자 역학조사에 착수했고, 폐 손상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지목했다. 피해자 유족이나 시민단체들은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당시 김황식 총리까지 나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지만,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환경부 소관이 아니다”고 버텼다. 국회는 환경성 질환 지정 여부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환경성 질환이 아니다”고 맞섰다. 2014년 3월 국회가 특별법 제정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는 마지못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환경보건법상의 환경성 질환’으로 결정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관련성이 확실한 1단계와 관련성이 높은 2단계 피해자의 경우 가해 기업에 대한 구상권을 전제로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했지만, 4단계 피해자는 생존 여부 등 기본적인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뒤늦게라도 대책을 내놓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생색내기로 변질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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