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강한 만큼 막판 속절없이 무너져
  • 정리=김현일 대기자, 박관용│前 국회의장 (.)
  • 승인 2016.05.05 17:50
  • 호수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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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상실…취임 초와 말기가 정반대인 게 우연 아냐

김영삼(YS) 대통령이 추진한 개혁 결과물은 역대 어느 대통령과 비길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하나회 숙정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 수십 년간의 숙제를 일거에 해냈다. ‘해치웠다’는 격한 표현이 더 어울린다. YS가 아니었다면 어려웠으리란 평가가 결코 지나친 게 아니다. 시대를 읽는 통찰력, 무서운 고집과 뚝심, 한다면 하는 결단과 돌파력 등등이 정치인 YS를 읽는 키워드임에 분명하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YS 임기 초반의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임기 후반의 지지율은 최악이다. 취임 첫해 90%라는 가공할 지지율이 퇴임 직전엔 5%로 추락했다. 임기 말의 ‘한보사태와 차남 현철 구속’ ‘국가부도 위기에 이른 IMF 사태’를 감안하더라도 답이 되지 않는다. 임기 초반의 지지율이 원체 높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지율이 중간에 등락(騰落)을 거듭한 게 아니라 일관되게 하향곡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YS는 퇴임 후 “칼국수 먹으면서 열심히 했는데…. 내 눈 귀가 멀었나 보다”라고 탄식했다는 보도도 있다. 그렇다. ‘눈과 귀가 어두웠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뭉뚱그려도 전체에 대한 답으론 부족하다. 결국 YS 스타일에 ‘연차(年次)에 따른 청와대 권력의 속성’을 대입해야 근접한 결론에 도달한다.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를 주재한 김영삼 대통령. 문민시대를 연 국가원수로서 자신감이 넘친다. 취임 20일 만에 열린 회의(1993년 3월)는 일련의 개혁 조치를 앞둔 위하(威?) 성격이 강했다.

YS 스타일이 극명하게 두드러지는 시공(時空)은 그가 평생 달려온 외길, 대권 가도에서다. 청와대 입성 직전의 3당 합당, 당권 장악, 대선후보 쟁취 세 단계만 들여다봐도 그의 성정이 여실히 엿보인다. 후일 청와대 비서실장이 된 ‘박관용 의원’을 비롯한 민주계 인사들이나 3당 합당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의 증언들은 생생하다.

 

통찰·결단·돌파력, 뚝심의 정치인이었지만…

 

#13대 총선 결과로 나타난 여소야대 정치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가 구상한 당초의 연합 상대는 김대중(DJ) 총재의 평민당. 민정당과 평민당 간 제휴가 이뤄지면 자신에겐 영영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YS는 그토록 싫어하던 군사정권 후계세력과 합치는 모험을 결행한다. ‘호랑이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논리였지만 최측근 최형우 의원까지 극구 반대하는 변칙(變則)이었다. “저들에게 뒤통수나 맞는 겁니다.” 대다수의 참모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YS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다’로 방향이 정해지자 추종자들에게까지 ‘배신’으로 비치는 통합을 관철하기 위해 최측근 ‘좌(左)동영 우(右)형우(김동영·최형우 의원)’를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했다. 대신 황병태 정책위의장과 김덕룡 실장을 내세웠다. YS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경제참모인 박재윤 경제수석을 따돌린 게 우연이 아니다. 이기택 계보인 박관용 의원이 “YS를 거부하면 결국 야당의 양대 축인 DJ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YS 길을 따르겠다”고 한 것을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YS는 자기가 필요한 ‘합당’은 받아먹었다. ‘낚아챘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그러나 ‘대통령제 포기’는 기어코 피해 갔다. 그는 3당 합당의 주요 대전제로 이미 합의한 내각책임제를 합당 발표 직전의 막판 3자회동(노태우-YS-JP)에서 차단했다. 낯 한 번 붉히지 않고,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말을 뒤집었다. “아직 당내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가 이유였다. “창당 전당대회 때까지 발표를 미루자”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막상 창당 대회 때는 딴청을 부린다.

 

#1990년 1월22일 합당 선언 넉 달여 뒤 창당대회가 열렸다. YS는 또 특유의 고집과 ‘딴전’으로 상황을 뒤집는다. 노-YS-JP 세 사람이 사흘 전 3개 항의 내각제 개헌 합의문을 작성하고 자필 서명을 했다. 그래 놓고는 1항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만 강령에 포함시키자며 버텼다. 2항 ‘1년 이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와 3항 ‘이를 위해 금년 중 개헌작업에 착수한다’는 조항은 ‘일단’ 묻어둘 것을 고집했다. 합당을 ‘따먹기’ 위해 합의는 했지만 자신의 발목을 잡을 나머지 핵심 부분은 기어코 가로막았다. YS는 중앙일보가 내각제 개헌 합의를 특종보도하자 내각제 당론을 부인하면서 “합의 각서는 있을 수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YS의 눈총에 민정·공화계도 침묵했고, 어영부영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다섯 달 뒤 중앙일보가 합의서 사본을 보도했다. 꼼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된 YS였다. 

 

하지만 ‘YS는 YS였다’. 진실 공방을 유출논쟁으로 뒤바꿨다. 그는 “내각제 약속이 국민 위에 있을 수 없다”는 묘한 논리를 동원했다. 좌우간 그의 말 중심엔 ‘국민’이 있었다. 그리곤 고향 마산으로 내려가 버렸다. 보통의 정치인이라면 변명에 급급할 터이지만 YS는 역공을 폈다. 정반대의 국면이 연출됐다. ‘노 대통령이 판을 깨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승부수였고, 실제 먹혀들었다. 노 대통령은 김윤환 원내총무를 마산에 보내 YS를 달랬다. 내각제 포기를 약속했고, 아예 공식 발표했다. YS의 ‘더듬수’와 뒤집기는 익숙한 여론몰이 때문에 가능했다. “국민을 중앙에 세우는, 민주를 앞세우는 YS의 외침에는 호소력이 있었다. 예상이 빗나가면 시치미를 뚝 떼고, 맞아떨어지면 ‘보레이~. 내 뭐락캤나’ 하며 환하게 웃는 YS에겐 카리스마가 넘쳤다.” 배수진으로 상대의 양보를 받아내는 저력은 강기(剛氣)와 뱃심에 더해 상대가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세를 읽는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YS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의 개가(凱歌)라면 개가다.

 

1990년 1월,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노태우 대통령. 옆에 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종필 신공화당 총재의 포즈가 대비된다. YS는 합당의 대전제인 내각제 개헌 추진에 합의했지만 끝내 수용을 거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냈다. ⓒ 연합뉴스

 


최악 상황도 ‘자기 편한 대로’ 뒤집는 승부사

 

#‘판을 깰 수는 없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이용, 당 대표로서 자리를 다진 YS였으나 당내 소수파인 자신이 대선 후보를 꿰찰지는 합당 3년이 지나도록 미지수였다. “불안감이 민주계를 뒤덮었다. YS 본인도 흔들렸으나 겉으론 자신만만했다. 사실 합당 1년이 지났을 때 나(박관용)도 민주계 의원들과 탈당을 도모한 적이 있다. YS에게 비밀로 하고 몇몇이 탈당을 먼저 결행, 불가피한 상황을 만든다는 계산이었다. 내가 작성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한 날, 모의 장소인 마포 가든호텔 방에 YS가 뛰어들었다. ‘너그들 와 이러노? 이러면 안 된다. 하려면 나하고 같이하자.’ 김동영·최형우 의원도 YS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면서 탈당 사태는 일단락 났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분명한 메시지를 줬다. 판을 깬다는 게 허튼 협박이 아니라는 점을.” 

 

YS가 1991년 4월 DJ와 만나 내각제 개헌 반대와 공안정국 청산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자 청와대는 아연했다. 여당 대표가 야당 총재를 끌어들여 여당 총재(대통령)에게 견제구를 날리는 ‘변칙’은 YS만이 할 수 있는 회심의 강수(强手)였고 ‘민주계 탈당 시도’와 더불어 노 대통령을 압박하는 확실한 계기가 됐다. 내각제 개헌에 대한 불안은 DJ와 대구에서의 기습회동으로 쐐기를 박았다지만 대선후보는 다른 문제였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선에 앞서 총선(14대)이 실시됐었다. 이 3월 총선에서 YS의 민자당은 과반수 의석에 미달하는 149석을 얻는 데 그친다. 수도권에서 선전했다지만 67석이나 줄어든 것이다. 거대 여당의 참패였다. 당 대표로서 당연히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YS의 말과 행동은 일반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YS는 느닷없이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총선 패배에 책임을 느끼고 청구동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나는 황당했다. YS의 그런 태도에 분노가 느껴졌다.” JP의 회고다. 하지만 JP도 YS를 지지했다. 목표를 향해 돌진할 때는 ‘뻔뻔’이란 비난조차 YS에겐 사치였다. 특유의 판 뒤집기 기술로 최악의 국면을 일거에 털어내는 YS였다.

 

이런 YS였으니 청와대 주인이 됐을 때 어땠을까는 상상하는 대로다.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나 강했던 만큼 무너질 땐 속절없었다. 시대를 읽는 통찰력은커녕 당장의 현안에도 무덤덤했다. ‘아들을 감옥에 보낸 현직 대통령’은 의욕을 상실했다. 아주 싫어하는 두 사람의 질주-‘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 및 ‘김대중 대통령’ 등극-를 ‘용인’한 게 아니다. 무기력했기에 ‘방관’했다.

 


 

 

 

1993년 11월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클린턴 대통령을 옆에 두고 발을 꼬고 앉은 것은 괜한 게 아니다. ‘내가 YS다!’라는 과시였다.
제16대 노무현(盧) 대통령에겐 여러 장점이 있지만 특히 그 서민적 소탈함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아랫사람들과 격의 없는 대화와 토론을 가졌다. 때론 솔직함이 지나쳐 구설에 오를 정도였다. 盧를 못마땅해한 미국 백악관이 ‘이지 맨(easy man)’이라고 얕잡아 호칭한 것도 이런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 그럼에도 盧의 소통과 대화 노력은 오늘날에도 지도자의 덕목처럼 운위된다. 이런 盧의 고위 참모 중 하나였던 인물이 김병준 교수(국민대)다. 盧정부 전반에 혁신위원장·대통령정책실장을 지냈다. 잠시 교육부총리를 거쳐 청와대를 나온 지 5개월 만(2006년 10월)에 정책기획위원장 겸 대통령정책특보로 다시 불려갈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던 브레인이다. “그런 훌륭한 참모를 가진 대통령이 왜 그랬는지 의아스럽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 김 교수가 최근 동아일보에 다음의 글을 기고했다. “(정책특보로 다시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한 비서관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인사했다. ‘사람들이 대통령께 말을 잘 안 합니다. 이제 말씀하실 분이 오셔서….’ 정말 그랬다. 수석보좌관회의 분위기부터 달랐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뭘 그리 적는지 펜만 움직였다. 대통령 말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한마디라도 하려고 애쓰던 집권 초기 모습들이 아니었다.” 김 교수는 盧시대 풍경을 회상하면서 현 청와대의 경직성을 걱정했다. ‘盧정부마저 그랬으니 ‘레이저’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는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일대변신을 꾀해 정신 바짝 차려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맞다. ‘강화(江華)도령’도 청와대 주인이 되면 달라진다. 취임 6개월만 지나면 눈에서 광채가 나고 위엄이 붙는다. (강화도령은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을 낮춰 가리키는 별명. 사도세자와 후궁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의 3남인 전계대원군의 막내, 즉 사도세자의 증손자. 처음 이름은 원범(元範)이다. 조선 24대 헌종이 후손 없이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당시 정권을 잡은 안동 김씨는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 강화도에 유배돼 농사를 짓던 원범을 왕으로 세웠다.) 일단 대통령이 되면 엊그제까지 허물없이 지내던 이들까지도 범접(犯接)하기 어려운 권위가 붙는다는 것(강화도령은 끝내 외척들에게 휘둘렸지만). 하물며 ‘강화도령 대통령’이 아닌, 나름의 경륜을 쌓고 국민 직접선거를 통해 지도력을 인정받은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그 서슬이 과연 얼마나 퍼렇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재임 2~3년 차에 이를 즈음이면 참모나 각료들이 ‘눈 맞추기’조차 어려워진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물론 5년 단임제이므로 4년 차에 접어들며 레임덕을 맞게 돼 위엄의 크기는 점차 줄어들게 마련. 이런 까닭에 대통령의 통치 행태와 스타일을 일반화해 단정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취임 전과 후, 재임 연차에 따라 전혀 다르므로 대통령을 언급할 때는 시점과 당시 상황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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