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號, ‘청와대-야권’ 틈새서 버틸 맷집 있을까
  • 이승욱 기자·남상훈│세계일보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11 16:26
  • 호수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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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 ‘정진석·김광림 조합’으로 20대 새 원내 사령탑 구축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11월18일 국회에서 정진석 당시 국회 사무총장(오른쪽)과 국회 본관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뭐, 이번 경선은 뚜껑을 안 열어봐도 결과가 뻔한 것 같은데….” 새누리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새로운 원내 사령탑을 뽑을 예정이던 5월3일 오후, 여당 내 전략가로 통하는 A씨가 무심히 내뱉은 말이다. 이날 한 중앙 일간지를 통해 알려진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사위의 나이트클럽 지분 보유’ 보도와 관련해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김 전 대표는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연 김 전 대표의 사위를 둘러싼 과거 행적이 보도되면서 김 전 대표가 다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게 됐다. 공교롭게도 보도가 나온 날은 새누리당의 원내대표 경선이 있는 날이라서 더 미묘한 파장이 일었다. A씨는 “김 전 대표의 사위 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이 청와대나 친박(親박근혜)계와 연계돼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도 “원내대표 경선에서 표를 던질 새누리당 당선자들 입장에선 김 전 대표와 관련한 보도를 ‘표를 똑바로 찍어야 한다’는 모종의 시그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계 표 쏠림’으로 싱거운 승부

A씨의 분석은 정확했다. 이날 열린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은 당초 결선투표까지 갈것이란 예상과 달리 1차 투표에서 결론이 났다. 싱거운 승부였다. 충청 출신으로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정진석 원내대표(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가 119표 중 69표를 얻어 새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애초 비박계 중진인 나경원, 친박계 핵심인 유기준의원과의 3자 구도여서 1차 투표에서 승부가 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경선이 1차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싱거운 승부에 대해 여의도 정가에선 사실상 친박계가 결집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친박계 유 의원이 7표에 그친 점도 친박계의 ‘표 쏠림’을 방증한다.

차기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여당 안팎에선 과연 청와대와 당 주류인 친박계의 의중이 어느 후보에게로 쏠릴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신박’(새로운 친박)으로 분류되던 원유철 전 원내대표가 총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키운 당내 초선 그룹들이 주도한 ‘쿠데타’를 통해 축출된 마당에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마땅한 인물을 선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선이 다가올수록 여권 내부에서는 “청와대와 친박계가 ‘정진석(원내대표)-김광림(정책위의장) 조합’을 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이러한 분위기는 선거를 앞둔 친박계 의원들의 입을 통해서도 감지됐다. 새누리당 친박계 한 의원은 원내대표 경선을 하루 앞둔 5월2일 기자와 만나 “국민들이 4·13 총선에서 여당을 심판하며 자성하라고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생존을 위해선 (우리가) 당권을 장악해야 된다”고 전제한 뒤 “집권 4년 차에 총선 참패로 위기에 직면한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고 친박계가 참패 책임론을 조기에 극복해 당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선 정부 정책을 지원할 원내대표와 차기 대권을 관리할 당대표를 친박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친박계 의원도 “박 대통령이 국정에 전념해야 할 집권 3년 차에 비박(비박근혜)계가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맡아 당·청이 엇박자를 낸 뼈아픈 기억을 되새겨야 한다. 이번 원내대표 경선에 전략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정무수석을 지냈지만, 충청 출신으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박근혜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인물이다. 다른 두 후보에 비해 계파 색채가 옅은 셈이다. 특히 친박 실세 최경환 의원과 가까운 김광림 의원(경북 안동시)이 정 원내대표의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으로 조합을 이룬 점 또한 친박계의 입장에선 부담이 적은 카드였다.

당초 당 주류가 비박계인 나 의원의 물밑지원을 검토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반대로 나 의원이 ‘자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결국 정 원내대표가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의 ‘대항마’로 부각되자, 청와대와 친박계가 정 원내대표 지원으로 급선회했다는 후문이다. 김 의원이 나 의원과 정 원내대표로부터 동시에 러닝메이트 구애를 받았지만, 정 원내대표와 손을 잡으면서 후보군이 일정 정도 정리된 측면도 있다.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게 여의도 정가의 중론이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정 원내대표를 물밑지원했다는 분석엔 친박 핵심인 유기준 의원의 출마에 노골적으로 반대 의견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실린다. 친박계 좌장 격인 최경환 의원은 원내대표 경선 전에 ‘친박 자중론’을 펴며 유 의원의 출마를 반대했다. 하지만 유 의원은 출마를 강행했다. 유 의원은 최 의원과 친박계 원로인 서청원 의원이 자신들의 당권 욕심때문에 출마를 막고 있다며 강력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친박계 핵심 의원은 “유 의원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최경환 의원이 나의 출마를 막는데 자신도 당권 도전하려는 의사가 있으면서 왜 나를 막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더라”고 전했다.

유 의원의 출마 강행에 친박계는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친박계가 친박이 자중하지 않고 당내 권력 장악에 나서는 오만함을 보이고 있다는 여론의 비판을 우려해서다. 일단 ‘총선 참패 책임론’을 고려해 계파 색채가 옅은 인사를 원내대표로 밀고, 당권 도전의 길을 트려고 했던 친박계의 전략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5월3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한 나경원(위 사진), 유기준 의원. © 시사저널 최준필

원내대표 경선 통해 당권 의지 키운 친박

결과적으로 정 원내대표가 비박계 지지를 업은 나 의원을 예상과 달리 큰 표 차이로 꺾으면서 선거 패배 후 20일 만에 친박에 장악된 여당의 정치지형이 확인됐다. 친박계는 20대 총선 과정에서 영남과 충청·강원, 수도권에 친박 후보를 대거 공천했고 그들이 상당수 생환해 당내 세력 확장이란 목표를 달성했다. 그 결과 비박계에 밀려 원내대표와 당권을 비박계에 내줬던 수적열세를 만회한 것이다. 이번 원내대표 경선결과에 대해 여소야대 정국에서도 집권여당이 ‘뼈를 깎는 쇄신’보단 ‘당내 권력 장악’에 방점을 찍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방적인 국정운영으로 독주했던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민심의 심판을 받았지만, 당심은 친박계의 건재를 확인시켜줬다. 친박계 세력 규모가 19대 국회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45명에 달하는 초선 의원은 대부분 친박계로 분류된다.

친박계는 ‘정진석·김광림 체제’를 교두보로 삼아 당권 장악에 나설 것이다. 친박계 당 대표가 선출될 경우 비박계에 뺏겼던 당권을 2년 만에 되찾게 된다. 2014년 7월 친박 좌장인 서청원 의원이 비박계 김무성 대표에게 패해 당권을 내줬다. 지난해 2월엔 이주영 의원이 유승민 의원에게 원내대표 경선에서 무릎을 꿇었다. 당내 권력투쟁에서 번번이 비박계에 패배했던 친박계가 이번 원내대표 경선 승리로 설욕한 형국이다.

원내 사령탑을 장악한 친박계는 이제 당권 탈환을 시도할 기세다. 친박계의 당내 세력 확장 현상은 원외 당협위원장까지 포함해 치르는 전당대회에서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가 자체 분석한 결과, 20대 총선 공천자 중 친박계는 100여 명에 달한다. 서청원·최경환·홍문종·이정현 의원 등 친박 실세들이 당권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비박계에선 정병국·심재철의원 등이 거론된다. 친박계는 또 정 원내대표와 별도로 혁신위원회나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당분간 당 쇄신에 주력하며 친박 총선 책임론을 희석시킨 뒤, 전당대회를 열어 당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마련해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원내대표 경선에서 위축된 비박계의 위상을 확인한 만큼, 당권 장악에 대한 친박계의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5월3일 국회에서 열린 경선에서 새누리당 신임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으로 당선된 정진석·김광림 후보가 축하꽃다발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원내 새 사령탑, 당분간 靑과 교감하겠지만…

정진석 원내대표의 공식적인 임기는 2017년 5월말까지다. 새누리당 일각에선 조기 전당대회가 거론되고 있지만, 2017년 본격적인 대선 국면 직전까지 원내 사령탑으로 당·정·청과 대야 협상 창구를 맡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일단 정 원내대표가 친박계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만큼, 당·청 간의 관계에서 교감을 키우며 원만한 관계를 형성해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흐름일 뿐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르는 상황에서 차기 전당대회에서 친박계가 득세할 경우, 과거의 경험처럼 청와대와 정부가 여당을 압도하며 강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당·청 관계가 일방주의로 흐르자 당 내부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표출된 사례가 있다. 친박과 비박이 혼재돼 있는 당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내야 하는 원내대표의 입장에서 하염없이 친박계나 청와대의 입장에 끌려 다니는 모양새를 되풀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정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취임 후 일성으로 소통과 협치(協治)를 강조하고 있다. 정 원내대표는 5월4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신임 원내대표로 우상호 의원이 선출된 데 대해 여야 3당의 원내대표가 ‘잘맞는 조합’으로 짜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 원내대표는 이날 “박지원 원내대표(국민의당)와 우상호 원내대표(더민주)와 잘 맞는 삼각조합일 같다”면서 “세 명이 대화하면서 언성을 높이거나 싸울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총선 참패 후 자중지란을 겪으면서 분당사태까지 언급됐던 새누리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정진석 원내대표가 야당과의 협치와 청와대와의 수평적 관계 설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가 새누리당의 향후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최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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