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대통령 홀로 뛰는 것은 위험천만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5.12 17:29
  • 호수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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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참모들도 모르는 이인모 북송, 대북정책 꼬여

“100만이 뭐꼬. 할기면(어차피 하려면) 1000만 명이라고 해야제.” 1986년 2월, 직선제 개헌 촉구 서명운동을 추진키로 결정했을 때 YS(김영삼)는 단언했다. YS와 DJ(김대중)는 이민우 총재를 대표로 하는 신민당의 ‘호메이니’(호메이니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최고 정치 및 종교 지도자, 즉 막후 최고 실세를 가리키는 말). “YS의 이 말을 DJ에게 전한 밀사가 ‘1000만명은 현실성이 없다’고 하더라는 말을 다시 보고하자 YS는 ‘누가 숫자를 헤아려 보나’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보나 마나 정보부 얼라들이 방해하려 들 테고…그래서 안 됐다고 하면 된데이.’ YS의 논리는 명쾌했다.” 상도동계 측근들의 전언이다. 예견되는 방해공작까지도, 이쪽의 명분 축적과 실리 챙기는 데 써먹는 YS라는 것. 판세를 꿰고 있는 YS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예측이 빗나가면 빗나가는 대로 ‘대책’이 서 있는, 임기응변이 가능한 YS라서 가능한 얘기다. 자신의 속은 탈지언정 추종자들의 사기를 꺾지 않는 의연함은 당시 철권 정치 아래 야당 지도자에게는 매우 긴요한 덕목이었다(YS는 하나회 숙청 전후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내색을 일절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1일째인 3월9일 이제훈 중앙일보 편집국장 등 주요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 개혁시책 등을 설명했다. 대통령은 이날 참석자들에게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송’ 구상을 ‘선물’했다. ⓒ 연합뉴스

 


과욕이 문제, ‘입맛에’ 맞으면 설익었어도…

 

양김의 성공적 정계복귀를 가능케 한 2·12 총선 1주년을 맞아 닻을 올린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은 YS 예상대로 대히트를 쳤다. 한국의 민주화를 얘기할 때 빼놓아선 안 될 6·10 항쟁은 서막부터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1000만’은 그 자체만으로 전두환 정권엔 무서운 경고였고 다수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작용했다. 이 ‘1000만 vs 100만’ 일화에선 긴박상황에 대처하는 YS와 DJ의 차이가 읽힌다. 과정을 뛰어넘어 핵심으로 곧장 돌진하는 YS의 단도직입(單刀直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장(特長)이었다. “그렇다고 YS가 과정을 등한시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목표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춰 온갖 장식과 수사(修辭)를 동원한다. 선후(先後)가 바뀐 만큼 엉성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단순한 구색 맞추기는 아니다. 목표 달성에 집중하니까 상대적으로 과정에 무심한 듯 비칠 따름이다. 집권 후 YS가 추진한 일련의 개혁정책은 이를 방증한다. 일관성에 시비를 낳기는 하지만 그 집중도는 놀랍다. 그 과정에 에러도 심심치 않았으나 몰아치기는 꽤나 효험을 봤다.” 당시 청와대 참모들의 증언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YS의 흡인력이라고 표현한다. 타당성이 있다 싶으면 즉각 채택하기 때문이다. “전교조 해직 교사 복직은 YS의 공약사항이 아니었다. DJ의 공약엔 들어 있었다. YS가 당선자 시절, 해직 교사의 일화를 예로 들며 당신께서 해야만 한다고 하니까 YS는 눈물을 훔쳤다. 그래서 (청와대 내부에서도 반론이 적지 않았으나)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회고에는 YS의 인간적 면모가 물씬 배어 나온다.

 

문제는 YS의 과욕이었다. 특히 야당 시절을 포함, 청와대 입성 전과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된 이후는 달라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다. 최고 지도자의 소통 노력과 여론 수렴은 상찬할 덕목이지만 입맛에 맞는다고 설익은 정책, 아이디어까지 덥석 물면 곤란한데 바로 이 대목이 골칫거리였다. 충분한 내부 토의와 검증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정책은 부메랑이 돼 청와대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한 패착은 연쇄적으로 부작용을 일으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미전향(未轉向) 장기수(長期囚) 이인모 북한 송환(北送)이다. 대통령이 그 민감한 사안을 정부와 청와대 참모들과의 협의 없이 불쑥 터뜨린 것이다. YS는 취임 12일째인 3월9일 각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한 자리에서 “선물을 주겠다”며 이인모 북송 방침을 밝혔다(대정부 투쟁을 위해 언론의 지원이 절실했던 YS의 야당 시절, 출입기자들은 늘 뉴스가 될 만한 소재 제공을 요구했다. 때문에 언론인들에 대한 가장 귀한 선물은 ‘기삿거리’라고 이해했고, 이날의 깜짝쇼도 같은 맥락). YS가 만찬 전부터 예정한 것인지, 아니면 만찬 참석자들의 잇단 개혁 시책에 대한 칭찬에 고무돼 꺼냈는지는 미지수지만 정말 안 할 얘기를 한 것이다. 

 

“내가 3월2일 독대 보고 때 이씨 건을 꺼낸 것은 맞다. 이씨의 건강이 매우 악화돼 있어 그대로 죽을 경우 시신 처리 등에 문제가 있으며 우리가 정치 탄압을 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더 이상의 지시나 논의는 없었다”는 게 한완상 당시 통일부총리의 관련 증언 요약이다. 3월16일 남북 연락관 접촉에서 성과가 있으면 송환 방안을 검토하라는 정도의 얘기가 있었을 뿐 독대 보고 이후 그날 만찬 때까지 별다른 협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덕 당시 안기부장도 같은 증언이다. “그와 관련해 대통령으로부터 사전 상의를 받거나 구체적 득실을 분석해보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결국 ‘이거다 싶으면 곧장 돌진하는’ 야당 시절의 습성이 그대로 되살아난 게 틀림없었다.

 

대통령이 ‘사고 치면’ 대책도 없는데…


“인수위 시절 재야인사들과도 접촉하면서 이씨 문제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 자신도 이씨 북송을 북쪽과의 적극적 대화에 유효적절한 카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책의 타이밍과 그에 따르는 득실에 대한 치밀한 검토가 전제돼야 하는데 문제는 대통령 홀로 뛰는 방식이었다.” 편집·보도국장 만찬에 배석했던 박관용 비서실장의 회고다. 상도동 인사들은 YS의 이 같은 일처리가 보안과 전격을 강조하던 야당 시절 습관으로 파악한다. 하나회 숙청이란 엄청난 과제를 공식 참모 조직을 ‘따돌리고’ 추진한 것도 그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또 그렇다 보니 비선 조직을 가동하게 되고, 비선의 중심에 있는 차남 현철이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와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YS의 돌출 발언에 얼마나 아연(啞然)했을까는 능히 짐작된다. 대통령이 ‘엎지른 물’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부랴부랴 대북 문제에 따른 특수성을 감안한 보도 자제를 요청한 뒤 수습에 진땀을 뺐다. 그러나 일단 불거진 마당이니 미룰 사안이 아니었다. 

 

덜 익었건, 때가 아니건 일단 대통령이 정식으로 꺼냈으니 밀고 나가는 도리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엄청난 부작용이었다. 안팎으로 후유증은 대단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 L호텔에서 열린 ‘통일관계 전략회의’는 이인모의 북송을 결정했다. 어폐가 있지만 대통령의 발언을 ‘추인(追認)’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갑자기 소집된 전략회의장에 들어서는 한 통일부총리, 한승주 외무장관, 권영해 국방장관, 김 안기부장 등의 표정은 ‘당혹’ 바로 그것이었다. 전날 저녁의 해프닝을 잘 아는 청와대 박관용 실장이나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야 그나마 사전 지식이 있었다지만, 다른 안보·외교 수뇌들에겐 ‘아닌 밤중에’ 식의 돌출이었으니 그랬다. 이런 터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3월12일)했다. 속된 말로 ‘(찬물)한 바가지를 끼얹은 것’이었다. 청와대와 정부의 체통은 말이 아니게 됐다. 우파 보수 세력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여야 모두 ‘아마추어’ 정부의 무정견을 질타했다.

 

YS는 나중에 “조건 없이 보내주면 그들도 느끼는 바가 있으니 좋은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다”고 청와대 참모들에게 에둘러 ‘변명’했다지만 당시 상황은 정말 심각했다. 제일 높은 어른이 ‘저지른’ 일이라 문책은 못하더라도 사태 자체는 추슬러야 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정책의 왜곡은 불가피했다. 대북 유화(宥和) 노선은 단숨에 강경으로 급선회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며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 제의 등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으나 한 달도 못 가 정반대인 대결의 길로 치달아야 했다. 북한이 NPT 탈퇴로 ‘보답’하고, 그럼에도 공언을 지키기 위해 북한으로 송환(3월19일)한 이인모는 ‘병든 노인’이 아닌 대남 전사가 돼 남한을 독하게 비난했으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끝내 북한을 옹호했던 이인모가 1993년 3월19일 인도 장소인 판문점 중립국감독위 사무실로 이송되고 있다. 42년7개월 만에 북한으로 귀환, 북한 영웅이 된 이인모는 한국을 맹비난했고 인도주의를 표방했던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이 강경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 연합뉴스

 


국정의 시스템화만이 위험 최소화

 

취임 초반 잘나가던 문민정부는 ‘이인모 사태’로 호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수면 아래 잠복하던 ‘청와대 잠입 좌파(左派)’ 비판 여론도 들끓게 됐다. YS는 이 북새통을 ‘한 통일부총리 탓’으로 돌렸다. 이후 한 부총리를 가까이 부르지 않고 ‘방치’하던 YS는 1993년 말 개각 때 그를 경질했다. 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혀 대통령이 참석하는 군 공식 행사에도 끼지 못한 이병태 국방장관의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좌파로 분류되는 김정남 교육문화수석에 대한 YS의 애정은 여전했고, 김 수석은 역사바로세우기 사업 등을 보좌하고는 1년 뒤인 1994년 말 당정 개편 때 청와대를 떠났다). 

 

명색이 부총리를 내보내면서 경질 통보도 박관용 비서실장을 통해서 했다. 그것도 ‘자르기’ 1시간 전이었다. YS의 한 부총리에 대한 야박(野薄)을 부채질한 것은 그가 DJ와 내통해왔다는 보고다. 한 부총리가 14대 대선 패배 후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DJ의 아태평화재단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보낸 게 증거자료의 하나가 됐고, 이런 것들이 YS의 부아를 돋웠다는 후문이다. 당시 한 부총리 동정을 보고한 것도 공식 라인이 아닌 비선이었다(YS는 1993년 12월22일 당정개편을 단행하면서 주돈식 정무수석을 공보수석으로, 이경재 공보수석을 공보처 차관으로, 이원종 공보처 차관을 정무수석으로 자리바꿈했다. 주 정무·이 공보 수석의 이동에는 YS의 불만이 작용한 게 분명한데, 공보로 이동 배치 통보를 받은 주 수석은 사표를 제출하기 직전 청와대 출입 중앙일보 K기자의 만류로 보류했다. 이후 주 공보수석은 박 실장의 적극적 비호 아래 정무1장관을 거쳐 문화체육부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YS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던지 각기 두 차례의 청와대 수석과 장관을 지냈음에도 문민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다).

 

문민정부 국정 추진에서 시비되는 대목이 일관성이다. 집중도는 그럴싸하나 실질과 디테일이 한참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국내외 부문을 나눠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특히 문민정부 초반의 국내 시책은 비교적 잘 유지된 데 반해 외교·안보 부문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다. 냉·온탕을 넘나드는 모양새라는 것. 여기에는 이인모 북송이라는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적잖이 한몫했고, 거기엔 YS의 ‘나 홀로’가 자리한다. 이후 북한 핵 처리 과정에서 ‘핵을 든 자와는 악수를 할 수 없다(취임 100일 연설)’고 했다가,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직접 교섭을 벌이자 미국과 각을 세우고, 미국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 공습에 나서자 ‘단 한 명의 한국군도 동원 않겠다’고 가로막고, 김일성 북한 주석과 평양 정상회담을 추진하다 김 주석이 급사하자 조문(弔問) 금지령을 내리고…. 웬만한 전문가들조차 헷갈리는 혼선이 거푸 이뤄졌다(김정남 교문 수석은 교황의 유엔 연설문 가운데 ‘핵을 든 손으론 악수를 할 수 없다’는 구절을 원용했는데 자신을 견제하는 공보수석실이 ‘핵을 든 자와 악수를 할 수 없다’로 바꿨다고 했다. 북측이 오해할 소지가 다분했다는 것. YS의 신임이 두터운 김 수석은 YS 취임사, 취임 100일 기념 연설,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문, 성수대교 붕괴 대국민 사과문 등을 작성했는데 김 수석은 주무 부서인 공보수석실이 괜히 부담스러워하며 자신의 글을 뜯어고치곤 했다고 후일 한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난제가 널려 있는 고도의 산업화 시대에 국정의 시스템화(化)는 비단 YS 시대에 해당되는 금언(金言)이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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