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선수’ 왕정훈 주니어 시절 역경 딛고 유럽 강호 대열에 합류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6 20:26
  • 호수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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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초 유럽투어 2주 연속 우승…20세 263일 최연소 기록도 달성

5월15일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인 모리셔스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리셔스 부샴의 포시즌스골프클럽(파72·7401야드)에서다. 유러피언프로골프(EPGA) 투어 아프라시아(AfrAsia) 뱅크 모리셔스오픈(총상금 100만 유로) 최종일 경기. 17번 홀까지 우승을 앞두고 2명의 선수가 동타였다. 

 

마지막 18번 홀(파5). 먼저 왕정훈(21·캘러웨이)이 세컨드 샷을 시도했다. 그린에 오른 볼은 아쉽게도 그린을 맞고 뒤로 넘어가 벙커로 굴러 들어갔다. 경쟁자 시디커 라만(방글라데시)이 우드로 날린 볼 역시 그린에 오르지 못하고 그린 뒤쪽으로 밀렸다. 라만이 먼저 칩샷 한 볼이 하늘로 오르더니 홀 왼쪽 턱에 살짝 걸려 갤러리들은 깜짝 놀랐다. 다행히 핀에서 2.5m 굴러갔다. 

 

이날 신들린 듯한 두 번의 벙커샷을 선보인 왕정훈은 절묘한 벙커샷으로 볼을 홀 위쪽 1.5m에 붙였다. 라만의 버디 퍼팅은 홀을 살짝 벗어났다. 그러나 왕정훈의 우승을 위한 버디 퍼팅은 기분 좋게 홀 아래로 사라졌다.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두 번 우승으로 세계 랭킹 70위로 껑충

 

한국의 ‘슈퍼 새내기’ 왕정훈이 세계 골프 역사를 다시 썼다. 그는 한국인 및 아시아인 최초로 EPGA 투어 2주 연속 우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는 유럽 투어 3승을 거둔 양용은(44)에 이어 유러피언 투어에서 2승 이상 거둔 두 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이에 앞서 왕정훈은 지난주 모로코 라바트에서 열린 EPGA 투어 핫산 2세 트로피에서 첫 우승을 했다. 재미난 사실은 첫 번째 우승을 했을 때는 어버이날이었고, 두 번째 우승한 날은 아버지 왕영조씨의 60번째 생일이었다. 

 

유럽 투어에서 2개 대회 연속 우승은 세계 골프 랭킹 3위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2014년 8월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과 PGA 챔피언십을 연달아 제패한 이후 1년 9개월 만이다.  20세 263일인 왕정훈은 유러피언 투어 사상 최연소 2개 대회 연속 우승자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이로써 왕정훈은 지난해 세계 골프 랭킹 169위에서 첫 우승 뒤 88위, 두 번째 우승 뒤 70위로 껑충 뛰었다.

 

유럽에서 이수민(23·CJ오쇼핑)과 함께 ‘코리아 브랜드’를 알리고 있는 왕정훈과 관련해 국내 골프팬들에게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모르코와 모리셔스에서 현지 교민들에게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고 골프를 마친 후 흥분하고 기뻐한 왕정훈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 투어에 5월 입회해 단 3개 대회만 출전했다. 지난해 5월 GS칼렉스 매경오픈에서 공동 51위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왕정훈이 중국 선수인 줄 알았다. 황당한 해프닝이었다. 이어 SK텔레콤에서 공동 3위에 오르자 ‘왕정훈이 누구지?’라며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9월 코오롱 한국오픈에서 공동 3위를 차지하면서 왕정훈의 이름을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키가 180cm인데다 드라이버 거리가 300야드 이상 나오는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골프 관계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최근 2주간 구름을 타는 듯 행복했을 왕정훈. 그도 그럴 것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는 말이 실감 났을 것 같다. 자신이 2주 연속, 그것도 내 로라 하는 유럽 강호들이 즐비한 EPGA 투어에서 우승이라니. 운 좋게도 왕(王)정훈은 모로코 왕이 만든 대회에서 우승한 데 이어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큰 섬에서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의 주니어 시절은 불우했다. ‘깊은 그늘’과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철이 들기 전인 어린 시절에 감당해야 할 천근 바위덩이보다 더 무거운 엄청난 ‘무게’를 짊어졌다. 이것이 그를 ‘아이언 맨’처럼 멘털이 강한 강심장 선수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승부욕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수줍어 할 정도로 착하고 선한 그는 일단 코스에 들어서면 눈빛이 달라진다. 일단 경기에 들어가면 360도 돌변해 그만의 강인함이 돋보인다. 어려서 기본기를 잘 터득해 드라이버 거리도 300야드 이상 날리고 쇼트게임도 탁월하다.   

 

한국의 주니어들이 대개 부모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하는 것처럼 그도 어릴 때부터 골프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클럽을 잡은 그는 1995년생으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활약하는 김시우(21·CJ오쇼핑)가 라이벌이었다. 김효주(21·롯데)·백규정(21·CJ오쇼핑) 등이 동기다.  

 

그러나 골프에 대한 시각 차이로 인해 왕정훈의 아버지와 왕정훈은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향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한국을 떠난 이유는 스포츠인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는 것만 주입하는 교육이 싫은 데다 대회가 너무 많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됐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대회도 못 나갔던 불운한 시절 겪어

 

낯선 이국땅에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사리 손으로 굳은살이 박 힐 정도로 클럽을 휘둘렀다. 어린 나이에도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볼을 치면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연습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비용도 저렴한 데다 실전 연습을 하기에 최적인 필리핀에서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학제상으로 유급이 돼 3학년 선수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으로 대회에 출전했다. 3학년인데 1학년하고 경기를 하다 보니 우승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부모들의 시기와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1학년으로도 뛰지 못했다. 

 

이를 참다못해 부자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아뿔싸, 여기서도 일이 터졌다. 실력이 뛰어난 왕정훈은 필리핀 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르는 등 국가대표들을 제치고 우승을 하는 것 아닌가. 필리핀은 국가대표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한국 선수가 국가대표를 이기니까 급여 받기가 곤란하다며 필리핀도 난색을 표했다. 필리핀 대회에도 못 나가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부자는 골프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준비하면 기회는 오는가. 이때 중국에서 3부 투어가 생겼다. 나이 제한이 없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16세였다. 2012년 프로로 전향했다. 실력에 걸맞게 상금왕이 됐다. 그러면서 아시안 투어로 눈을 돌렸다. 아시안 투어는 유럽 투어와 PGA 투어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다.  

 

2013년 아시안 투어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시드를 잃었다. 재기를 노리던 그는 2014년 상금랭킹 21위, 지난해는 상금랭킹 9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아시아에서 스스로(?) 강호라고 생각한 그는 ‘보다 큰물에서 놀자’고 작정하고 유럽 투어로 방향을 틀었다.

 

모르코행은 그의 계획에 없었다. 출전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기선수였다. 순번은 3번. 다른 선수가 포기해야 출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가겠다는 아들과 보류하자는 아버지의 의견이 엇갈렸다. GS칼텍스 매경오픈도 신청한 상태였다. 

 

이유는 경비도 문제지만 모로코로 가는 데 26시간, 거기서 대회장인 모리셔스로 가는 데 20시간, 또 한국에 돌아오려면 20시간이 넘게 걸린다. 왕정훈이 체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대기 순번으로 모로코까지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기내식 먹으러 가느냐”고 핀잔을 줬을까. 아들은 모로코로 가서 연습이라도 하고 오겠다며 먼저 항공 티켓을 끊었다. 다행히 출발 직전에 포기 선수가 있으니 출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모르코로 향했다.

이 선택이 왕정훈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보란 듯이 유러피언 투어 핫산 2세 트로피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도 연장전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모리셔스오픈에서도 최종일 4타 차까지 지고 있던 왕정훈은 라만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이뤘다. 

 

유럽 선수들은 로리 매킬로이처럼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약하는 최정상의 강호들이 적지 않다. 특히 악천후 속에서 늘 경기를 하는 유럽 선수들은 ‘잡초’처럼 질기고 강하다. 왕정훈이 이런 험난한 필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는지 팬들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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