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부르는 스토킹, 처벌은 범칙금 10만원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5.29 22:43
  • 호수 138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토킹 방지법 국회 발의 8건 모두 폐기... 여소야대 20대 국회 최우선 법안으로 꼽혀

잘못된 집착이 낳은 비극이었다. 지난 4월19일 정오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아파트 1층 주차장에서 충격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 남성이 도망가는 여성을 쫓아가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이 남성은 경비원과 아파트 주민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분여 동안 수차례 피해 여성을 찔러 사망에 이르게 했다. 흉기를 아파트 쓰레기통에 버린 뒤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했던 남성은 다음 날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살인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 두 사람은 한때 연인 관계였다. 과거 1년 정도 교제했다가 사건 발생 3주 전 서로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남성은 헤어진 이후에도 여성을 찾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사건 발생 직전에는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달라’는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던 여성은 결국 이날 세상을 떠났다.

 

 

 

스토킹 사례 21% 강력 범죄로 이어져

 

최근 스토킹(Stalking)으로 인한 강력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과거 유명 연예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스토킹은 현재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범죄가 됐다. 지난해 7월에는 대구에 사는 한 40대 주부가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이 여성은 사건 보름 전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며 경찰에 안심귀가 신청까지 했지만, 결국 가해자의 흉기를 피할 순 없었다.

 

2014년 12월에는 3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에 의해 스토킹에 시달리다가 살해됐다. 가해자는 7개월가량 만남을 이어오다가 이별을 통보받은 직후 과도한 집착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사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피해자는 사건 전날 인근 지구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13년 5월에는 스토킹 가해자로부터 도망치던 10대 여성이 엘리베이터 통로로 떨어져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스토킹은 강력 범죄의 ‘전조 증상’으로 볼 수 있다. 2014년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스토킹 피해 상담 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40건의 스토킹 피해 상담 사례 중 상해나 살인미수·감금·납치 등 직접적인 강력 범죄에 해당하는 경우가 51건(21%)에 달했다. 지나친 전화나 문자메시지는 점차 협박으로 발전하고, 물리적 폭력이나 괴롭힘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집이나 직장으로 찾아오거나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사례도 있었다. 1~6개월간 스토킹에 시달렸다는 사람이 32%로 가장 많았지만, 6개월 이상 스토킹 범죄에 노출된 사람도 28%나 됐다.

 

하지만 스토킹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은 상대적으로 너그럽다. 사랑이라는 개념에 숨어 과도한 애정 공세로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통념은 피해자가 주변인에게 스토킹 피해를 인정받기는커녕 사법기관에 신고하기조차 어렵게 만든다. 스토킹 가해자의 90%는 주변 지인이다. 때문에 자칫 신고했다가 ‘과민 반응’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박민지(가명·28)씨는 최근 인근 지구대를 찾았다. 대학 동창의 과도한 애정 공세 때문이었다. 호감으로 시작된 그의 행동은 3개월 동안 점차 과도해졌다. 하루 수십 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회사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다른 동창들에게 박씨와 연인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점차 두려움으로 변해 있었다. 지구대 경찰의 반응은 박씨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경찰은 박씨에게 ‘정식으로 신고하게 될 경우 상대를 자극할 수도 있다’거나 ‘대학 동창이니까 잘 설득해보라’고 조언했다. 

 

명시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신고자의 정신적 고통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 상대에게 전화나 구두·서면 등으로 거절 의사를 밝힌 내용 등이필요하다고 했다. 협박죄 등이 별도로 적용되지 않는 한 스토킹 범죄를 인정받아도 최대 범칙금이 10만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낫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 근거는 ‘경범죄 처벌법’이 전부다. 그나마 2013년 3월22일 경범죄 처벌법 개정안이 마련돼 ‘지속적 괴롭힘’에 대한 근거 조항이 새롭게 반영된 결과다. 해당 조문은 ‘상대방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따라다니기·잠복하여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범칙금으로 10만원을 내도록 했다. 출판물 부당 게재나 거짓광고, 암표매매 적발 시 부과되는 범칙금 16만원보다도 적다.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하소연

 

경찰은 어디까지 스토킹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가 발생하자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했다. 거절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3번 이상 만남이나 교제를 요구하면 스토킹에 해당된다. 요구 횟수가 2회에 그쳤더라도 상대방에게 공포나 불안감을 주는 명백한 사유가 있다면 처벌 대상이다. 문제는 ‘지속적인 괴롭힘’의 증거를 피해자 스스로 제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가해자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스토킹의 경우에는 ‘명시적인 거절 의사’를 밝힐 방법도 마땅찮다.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경범죄 처벌법에 규정된 스토킹 처벌 규정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스토킹 피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경범죄로 바라보는 것은 ‘애정 공세’라며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기존의 잘못된 통념을 강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며 “스토킹의 특수성이 반영된 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 일선 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관계자는 “공권력을 집행하는 경찰은 법 근거가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현 상태에서는 스토킹 범죄를 경범죄 처벌법으로 범칙금 끊는 것말고 개입할 근거가 없다”며 “가정 폭력의 경우 경찰이 접근 금지 및 퇴거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권한을 담은 근거 법령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스토킹 방지법’ 20대 국회서 처리될까

 

 

법 개정에 나서야 할 국회는 ‘스토킹 방지법’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지난 1999년 이후 스토킹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 8건 발의됐다. 19대 국회에서만 스토킹 관련 범죄를 특별법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법안 4건이 발의됐지만, 19대 마지막 본회의에서도 상정되지 못했다. 19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 사실상 자동 폐기된 셈이다.

 

지난해 2월 발의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스토킹 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스토킹 행위에 대해 보호 처분이나 다른 예외를 적용하지 않고 반드시 형사처벌을 하도록 규정했다. 피해자의 처벌 의사 없이도 누구나 신고하고 수사할 수 있도록 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고소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고소 취하를 종용하는 등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또 즉시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경찰이 접근 금지 조치를 취한 뒤 사후 법원에 승인을 얻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경범죄 처벌법’에 규정된 스토킹 범죄를 ‘형법’에 명시하도록 하는 법안도 있다. 안효대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에는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스토킹 행위를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해 상대방에게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한 사람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처벌 강도가 폭행죄(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보다 높도록 했다. 이낙연 전 민주당 의원(현 전남지사)과 김제남 정의당 의원의 법안은 스토킹 피해자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스토킹의 정의, 피해자의 범위, 타 범죄 처벌 조항과의 형평성 등으로 인해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제대로 심사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5월30일 개원하는 20대 국회에서는 어느 때보다 처리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스토킹 방지법 개정에 찬성하는 정당의 의석수가 과반이 넘기 때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3월 각 정당으로부터 받은 ‘20대 국회 과제 공개 질의 답변 결과’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정의당은 모두 스토킹 범죄 처벌 법제화에 찬성했다. 답변을 거부한 새누리당을 제외하더라도 이들 3당의 의석수는 167석으로 과반을 넘는다. 특히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대표를 지냈던 남인순 의원, 한국여성의전화 이사 출신인 정춘숙 당선자(더불어민주당비례대표) 등은 벌써부터 스토킹 방지법을 20대 국회 최우선 법안으로 꼽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