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기억 심리부검] 집단적 따돌림과 집요한 괴롭힘…두 여중생 죽음으로 내몬 ‘사이버 불링’
  • 서종한 프로파일러(사이몬프레이저대학 정신건강법정책연구소 연구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6 03:20
  • 호수 138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포에 떨며 비명도 못 지른 10분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2009년 11월, 중학교 2학년 여학생 진희와 미영이가 15층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두 여학생은 옥상 위에서 뛰어내릴까 말까 3시간을 고민하다 진희가 먼저 옥상 난간 바깥으로 넘어가 매달렸다. 난간을 놓으면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마음이 바뀐 진희는 난간을 붙든 채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도움을 요청했다. 공포에 질리다 보니 목소리마저 잠겨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10여 분간을 매달려 있던 진희는 점점 힘이 빠졌다. 친구 미영이가 온 힘을 다해 손을 잡고 버텼지만 결국 손이 미끄러지면서 진희는 아래로 떨어졌다. 미영이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다리가 덜덜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필자는 옥상 난간에 남은 여학생들의 유류 지문과 환기구 위에 선명하게 찍힌 족(足)흔적을 관찰할 수 있었다. 공포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친 흔적들이다. 옥상 위에는 두 여학생이 함께 죽기 직전에 남긴 유서와 신발·책가방 등이 놓여 있었다. 사망 하루 전에는 자신들이 종종 글을 남기던 블로그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새가 되어 날아간다’라는 짧은 문장을 써 놓았다.

학교 폭력으로 인한 자살은 학교·교사·학부모·가해자·주변 학생들과 연관돼 있는 민감한 문제다. 한쪽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고 다른 한쪽은 그 책임을 물으려 한다. 필자는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이들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아쉬운 점은 누군가 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진희와 미영의 삶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은따’ 사실 못 알리고 우울감만 더해져

진희의 부모는 전주에서 작은 통닭집을 하다 적자를 메우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다. 그 이후 부모는 주중에 차를 몰고 다니며 서울에서 장사를 했다. 주말에는 집으로 내려왔지만 장사 준비로 바빠 아이들과 함께 지낼 여유가 별로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자 사춘기에 접어든 진희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부모와 주중에 떨어져 혼자 지내면서 외로움을 많이 탔다. 학교에 갔다 와서 하루 종일 집에 혼자만 있었다. 

중학교 1학년 학기말에 정기적으로 하는 심리평가에서 우울과 불안 수치가 높게 나와 담임선생님이 집과 휴대폰으로 수차례 연락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부모와 함께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됐다. 2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바뀌었다. 두 살 터울인 오빠는 야간 자율학습과 학원 수강으로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나마 오빠가 틈틈이 전화를 걸어 동생을 챙겨줬다. 

진희는 친구들과 여럿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친밀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에 오르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신을 심하게 괴롭혔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됐다. 진희가 괴롭힘을 당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진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쉽사리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학교 성적이 심하게 떨어졌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친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면서 반 친구들과 가졌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게 됐다. 

진희는 결국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당했다. SNS에 은유적인 표현으로 진희를 지칭하는 악성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 형태는 줄었지만 SNS에 올린 글을 통해 진희를 은근히 따돌렸다.

우울감과 무력감이 심해졌다.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도, 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가해 학생들의 괴롭히는 수준은 날로 심해져 갔다. 옆을 지나가다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옆자리 친구와 자리를 바꿔 앉아 쉬는 시간과 공부 시간 가릴 거 없이 장난을 쳤다. 같은 반 학생들 앞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욕들을 서슴없이 했다. 진희와 함께 죽기로 결심한 미영이도 이 가해 학생들에게 화장실과 음악실로 불려가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다. 자리에 없을 때는 교재와 슬리퍼를 숨겨 놓거나 가위로 책을 자르는 등 학교생활을 지치게 만들었다.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할머니가 학교로 찾아와 항의도 했다. 그러면 잠시 동안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새 담임선생님이 오면서부터 가해 학생들은 더 은밀하게 진희와 미영이를 괴롭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사이버 폭력

가해 학생들의 괴롭힘이 심해질수록 진희는 떠나가 있는 엄마의 품이 그리웠다. 서울에 올라간 부모님에게 보고 싶다며 울었다. 지금 힘드니까 내려오면 안 되느냐고 졸랐다. 하지만 부모님은 다음 날 내려오지 않았다. 다 큰 애가 어리광을 부린다며 오히려 야단을 쳤다. 저녁 늦게 들어와 책상 앞에서 힘들어하는 오빠에게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오빠 역시 지쳐 보였다.

사망 이틀 전 진희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자해를 시도했다. 연필을 깎기 위해 가지고 있던 커터칼로 몇 번 주저하다가 손목을 그었다. 진희는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미영이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미영이는 진희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둘은 함께 죽기로 마음먹었다. 서로를 위로하며 짧은 글을 각자의 블로그에 남기기로 했다.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학생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죽기로 마음먹고 나니까 오히려 편안해졌다. 더 이상 감옥 같은 공간에서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존재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카오톡, 모바일 메신저 등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학교 폭력도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가시적인 폭력의 양은 줄어든 반면 은밀하게 이뤄지는 따돌림이 늘어났다. 언어폭력 또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를테면 특정 친구를 제외한 채 카톡방을 만들어 놓고 그 친구를 초대한 후 말을 걸지 않는 방식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괴롭히는 것이다. 또는 페이스북에 은밀한 신상 정보나 민감한 사진을 올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형태로 따돌림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는 듯했다.

진희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접촉 없이 사이버 공간에서 관계를 단절·고립시키는 방식은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 만큼 파급적이고 직접적이다. 실제 자살을 떠올리거나 자해를 시도할 정도의 심리적 고통을 동반해 학교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반복적인 폭력으로 불안에 떨거나, 가해 학생에게 복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정서적으로 지지해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면 그 여파는 더욱 심각해진다. 신체적인 폭력은 학교라는 장소로 한정되지만 사이버 폭력은 24시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해자를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쉬쉬하는 선생님, 믿을 수 없어요”

진희를 옆에서 지켜봐온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가해 학생의 행동에 무관심한 듯 보였다. 진희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는 그녀의 거칠고 가파른 호흡,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조그만 교실에서 진희가 눈물을 지으며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떠들고 웃으며 장난을 쳤다. 왜소한 체격에 항상 혼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왜 가만히 있었니?’ 그 친구들은 필자의 물음에 대답하기까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모두가 그랬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좀 더 구체적인 답변들도 나온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니에요. 친하게 지내는 ‘절친’도 아니고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어요. 설령 내가 도움을 주려고 해도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예요. 가해 학생들과 나쁘게 지내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한테 무슨 보복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선생님께 말해도 몇 번 주의를 줄 뿐이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거든요. 괜히 보복만 당하죠. 선생님은 폭력이라는 말조차도 꺼내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는 외부로 알려질까 봐 그냥 쉬쉬하는 건지도 몰라요. 그래서 선생님도 믿을 수 없어요.”

“진희가 당하지 않으면 내가 당할 수 있어요. 가해 학생들은 괴롭힐 만한 아이들을 항상 찾아다니니까요. 힘이 약해 보이거나 만만해 보이는 아이들을 물색해 뒀다가 접근해 잘해주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180도 태도를 바꾸죠. 괴롭히면서 자기들끼리는 ‘끽끽’ 거리며 좋아해요. 진희가 오랫동안 괴롭힘의 대상이 돼줘야 우리가 그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

방관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가해의 동조 방식이다. 가해자는 주변 학생들의 무관심과 방관적 태도를 보고 자신들의 폭력을 암묵적으로 묵인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잘못된 짓이 아닌 모두가 받아들이는 극히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가해 학생의 심리 중심에는 자신이 놓여 있다. 피해 학생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그만큼 떨어진다.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면서 점점 더 몰입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해결 방식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쉬쉬하며 대충 무마하는 선생님의 안일한 대처는 오히려 가해 학생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된다. 선생님의 일시적·한시적 처벌은 그들의 잘못을 탕감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괴롭힘은 또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다. 가장 심리적 고통을 강하게 가져다주는 것은 ‘사이버 불링’(cyber bulling)이다. 사이버상에서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집요하게 괴롭히는 이러한 행위는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람이 홀로 있을 때보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덜 제공하는 현상을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고 한다.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긴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요인을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가해 행동을 방관했던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친구나 교사, 부모에게 이야기해 도움을 구해야 한다. 교사는 그러한 사실을 덮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를 해야만 한다.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방관적인 태도가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가르쳐줘야 한다. 또 교사들이 도움 행동에 대한 역할 모델을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 학교폭력은 모두가 그 심각성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 해결하려고 할 때만 예방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