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금 쫓아 세계 누비는 ‘노마드’ 골퍼들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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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프로골퍼들 해외진출 러시 안병훈·왕정훈 유럽 투어에서 맹활약

 


 

"이제 21세기형 ‘노마드’라 불러다오.​"

진짜 유목민(遊牧民)이 아닌 남자 프로골퍼 얘기다. 노마드는 유목민의 라틴어. 이전의 유목민은 중앙아시아·몽골·사하라 등 건조·사막 지대에서 목축을 생업으로 삼아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나 현대판은 다르다. 신세대 노마드는 휴대전화·노트북·드론 등과 같은 첨단 디지털 장비를 갖고 자유롭게 유랑하지 않을까 싶다.

 

노마드는 장소의 이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쓸모없는 불모지를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바꿔가는 ‘신기루’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서 탈피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며 창조적인 행위를 지향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 프로골퍼들은 첨단기기와 함께 골프백을 짊어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골프선수가 왜 유랑 생활에 뛰어드는 걸까. 얼마 전에 골프장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남자 캐디는 이렇게 말했다. “골프 포기했어요. 국내에서는 대회에 출전해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았으니까요. 대회가 겨우 15개도 안 되는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겠어요.”

 

맞는 말이다. 국내 골프대회는 기형적이다. 여자대회는 33개에 상금 215억원. 그러나 남자대회는 겨우 12개에 상금 80억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에 소속된 프로는 6000명이 넘는다. 여자는 2000여 명이다. 정규 투어에 출전해 상금을 타는 선수는 많아야 200여 명 안쪽이다.

 

경쟁력 있고 상금 많은 일본으로 진출

여자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남녀 대회 출전선수는 비슷하지만 상금이 짭짤하기 때문이다. 많은 상금을 얼마 안 되는 선수들이 나눠 먹으니까 실속이 있는 셈이다. 한 해에 상금 10억원을 넘기는 선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선수들은 상위 랭커 몇 명에게만 상금이 몰린다. ‘부익부 빈익빈’이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래서 도망을 간다.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생존을 위한 유랑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떠나는 선수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기량이 탁월해 국내를 평정하고 미국이나 일본 무대로 옮겨가는 선수들이 있다. 대표적인 선수가 최경주(45·SK텔레콤)와 김경태(30·신한금융그룹)다. 최경주는 국내에서 굵직한 대회에서 승수를 올리더니 눈을 미국으로 돌려 성공한 케이스다. 

 

국가대표 출신의 김경태도 마찬가지다. 국내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 일본행을 택했다. 지난해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5승을 챙기며 상금왕에 오른 김경태는 올 시즌에 벌써 3승을 거뒀다. 송영한(25·신한금융그룹)과 조병민(27·선우팜)도 각각 1승씩을 따내며 든든히 뒤를 받쳤다. 

 

이 밖에도 처음부터 외국 진출을 겨냥한 프로들이 적지 않다. 초창기 일본으로 일찌감치 건너간 국가대표 출신의 동갑내기 허석호(43)나 장익제는 아예 일본에 눌러앉아 국내 대회에는 잘 참가하지 않았다. 시즌을 시작하면 매주 경기가 열리는 JGTO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들에겐 일본처럼 좋은 무대가 없다. 경기력도 뒤지지 않는 데다 상금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빵’ 먹은 신세대 프로골퍼들

일본과 미국을 택한 선수는 그나만 형편이 나은 선수들이다. 유목민 이상으로 ‘유랑’을 마다 않는 선수가 있다. 안병훈(25·CJ오쇼핑)과 왕정훈(21·캘러웨이)이다. 여기에 이수민(23·CJ오쇼핑)이 가세했다. 미리 들어간 정연진(26)도 있다. 유럽 투어로 가기 위해 안병훈과 왕정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을 걸었다. 뼈를 깎는 고된 생활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마치 고행에 나선 ‘수도승’ 같은 선수들이다. 이들은 ‘눈물 젖은 빵’을 제대로 먹은 신세대 프로골퍼로 보면 된다. 

 

이 때문에 둘은 골프 궤적이 비슷하다. 주니어 시절에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프로 데뷔 후 가시밭길이었다. 그리고 둘 다 지기 싫어하는 근성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 상비군이나 대표를 지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강점은 둘 다 키가 183cm가 넘고, 320야드 이상 시원하게 장타를 날린다는 점이다. 

 

먼저 안병훈을 보자. 그는 탁구 스타 국제 커플인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아들이다. 세종초교 때 유소연(25·하나금융그룹)과 함께 방과 후 스포츠 활동으로 골프에 입문했다. 유소연의 1년 후배다. 중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날아갔다. 17세 때인 2009년 최연소로 US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2011년 프로에 진출했으나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Q스쿨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유럽이었다. 유럽 투어도 장벽이 높다.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2부 챌린지 투어를 뛰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장거리 이동과 숙소를 잡는 것이 난제였다. 3년 동안 챌린지 투어에서 기량을 차근차근 다져나갔다.

 

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오만·케냐 등 불모지를 돌아다녔다. 이것이 내공이 될 줄이야. 지난해 유럽 정규 투어에 입성해 남아공·두바이·카타르·모로코·중국·스페인·영국 등 7개국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렀다. 그러다가 덜컥 우승한 것이 유럽 메이저대회 BMW PGA챔피언십이다. 이 한 방으로 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안병훈이 떠돌이 이방인이었다면 왕정훈은 한국과 필리핀, 그리고 중국을 오간 뒤 유럽에 합류한 케이스다. 왕정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필리핀으로 날아갔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학제(學制)가 맞지 않아 다시 필리핀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필리핀 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하자 국가대표를 꺾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나야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이때 중국에서 3부 투어가 생겼다. 나이 제한이 없었다. 그의 나이 만 16세. 2012년 프로로 전향했다. 실력에 걸맞게 상금왕이 됐다.

 

그러면서 아시안 투어로 눈을 돌렸고 2013년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시드를 잃었다. 재기를 노리던 그는 2014년 상금랭킹 21위, 지난해는 상금랭킹 9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보다 큰물에서 놀자’고 결심하고 유럽 투어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일을 냈다. 아시아인 최초로 유럽 투어에서 2주 연속 우승하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그것도 최연소 기록이다.  

 

둘과 달리 이수민은 국내에서 탄탄하게 기량을 쌓은 뒤 안병훈·왕정훈과 함께 올 시즌 유럽 투어에서 활약하는데 벌써 1승을 챙겼다. 이들은 유럽 투어가 PGA 투어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임을 잘 안다. 안병훈은 벌써 기분 좋게 올 시즌 PGA 투어 잔여경기 출전권을 획득했다. 한국 남자프로계가 활성화되지 않는 한 보다 많은 ‘노마드’ 선수들이 등장할 것은 불 보듯 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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