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관계 복원하라” 北의 新외교 라인
  • 이승욱 기자·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9 17:44
  • 호수 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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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주 사망 후 ‘리수용-리용호’로 새 진용 갖춰

 

 

리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왼쪽)이 6월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하고 있다.

 

북핵 문제를 두고 균열이 생겼던 북·중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리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5월31일 중국을 방문했다. 2박3일 일정으로 방중한 리수용 부위원장은 방중기간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하고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친서를 구두로 전달했다. 리수용 일행의 방중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평가는 다소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난 1월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연이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 그리고 중국의 국제사회 제재 동참 등으로 꽉 막힌 북·중 관계를 풀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데는 평가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리수용 방중’ 꽉 막힌 북·중 관계 풀까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의 역대 정권은 중국과 ‘영원한 혈맹’ 관계를 유지해왔다. 마치 콘크리트처럼 북·중 관계는 견고한 듯 보였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이후 북·중 관계의 면모는 달랐다. 김정은은 핵실험을 전후로 마치 자신은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듯 중국에 대한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은 과거 핵실험을 할 때는 중국에 사전 통보해왔다. 하지만 김정은은 선대의 관례를 깨고 4차 핵실험을 중국에 사전 통보하지 않았다. 지난 2월 광명성 4호 발사는 중국의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방북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한반도 문제에 직접적 당사자이자, 북한의 혈맹인 중국의 외교 위상에 치명적인 흠을 내는 태도였다. 결국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일정 부분 동참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깊어지는 형국이었다. 

 

북·중 관계 악화 이후 전격적으로 이뤄진 ‘리수용-시진핑 면담’은 북·중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이다. 북한으로선 기존 우방까지 대북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혈맹인 중국을 활용해 고립 상황을 풀어야 했다. 중국도 6월6일부터 사흘간 베이징(北京)에서 미·중 간 전략·경제대화에 대북 문제와 관련한 진전된 입장을 들고 나가야 하는 만큼 북한과의 대화가 필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대북 전문가 그룹 일각에서는 리수용-시진핑 면담 이후에도 북·중 관계가 4차 핵실험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도 제기하고 있다. 리수용-시진핑 면담에 대한 북·중의 보도 내용을 보면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화통신은 리수용 부위원장이 시진핑 면담 과정에서 언급한 ‘경제-핵건설 병진노선의 항구적 추진’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북한의 중앙통신은 시진핑 주석이 강조한 한반도 비핵화 등에 대한 발언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정은 의부’ 리수용, 활동 보폭 넓혀 

하지만 이번 북·중 관계의 복원 시도는 제7차 노동당대회 이후 북한 외교 라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정은의 측근으로 다소 개방적인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리수용 부위원장이 다시 외교 전면에 나선 것이다. 당초 강석주 당 국제담당 비서의 사망 이후 북한 외교 라인의 일대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바 있었다. 이에 따라 리수용의 중국 방문은 북한의 외교 라인 변화와 맞물려 해석된다. 

 

리수용 부위원장은 과거 김정일 위원장의 실무비서를 오랜 기간 담당했던 인물로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에 현지에서 생활을 돌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리철’이라는 가명으로 스위스대사직을 수행했던 인물이며, 김정일의 비밀계좌 관리인으로 추측됐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당시 리철(리수용)을 만났던 인물의 설명(필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정은 형제는 당시에 리철 대사가 키우는 의붓아들로 알려졌다. 이는 김정일의 자제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추측되고 있다. 요컨대 김정은 시대에 리수용은 실제 의부(義父)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본국에서 중앙당 활동을 한 시점은 김정은이 등장한 때와 같다. 2010년 9월 당 제3차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공식 등장할 때 리수용도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2014년 4월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외무상에 오르면서 외교무대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수용의 뒤를 이어 외무상에 오른 리용호 외무상(1956년생·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은 연배로 봐서는 리수용 다음 세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리용호 외무상 역시 2010년 9월에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중앙당 무대에 오른 인물이다. 이후 외무성 부상으로 리수용을 보좌했던 인물인데, 알려지기로는 리수용이 20여 년간 김정일 위원장의 실무비서(서기실)를 하던 시기의 동료인 리명재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리용호가 등용된 데는 리명재와 리수용의 인연이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리수용과 리용호 두 사람 모두 북·미 관계와 핵문제를 담당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김정은 시대의 외교 주안점은 두 가지 쟁점에 집중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강석주와 김계관 등 기존 고위 외교 관료들이 해왔던 행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적어도 5월초에 개최된 7차 당대회 이전까지 김정은을 수행한 실적이 지난해 7월 리수용이 대사회의(우리의 외교 공관장 회의)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보도와 9월 쿠바 대표단 환영 공연에 참석했다는 사실 등 두 건이 전부였다. 물론 올해 4월21일 리수용 당시 외무상이 ‘유엔 SDG(지속가능 개발목표)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과 같이 외교적 활동에 대한 기사는 노동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이외 북한의 매체에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후 국가장의위원 명단에 등재돼 있다는 것이 유일하다. 호명 순위는 232명 중에 리수용 152위, 리용호는 181위로 호명됐고 이때 강석주는 11위, 김계관은 163위로 호명된 바 있다. 리수용(1940년생)은 강석주(1939년생)와 한 살 차이인 비슷한 시대 인물이지만 김정일 시대 당시 둘의 위상 차이는 현격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석주는 김정은 시대에도 상당히 많은 수행 빈도를 보인 바 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24회, 26회, 12회, 4회의 빈도를 보였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점차 그 빈도가 감소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2012년과 13년에는 수행 빈도에서 18위와 21위를 기록하면서 김정은의 최측근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김계관은 0회, 5회, 0회, 2회의 빈도를 보였는데 주로 외교사절단을 접견하는 자리가 대부분이었다. 김계관에 비해 강석주의 수행 형태는 다양했다. 대체로 외교사절 접견이 적지 않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공연 등의 문화행사에 함께 참석했다. 

 

‘선배’ 김계관 제치고 중책 맡은 리용호 

이 점은 사망한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역시 유사했다. 즉 김양건, 강석주 두 인물은 담당분야에 대한 행정가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김정은이 함께 자리하기를 좋아했던 인물들로서 다양한 수행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면 리수용은 7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비해 오히려 감추어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적인 외교활동 이외에는 보도된 바가 거의 없다. 이들이 앞으로 어떠한 외교정책의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으나, 어쨌든 과거 김정일 위원장이 친자식의 해외 유학생활을 맡길 만큼 신뢰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리고 김정은의 청소년기 유학생활을 돌보았던 인물이라는 점은 향후 상당기간 김정은의 심복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리수용이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의 아들인 리용호 외무상은 북한 외교 라인의 실세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평양외국어대학 13년 선배인 김계관(43년생) 제1부상(副相)을 제치고 외무상이 됐다. 2011년 국가장의위원회 호명 순위에서도 김계관보다 뒤에 있었고 2010년에는 김계관이 외무성 제1부상이 되면서 뒤를 이어 부상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먼저 외무상이 됐고 강석주 국가장의위원회에서는 53명 중 21번째로 호명돼 51번째로 호명된 김계관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만큼 리수용의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경력을 보면 30대 후반이었던 1994년에 북·미 핵회담에 참여한 바 있고 이후 1995년부터 진행된 경수로 공급협상에도 참여했다. 2000년에는 미국 클린턴 정부와의 고위급회담 때 북한 대표단원으로 참여했고 2010년대에도 핵문제와 관련된 남북대화 및 러시아 등과의 대화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따라서 리용호의 발탁은 리수용이라는 인적 배경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김정은 정권이 핵문제를 풀어가는 외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2015년 1월 싱가포르에서 리용호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왼쪽)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에 엘리트들의 변화는 상당 정도 이뤄지고 있다. 여전히 고위급 주석단(호명 순위 25위 이내)의 변화는 5% 이내로 미미하지만, 수행원들을 비롯한 실무급의 교체는 60%가량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제 강석주의 사망으로 외교의 실세에도 변화가 일고 있고, ‘리수용-리용호 라인’의 등장은 외교 인력과 정책 방향의 대폭적인 변화를 예상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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