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신 총을 든 학도병들이 말하는 ‘6·25 전쟁’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6.23 14:42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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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에서 소외된 영웅들의 이야기

 

6·25 전쟁에 참여했던 인천학도병들이 1955년 자유공원 충혼탑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6·25 한국전쟁 도중 경북 포항지구 격전지를 찾은 한 여군 정훈요원이 학생 전사자의 품에서 피에 젖은 수첩을 발견했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불렀던 이는 전투 중 전사해 끝내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6·25 전쟁 당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장에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도 있다. 바로 ‘학도병’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대부분 나이가 14~17세에 불과했다. 징집연령(18세)에 미달해 ‘학도의용군’이라고 불렀다.

 

학도병들은 3년을 현역처럼 복무하고도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한국전쟁사에서 소외돼왔다. 정부는 학도병을 국가유공자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고집했다. 규모부터 전사자 집계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적어도 2만 명이 참전해 2464명이 전사했다고 ‘6·25참전 소년병전우회’가 조사해 놓았을 뿐이다. 18세 미만 징집을 금하는 국제법을 의식한 탓이었다. 학도병들은 2002년에야 ‘소년지원병’이라는 이름과 함께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들은 당시 어떤 마음으로 책 대신 총을 잡았을까? 

 

 

영문도 모른 채 전쟁의 늪에 빠진 중학생

 

“1950년 5월에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갔는데 한 달쯤 지날 무렵 전쟁이 일어났어. 친구 동생이 ‘형, 전쟁 터졌대’라고 말해줘서 알았지. 어떡해야 하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인민군이 들어왔어. 일주일 만에 인천도 완전히 장악된 거지.”

 

이경종씨(82·인천상업중학교 재학 중 참전)는 축구를 잘하는 중학생이었다. 그는 큰누님이 시집가서 살고 있는 인천 앞바다의 용유도로 피난을 갔다. 어느 날 밤, 함포 소리가 한적한 섬마을의 정적을 깨뜨렸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이후 인천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인천 집에 돌아왔다. 인천은 사실상 텅 빈 유령마을 같았다. 옆집 기와지붕이 함포에 맞아서 뻥 뚫린 모습만이 전쟁의 참화를 보여줄 뿐이었다.

 

“집에 돌아오니까 학교 나오라는 소리가 없더라고. 그때 형이 학도의용대에 나갔어. 남아 있는 학생들끼리 학도의용대를 만들었다고 하길래 나도 가입했지.”

 

그는 10월 즈음 인천학도의용대에 가입했다. 1949년 학교마다 설치됐던 학도호국단이 학도의용대로 바뀌면서 자연스레 참여하게 됐다. 아침마다 조회를 하고 순찰을 돌며 지내던 도중 갑자기 ‘인천 축현초등학교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북한군한테 잡힐 수 있으니까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지시였다. 눈발이 흩날리던 12월18일의 일이었다. “아직 어리니까 남아 있으라”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결지로 향했다.

 

이날 저녁부터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한 행군이 시작됐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건너다 쓰러지는 사람도 생겼다. 눈발도 매섭게 몰아쳤다. 밀양에서 통영으로, 부산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학도병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방위군 수용소에 입소했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주먹밥과 구운 꽁치 한 마리를 먹을 수 있었다. 훈련소에 들어갔지만 정식 군번을 받을 순 없었다. 나이가 너무 어린 탓이었다. 심부름이나 잡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하사관교육대가 생기면서 군번을 부여받았다.

 

“강원도로 가는 길에 화약 냄새가 많이 났어. 포탄 터지는 소리도 들리니까 온몸이 긴장되더라고.”

 

1951년 4월 무렵 수도사단에 배치받았다. 최고 접전지역인 강원도로 배치된 셈이다. 함께 교육받은 동기들과 덤프트럭 2대에 나눠 타고 전쟁터로 향했다. 어느 날 전투지역에 박격포 포탄을 가져다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무에 동아줄로 묶인 포탄을 이고 산비탈을 올랐다. 전투가 치열했던 탓에 큰 나무가 쓰러져 있고 땅은 움푹 파인 곳이 많았다. 치열하기로 유명했던 향로봉 전투였다. 포탄을 보급해주니까 전사자의 시체를 후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두 사람이 시신을 들고 내려오다가 언덕에서 구르기도 했다.

 

휴전이 임박할수록 교전은 더욱 치열했다. 며칠간 대치 상태를 이어가며 포탄을 쏘고 있었다. 며칠간 이어지던 야포 소리가 멈췄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입대 3년11개월 만인 1954년 12월 제대명령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스무 살이었다. 그는 육십 고개를 훌쩍 넘은 1996년 6·25 참전용사 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1950년 인천학도의용대의 남하 경로


 

 

가을 들국화만 보면 떠오르는 얼굴

 

“학도의용대가 남하하려고 할 때 중학교 3학년 이하 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했지. 그때 서너 명은 집으로 돌아갔어. 근데 동산중학교 3학년 최병욱은 끝까지 따라왔지. 그러고 다음 해 여름에 인제 전투에서 전사했어. 그때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학도의용대에서 연락책 역할을 하던 김용욱씨(83·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 중 참전)는 한 전사자를 먼저 떠올렸다. 그는 훈련소에서 사격훈련을 받은 뒤 2월 곧바로 전방으로 출정했다. 제천을 거치고 치악산을 지나 태기산, 인제, 원통에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1951년 여름, 김씨는 가칠봉(1242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남과 북이 불과 3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포탄을 쏟아부었다.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곡사포 포신이 과열돼 제 거리까지 날아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포병들은 물통으로 물을 길어다 부으며 사격을 해야만 했다. 하루에도 100~2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해 일주일에 수백 명씩 보충병이 투입되는 처절한 전투였다. 병사들이 흘린 피가 너무 많아 검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피의 능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처절한 전투 끝에 김씨가 소속된 5사단은 거진·화진포·마차진리를 거쳐 송현리(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렀다. 현재 통일전망대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351고지가 있었다. 아침에 국군이 공격해 적진지를 점령하면 저녁에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돼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부었는지 풀 한 포기, 작은 나무 하나 없이 민둥산이 된 곳이었다.

 

“고지 근처에 마을이 있었어. 가을에 노랗게 핀 들국화 잎에 하얀 이슬이 살짝 내려 아침 햇살을 맞으며 피어 있는 모습에 젖어 있었지. 그때 두 병사가 전사자 시신을 어깨에 메고 들국화를 밟고 지나가더라고. 지금도 가을만 되면 그때 들국화를 스쳐간 전사자의 모습이 떠올라.”



14세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학도병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경찰대’에 입대해 후방의 안전 요원으로 근무하다 전투에 나갔고, 또 포로가 됐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했던 양종택옹(80·경주중학교 재학 중 14세에 참전)은 전쟁의 참담함을 말하며 참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학도경찰(학도의용대와 같은 역할)로 지내던 도중 누군가 소리쳐 깨웠다. 눈을 떠 보니 GMC트럭 2대가 세워져 있었다. 트럭에서 내린 중·상사급 군인이 5~6명, 권총을 차고 있던 이들은 이유 불문하고 학도경찰들을 3열종대로 정렬시켰다. 그리고는 앞줄부터 키 큰 사람 절반을 끊어 트럭에 태우고는 곧장 떠났다. 키가 큰 축에 속했던 그도 영문을 모른 채 트럭에 올랐다고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경북 경주시 안강 장터 광장. 학도병들은 이곳에서 2주간 훈련을 받았다. 바로 인근에 인민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그들은 총을 쏘는 요령만 배웠다고 했다.

 

“우리는 포항의 기계 쪽으로 가는 안강 북쪽 편에 참호를 파고 잠복에 들어갔어. 바로 맞은편에서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대놓고 쏘아댔지.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밤이 깊을수록 더 심하게 쏟아졌고 인민군 따발총알도 소나기처럼 퍼부었어. 누가 죽었나 의식할 겨를도 없이 적군을 향해 계속 총만 쏘아댈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이 오갔던 거야.” 

 

그들은 결국 북한군에게 포위당했고, 전부 포로로 잡히게 됐다. 이후 지옥 같은 포로생활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한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고 했다. 총을 겨눈 채 북한군들은 마을에 가서 쌀 한 가마니씩을 짊어지고 오라고 시켰다. 몇 발자국 못 가서 쉬기를 반복하면 그들은 채찍질을 하고, 총 개머리판으로 어깨와 엉덩이를 때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어김없이 밥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민군과 중공군이 전부 다 산에서 내려오는 거야.”

 

다음 날 먼동이 틀 무렵 일어나 보니 산속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도망칠 수 있었다.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포로병들에게 손을 들라고 명령을 내렸고 미군이 잠복하고 있는 방공호로 데려갔다.

 

“미군 병사는 적군이니까 쏘아 없애라는 지시를 내리는 듯하더라고. 군인 한 명이 내 가슴에 총을 겨눴는데 유엔군 장교 한 명이 나타났어. 그래서 나는 중학교 때 익혀둔 영어로 ‘I’m Korean soldier, I go to Gyung-ju’라고 외쳤지. 결국 그 단어 몇 개가 내 목숨을 살려준 거지.”

 

이후 그는 유엔군 작전참모본부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포로로 잡혀 있다가 탈출했음이 밝혀졌다. 그는 몇 달간 방위군으로 복무했고, 얼마 후 전쟁이 잦아들면서 귀가 조치를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복학을 했다. 학교를 마친 그는 교육 공무원으로 평생을 보냈다. 



제자를 구하러 사지로 뛰어든 선생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동네 친구들하고 땅굴을 파고 지냈어. 인민의용군에 잡혀가기 싫었거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나올 수 있었지. 주민들 전부 송현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선생님이 계셨어. 선생님은 우리한테 자치 단체를 구성해 서로 보호하라고 했었지.”(학도병 출신 류문길씨의 증언)

 

심선택 중위는 인천상업중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 갔다가 바로 모교로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그는 계속되는 좌우 대립과 남북 대치를 보고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6·25 전쟁이 벌어지기 5개월 전이었다.

 

심 중위는 해병대로 입대해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로 이동해 교육을 받다가 바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서울·평양·인천 출신 학도병들이 1951년 7월23일 강원도의 한 지역에서 찍은 사진(왼쪽)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심선택 중위의 묘역

 

“선생님을 다시 만난 건 그때였어. 인천 수복에 성공한 뒤에 북한군 잔당들을 수색하면서 주민들을 송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하더라고. 그때 선생님이 제자 30여 명을 따로 집합시켜놓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서 서로 보호하라고 했어.”

 

학생들은 학도의용군을 꾸려 순찰 업무를 맡았다. 해병대 사령부에 명단도 제출했고, 야간 통행금지 때 사용할 암호도 매일 받았다. 그러던 중 국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심 중위가 속한 대대도 북쪽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때 제자들은 “선생님 뒤를 따르겠다”며 서울 수복 전선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심 중위가 속한 해병부대는 서울 탈환에 성공한 뒤 북진을 계속했다. 승전을 거듭하며 함경북도까지 올라갔다. 그러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됐다. 진지를 정리하고 다음 날 철수 준비를 하던 도중 심 중위가 갑자기 먼저 이동한다고 했다. 

 

“점점 포위되는 와중에 후퇴 전날 갑자기 먼저 이동한다고 하면서 지프를 한 대 끌고 나갔대. 그리고 후퇴 지점에 와서 보니까 선생님이 전사했다는 거야. 나중에 들으니까 인천에서 데려온 제자 한 명이 북한군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적진에 뛰어들었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선생님 나이가 25살쯤 됐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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