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대통령이 사우디에 섬을 넘긴 까닭은?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6.2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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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왼쪽)과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오른쪽)

 

6월21일 이집트 전 국민의 관심을 끌 흥미로운 판결이 하나 나왔다. 이집트 행정법원은 이집트 정부가 홍해에 있는 2개의 섬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양도한 협약이 무효라고 판결 내렸다. 법원은 두개의 섬 모두 이집트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는데 홍해에 있는 티란과 사나피르 섬의 사우디 양도를 주도한 이는 다름 아닌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이다. 그가 이번 판결로 정치적 타결을 입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집트 정부는 4월7일 살만 사우디 국왕의 이집트 공식 방문에 맞춰서 홍해의 전략적 요충지로 꼽히는 티란과 사나피르 섬에 대한 관할권을 사우디에 양도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집트의 발표가 나자 사우디는 즉각 이 섬들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그러자 이집트의 야권과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격하게 일어났다.

티란과 사나피르는 홍해와 아카바만(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둘러싸인 좁고 긴 해만)을 잇는 티란 해협에 위치한다. 이 두 개의 섬은 1940년대만 해도 사우디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제 1차 중동전쟁(1948년)이 일어나면서 군사상의 이유로 1949년 이집트군에 대여를 해줬다. 그 후 제 2차 중동전쟁(1956년), 3차 중동전쟁(1967년) 때는 이스라엘군에 점령됐지만 1982년 시나이반도와 함께 반환된 이후 줄곧 이집트의 지배 아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집트는 이 두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사우디와 영토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분쟁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티란과 사나피르, 두 섬에는 현재 민간인 상륙이 금지돼 있으며 거주하는 주민은 없고 군인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홍해가 휴양지로 주목받으면서 최근에는 주변을 다이빙 장소로 개방했다.
티란과 사나피르 섬


현재 사우디는 이 섬을 통해 이집트와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려고 한다. 어떤 경로로 다리가 놓일지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과거에 제시된 정보 등을 종합하면 두 나라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구간은 티란 섬을 경유하는 형태다. 두 나라는 육상으로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기에 다리가 건설되면 두 나라 간 육로 이동이 훨씬 쉬워질 게 된다. 

마치 이집트의 양도에 화답하듯 이집트를 방문한 살만 국왕은 16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투자도 받은 데다가 사우디가 다리를 건설할 경우 현재 IS의 테러 등으로 치안이 악화돼 관광객이 줄고 있는 시나이 반도를 살리는데도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특히 티란과 사나피르가 있는 티란 해협은 전략적 요충지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에는 홍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로이며 그래서 1967년 아랍연맹과 이스라엘 사이에 6일 전쟁이 일어나자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은 티란 해협을 봉쇄해 이스라엘 경제에 타격을 주려고 한 적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영토 분쟁 문제를 두고 쉽게 물러나지 않는 법이다. 망망대해에 일부러 인공섬을 만드는 나라도 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는 더욱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런데 섬을 그냥 양도한다? 엘시시 대통령의 결정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집트 정부가 전략적 요충지 두 곳을 내놓은 이유는 뭘까?

2013년 7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이집트의 첫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엘시시가 중심이 된 군부는 집권 1년 만에 그를 쿠데타로 축출했다. 무르시 정부가 무슬림형제단과 함께 이슬람주의를 강화하자 세속주의자들은 저항했고 여기에 군부가 손을 잡으며 벌어진 일이었다. 무르시가 축출 뒤 친(親)무르시 측의 집회가 잇달아 벌어졌다. 특히 2013년 8월14일은 이집트에게 최악의 날이었다. 이날의 집회를 군부가 강경하게 진압했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최대 수백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날 오전 군부는 무르시 지지자들이 한 달째 농성을 벌여온 카이로의 나스르시티 라바 광장과 기자지구 나흐다 광장에 장갑차와 불도저 등을 동원해 강제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총성이 들렸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AFP통신은 최소 124명이 숨졌다고 전했고, 무슬림형제단은 최소 3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하자 국제사회가 군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과 유럽의 비난은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아랍권도 이집트 군부를 규탄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유엔과 아랍연맹이 나서서 이집트 참사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예 이란은 군부가 벌인 시위대 강제 해산을 두고 ‘학살’이라고 표현했다. 

고립된 이집트 군부에 손을 내밀어준 건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은 오히려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 강경한 대응을 취한 이집트 군부를 지지한다"며 사우디의 의료팀을 파견하고 전투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 정부를 비난하고 예정돼 있던 이집트군과의 합동 군사훈련을 취소했다. 이집트 문제를 두고 미국과 사우디는 정반대로 갈린 셈이다.

사우디는 왜 이래야 했을까. 사우디가 이집트 군부를 신속하게 지지한 것은 아랍의 봄 이후 사우디 왕실이 이슬람 정치 세력의 복귀에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사우디는 무슬림 형제단 등 종교 운동이 정치에 끼칠 위협을 막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사우디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금지 단체다.

사우디와 이집트는 원래 동맹 관계라기보다 라이벌 관계다. 아랍의 리더 자리를 다투어 온 사이다. 그런데 2010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아랍의 봄이 시작되고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붕괴됐다. 걸프 국가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지도 모르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부흥을 지켜봐야 했다. 사우디에서 보수파를 중심으로 아랍 세계의 안정을 강조하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된 것도 이때였다. 게다가 이란의 힘이 커지면서 사우디는 아랍의 봄 이후 자신들의 뜻과 부합한 정치 세력을 지원하는데 거액을 투자 형태로 쏟고 있다. 이집트는 군사적·외교적으로 사우디와 공동 보조를 취하는 핵심적인 존재가 됐다. 양국의 친밀한 관계가 이번 해상 국경의 획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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