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어바웃 아프리카] 아프리카 국경선은 왜 직선일까
  • 이형은 팟캐스트 ‘올어바웃아프리카’ 진행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3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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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의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아프리카의 국경과 국가

“우리는 백인이 한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지역의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산, 강 그리고 호수들을 정확히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모르는 어려움에도 가까스로 그것들을 배분했다.” 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이름을 떨친 영국 총리 솔즈베리 경(1830-1903)의 말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를 들여다보면 리비아, 알제리, 말리, 수단, 나미비아 등, 국경선이 자를 대고 그은 듯 직선인 곳이 꽤 많다. 국경은 보통 하천이나 산맥과 같은 자연조건에 따라 경계가 구분이 되고 전쟁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 등이 반영되어 형성된다. 국경선이 직선으로 그어진 것을 보면 그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해도 그 형성이 꽤 인위적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로 아프리카의 국경은 지도 위에 자를 대고 반듯이 그은 듯 형성이 된 것일까?



베를린 회의와 아프리카 쟁탈전

‘아프리카 쟁탈전(Scramble for Africa)’, ‘아프리카 분할(Partition of Africa)’은 188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 사이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식민화했던 과정을 말하는 용어이다. 더 정확히는 베를린 회의를 기점으로 ‘아프리카 쟁탈전’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생산되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유럽은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와 지속적 발전을 위해 값싼 원료 공급지와 판매 시장의 개척이 필요했다. 또한 개인의 자유보다 민족이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시기였다. 새롭게 탄생한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헤게모니 확보와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권력 투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에게 민족적 우월함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유럽 외부의 영토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1880년대부터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내 식민지 개척에 대한 관심은 극대화 되었고, 유럽 열강 사이에 다툼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즈베리 경은 1880년 외교부를 떠날 당시만 해도 아무도 아프리카에 관심이 없었으나, 다시 돌아온 1885년에는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지를 얻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정된 아프리카 땅을 놓고 벌어지는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유럽 제국들 간 갈등이 고조되고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졌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서아프리카 회의’ 혹은 ‘콩고 회의’로도 불리우는 ‘베를린 회의’는 콩고 강 어귀에 대한 특별 지배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제안으로 개최되었다. 독일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의 주재로 1884년 11월15일부터 1885년 2월26일까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노르웨이, 터키, 그리고 미국 등 총 14개국이었다. 14개국 중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은 이 회의 주요국으로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이해 당사자였다. 이 회의는 아프리카인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유럽 열강간의 충돌을 줄이고 아프리카 식민화에 대한 규칙을 논하는 자리가 되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포르투갈의 콩고강 유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 주장이 거부되면서 벨기에 레오폴 2세(1835-1909)의 개인 식민지인 ‘콩고 자유국’이 탄생하게 됐다.

베를린 회의가 개최될 시기까지 아프리카의 80%는 그들 전통에 의해 자치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직 아프리카 해안 지역만 유럽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 회의로 유럽 제국열강들은 아프리카 내륙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해 다투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결정된 문화, 언어, 종교, 정치적 경계에 대한 고려 없이 기하학적 경계선에 대해 협상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지리학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통적 정치 분할에 대한 이해 없이 경계선을 그리려고 했으니 솔즈베리 경의 표현처럼 나름의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새로운 아프리카 대륙 지도가 탄생하자 수천개의 토착 문화와 지역이 뒤섞이게 됐고 오랫동안 문화와 역사를 공유했던 부족들이 나뉘게 되었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은 어울리기 어려운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부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유럽 열강들은 1914년까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50개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유럽 열강에 의해 만들어진 국경선과 그로 인해 탄생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면서 식민제국주의가 남긴 국경선 관련 논쟁이 벌어졌다. 국경선을 다시 정해야 한다며 범아프리카주의를 표방했던 ‘카사블랑카 그룹’과 그에 반대해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정해진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몬로비아 그룹’으로 갈렸다. 논쟁 끝에 아프리카 통일 기구(OUA)는 독립 당시의 국경선, 즉 식민제국주의가 남긴 국경선을 준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평화와 안정을 위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경선에 대한 불가침 원칙을 채택한 후 1964년부터 약 50년간 인위적 국경선은 분쟁 없이 평화와 안정을 그들에게 주었을까. 


'인위적 국경선'이 초래한 분쟁

인위적 경계선은 이웃 국가간 혹은 국가와 부족간에 다양한 분쟁을 끊임없이 유발시켰다. 몇 가지 예를 보자.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독일의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의 토고랜드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나뉘어 신탁통치를 받았다. 영국에 의해 지배를 받은 토고랜드의 서쪽은 가나에 합병이 되고 동쪽은 토고라는 독립국이 되었다. 토고랜드에 살던 에웨족은 이 국경선에 의해 약 70만명이 가나, 약 40만명이 토고 국민으로 나뉘게 되었다. 가나의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는 에웨족의 가나 합병을 거론하며 토고를 압박하기도 했다. 부족 문제가 국가간의 긴장감을 초래한 중요한 사건이다.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인 투아레그족은 니제르, 말리, 알제리, 리비아, 부르키나파소 등 5개의 국가에 분산되어 있다. 5개 국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며 그들의 영토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경선에 의해 약 80만 명이 니제르, 약 50만 명 정도가 말리, 약 3만 명이 알제리, 약 1만 명 정도가 리비아 그리고 약 15만 명이 부르키나파소에 분포되어 있다. 부족들의 국가 간 이동 생활 및 분리 독립의 움직임으로 여기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분리주의자와 중앙 정부와의 갈등은 정부군과 반군의 무력 충돌로 발전하곤 한다. 1982년부터 시작된 세네갈 카자망스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토착 세력과 세네갈 정부사이의 무력 충돌로 약 20여 년간 수만명이 사망했다. 카자망스 지역 주민들은 이미 1947년부터 ‘카자망스 민주항쟁운동’을 결성하여 분리 독립을 주장했다. 그들에게 타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국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문화적 역사적 공동체인 ‘부족’이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베를린 회의에서 탄생한 ‘콩고’에서는 다양한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1946년부터 1998년까지 약 24번의 분리 시도가 있었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가간 경계선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내부 갈등 및 분쟁을 키웠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정치적, 문화적 공동체의 특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국경선과 국가의 개념은 여전히 각자 고유 전통을 공유한 공동체에게 무의미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땅에 경계선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유럽은 솅겐 조약을 통해 오늘날 유럽 내 국경을 허문 지 오래다. 정치적, 경제적 장벽이 허물어지는 세계화 시대를 맞고 있는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에 남겨진 유럽 식민제국주의 유산인 인위적 국경선은 미래의 대륙, 아프리카에 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세계화로 가는데 또 한 번의 걸림돌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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