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공멸 부른 현재 권력과 ‘미래 후계자’ 갈등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30 21:04
  • 호수 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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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사표 낸 것으로 해달라고 해서”…昌 “해임 아니다”

 

1993년 12월17일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 신임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그러나 법률 규정대로 총리 권한을 행사하려 했던 ‘셀프(self)-실세(實勢) 총리’는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다 불과 127일 만에 하차했다.

 

 

 

김영삼(YS) 대통령의 이회창(昌) 총리 임명 의도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정국은 안정을 찾았다. YS는 청와대 출입 K 기자의 “대단하십니다”는 덕담에 “내 뭐라캤나”하며 의기양양했다. 의표를 찌른 昌 총리 기용을 대견해했다. 당시 시중에선 昌의 판사 시절 판결문까지 화제가 됐다. ‘소수의견’이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면서도 운운했다. ‘소수의견=대쪽’쯤으로 치부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기피인물’이었지만 1981년 46세 나이로 최연소 대법원 판사가 됐던 昌은 연임이 안 되자 86년 법원을 떠났었다. 88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법관으로 복귀해 선관위원장을 겸임한 昌은 노 대통령의 서한을 문제 삼고, 민주당 총재 YS를 서면 경고하는 등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 여권이 昌을 거칠게 몰아붙이자 노 대통령에게 경고서한을 보낸 뒤 사표를 냈다. YS 청와대와 안기부에 대한 감사원 특감을 고집한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YS의 ‘최고 고문’ 격인 김윤도 변호사가 昌의 감사원장 임명을 듣고 펄쩍 뛸 만했다.

 

“YS가 취임 첫해 대덕과학단지를 시찰할 때다. YS는 모든 공직자들이 나라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김덕주 대법원장·昌 감사원장도 시찰에 참여토록 했다. 대통령 지방 순시에 사법부 수장 등의 ‘수행’은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말이 국정이해였지, 실은 YS의 과시용이었고 昌의 얼굴에선 ‘이건 아닌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행한 기자가 ‘어떻게 어려운 걸음을?’이라고 말을 건네자 낯빛이 달라졌다. 옆에 있던 김 대법원장이 ‘구경하러 왔지’라고 가볍게 대꾸해 어색한 장면은 가까스로 지나갔다. 이후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이동하는 바람에 경호원들이 애를 먹었다.” K 기자는 YS가 ‘내색 않던’ 대법원장을 그해 9월 공직자 재산공개 과정의 잡음을 물어 사퇴시킨 반면, ‘내색을 한’ 昌 원장은 총리로 기용했다면서 YS의 용인술에 혀를 내두른다(YS는 김 대법원장뿐 아니라 박준규 국회의장도 재산공개 파문을 빌미로 물러나게 하는 등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구세력 물갈이를 성공리에 마쳤다). 

 

 

삼청동 총리 공관. 멀리 보이는 본채 뒤 담장은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과 맞닿아 있다. 박관용 비서실장은 담장에 쪽문을 설치, 총리와 수시로 만나 국정현안을 논의했다.

 

 

 

 

 

두 공관 사이 비밀쪽문 통해 수시로 교감

 

 

“총리를 보좌하는 상당수의 참모진이 구성돼 있다지만 그 조직·인력만으로는 국정 전반 파악은 어렵다. 하물며 청와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성층권’ 움직임엔 깜깜하게 마련이다. 국정원장은 대통령 직속이라 총리에 대한 보고의무 자체가 없으니 고급 정보에 어두운 게 당연하다. 나는 총리가 대통령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국정이 원활하게 돌아간다고 확신한다. 수시로 총리에게 대통령 동정을 귀띔해주고 현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것도 그래서다. 때문에 개혁·사정으로 바삐 돌아가던 새 정부 출범 초기에도 청와대와 내각 간에 엇박자가 없었다. 황인성 총리가 나에게 늘 고맙다고 인사한 이유다. 

 

공안·정보기관 등 외부에선 이 점을 의아해했는데 실은 ‘비결’이 있었다.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수시로,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교감했다. 물론 내가 총리 공관을 찾아간 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는 당연하다. 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만났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과 총리 공관은 승용차로 몇 분 거리에 있다. 하지만 담벼락을 맞대고 있다. 쪽문을 통하면 1분도 안 걸린다. 쪽문을 만들어 두고 내가 신호를 보내면 열도록 했으니 외부에서 모를 수밖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대화와 이해, 즉 소통을 강조하면서 털어놓은 ‘쪽문 비화’다.

 

“昌 총리가 부임한 뒤에도 쪽문 소통은 계속했다. 그의 깐깐함을 알기에 더 자주 찾아갔다. 昌은 어느 날 총리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 정부조직법 등을 손질하겠다고 했다. ‘헌법에 의하면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게 돼 있다. 하지만 총리가 국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통령중심제 아래서 총리가 내각통할권을 너무 주장하면 문제가 있다. 대통령과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시라. 나도 돕겠다’며 달랬다. 그런데도 총리 권한 행사를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지 마시라’고 만류하니 ‘그렇다면 박 실장은 빠지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막무가내였다. 이랬으니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YS는 ‘갸는 와 씰데없이’하며 매우 언짢아했다. 그래도 정말 개정안을 준비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昌은 昌이었다. 보름여가 지났을까. 

 

평소보다 일찍 등청한 YS의 얼굴엔 노기가 등등했다. ‘아니 이XX. 박 실장 이것 좀 보거래이’하며 책상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내게 던졌다. 昌 총리가 작성해 전날 YS에게 가져온 정부조직법 개정안이었다. 당시 실세인 최형우 내무장관을 공개석상에서 마구 꾸짖기도 했던 昌은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려고 했다. 그러던 1994년 4월 두 고집 간 갈등이 표면화됐다.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둘러싸고서다. ‘조정회의’는 내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출범했다. 

 

당시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긴장이 고조됐는데 외교안보 관련 부서의 입장과 논평이 제각각이었고 언론은 정부 정책 혼선을 질타했다. YS 초대 내각의 외교·통일 관련 부서 책임자들 모두가 대학교수 출신(한완상 통일부총리, 한승주 외무장관, 김덕 안기부장,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라 그런지 개인 생각을 거리낌 없이 발표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되겠다 싶어 대통령 자문기구로서 조정회의를 발족시켰고 이후는 손발이 착착 맞았다. 이때 昌 총리가 자신도 참석을 했으면 하기에 ‘외교안보에 관해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한 것이니만큼 총리의 직접 참여는 적당치 않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昌은 ‘나도 상황을 알아야 하니까 사람(이흥주 비서실장)을 보내겠다’고 했고 당장 그러시라고 했다. 조정회의 규정에 명단이 없어 이 실장이 배석자로 회의내용을 정리해 보고하는 형식이 됐다.

 

그런데 국무회의 석상에서 남재희 노동장관이 ‘요즘 나오는 대북 정책은 어찌 된 것이냐’고 묻자 昌 총리가 ‘나도 모른다’고 해버린 것이다. 그리곤 ‘정부 정책은 내각의 논의과정을 거쳐 입안·결정돼야 한다. 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도 관계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4월21일의 소동이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발칵 했다. 그간 참았던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 듯했다. 온 신문이 ‘청와대와 총리 갈등’으로 도배를 한 게 YS를 더욱 촉발시켰다. ‘이XX 뭐 다 알면서 모른다’고 하며 펄펄 뛰었다. 내가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총리가 보고받는 게 부실해 그런 모양’이라고 한 말 까지도 YS의 부아를 돋운 듯했다. 부르르 떨며 퇴청했던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집무실에 나오자마자 총리를 부르라고 했다. ‘화가 나신 상태에선 부르지 마십시오.’ ‘어서 불러요.’ ‘화난 상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좋지 않습니다. 내일 부르시지요.’ ‘당장 총리 불러요.’ 어쩔 수 없었다.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께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오후 4시 昌 총리가 청와대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부딪치는 자리에 나는 배석하지 않았다. 

 

엄청난 고성이 오갔다는 부속실 비서관 얘기만 들었다. 昌이 집무실을 떠나자마자 YS가 호출했다. ‘총리가 사표를 내기로 했으니 접수하시오. 내가 사표를 내라고 했지만 자기가 사표를 낸 것으로 해달라니까 그건 그렇게 해주고.’ YS는 昌과 있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꺼덕거리고 들어와서는 끝까지 잘못했다고 안 해. 어떻게 총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대통령 자문기구가 어쨌다는 거냐고 했지. 끝내 잘못했다고 않기에 책임지라고 했더니 책임지겠습니다 하더구먼.’ 이흥주 총리비서실장이 昌의 사표를 들고 왔다. 총리 취임 127일 만에 파탄이 났다(당시 민자당 총재 YS 비서실장이자 후일 昌도 보좌했던 신경식 의원은 자신의 자서전 《7부 능선에 적이 없다》에서 ‘사표’가 아닌 사실상 ‘해임’이었다는 청와대 쪽 증언을 인용했다. 그러나 昌 측은 ‘소신’이었다고 한다면서 또 YS가 昌을 부른 게 아니라 정기적으로 독대하는 자리였고 그 자리에선 사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는 주장도 한다고 술회했다).”

 

대통령 YS 초대 비서실장이었고 후일 昌이 신한국당 총재 당시 사무총장으로 昌을 도왔던 박관용 전 의장은 YS가 4월22일 오후의 ‘난리’ 직후에 소개한 증언에 무게를 두고 있다. 둘만이 대좌한 자리에서의 일이니만큼 진위를 가리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과 ‘후계자’가 격한 반감을 갖고 헤어졌고 공멸(共滅)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출신·임명 배경·개성 등 모든 면에서 특이했던 이회창 총리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곳은 펴겠다.” 1982년 6월, 제16대 총리로 지명된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취임 제일성이다. 제2대 부통령인 인촌(仁村) 김성수의 조카로서 헌정사상 첫 호남 출신 총리인 김 총리의 포부(抱負)는 포부로 끝났다. 기대를 모았던 김 총리였지만 ‘역시(총리의 한계라는 측면에서)’였다. 김 총리의 임명 배경과 재임 중 행적, 씁쓸한 퇴장은 대한민국 총리의 ‘속성’을 두루 함축하고 있다. 

 

 

 

호남 최고 명문가 출신, 대학 총장이 발탁의 개인적 요소라면 당시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은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그리고 1년3개월 뒤 퇴임하던 1983년 10월14일 닷새 전엔 아웅산 폭탄 테러가 발생했었다. 민심 수습이 임명과 해임의 기본배경이다. 거의 모든 총리가 이 범주에 속한다. 내각제하의 장면 총리를 논외로, 김대중 정부에 지분을 갖고 주주(株主)로 참여한 김종필 총리나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총리 등 몇몇이 실세(實勢)였을 뿐 대개가 ‘대독(代讀)총리’ ‘의전(儀典)총리’ ‘방탄(防彈)총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정일권·백두진·김종필 총리 등이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는 장수(長壽)에서 비롯한 착시(錯視)일 따름이다. 말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었다. 김상협 총리의 경우가 말해주듯이 취임 후 1년만 지나면 개각 얘기가 심심찮은 것은 역대 총리들이 시국 수습을 위한 제물이 됐고, 그래서 단명(短命)한 탓이다. 

 

1982년 5공의 유창순 총리(15대) 이래 현 황교안 총리(42대)에 이르기까지 평균 임기는 1년 남짓하다. 제6대 허정 총리(64일) 이래 최단명인 70일짜리 이완구 총리(43대) 같은 이에다 서리(署理)나 직무대행도 많아서다. 이런 단명은 총리의 그나마 존재감을 더 흐릿하게 만들었다. 직군(職群)으로는 노태우 정부의 이현재·노재봉·정원식·현승종 총리, 김영삼 정부의 이영덕·이홍구·이수성 총리 등 두 정부를 거치면서 절대다수가 대학 총장(교수) 출신이었다. 지금도 후임 총리 얘기가 나오면 대학 총장들이 물망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이명박 정부의 정운찬 총리(40대)가 있을 뿐,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대학 총장 출신이 없음에도 그렇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총리직을 자민련에 할애한 공동정부인 탓에 정치인이 주류였고 노무현 정부는 관료 출신(고건·이헌재·한덕수)이 중심이었다. 이명박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한승수·윤증현·김황식). 호남 출신으론 고건 총리 외에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총리(41대) 등 몇 안 되지만 후임으로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는 ‘균형’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지역의 성원이 크게 작용한다. 때론 대통령이 2인자 견제 카드로 총리를 활용하기도 했는데 노태우 정부의 노재봉, 김영삼 정부의 이홍구·이수성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후계자’의 반발만 키웠을 뿐 소기의 성과를 올린 적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김태호 총리지명자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반발로 서리 딱지마저 못 달고 낙마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현확 총리는 ‘막간(幕間)’의 최규하 대통령을 옹립해 실권장악을 노렸으나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TK(대구·경북)의 대부로서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가 곤욕만 치렀다. 이러고 보면 대법관 출신 이회창 총리는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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