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가 터졌는데 물어볼 곳이 없네…”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7.06 17:30
  • 호수 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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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권 이슈에 대응하기 어려운 한국학계의 미국 중심 현상

 


“영국이나 유럽 쪽은 물어볼 데가 없어서 난감하네….”

브렉시트로 세계 경제가 혼돈의 시간을 맞이했을 무렵, 국내 언론사에서도 난감한 상황을 맞았다. ‘유럽의 정치․경제 전망에 관해 짚어줄 전문가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에 관한 고민이었다. 종편의 한 기자는 “코멘트를 따려고 해도 알만한 학자는 죄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었다. 그나마 있는 소수의 유럽파도 브렉시트 성수기를 맞은 탓에 섭외하기가 쉽지 않아서 고생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가 한국 학계의 ‘미국 편중 현상’이란 오래된 문제와 맞닿은 셈이다.

학계의 ‘미국 편중’은 한국 학계의 고질적인 문제고 그래서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문제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과거 인터뷰에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대학교수 자리는 젊은 학자들에게 너무 좁은 데다, 충원되더라도 미국 박사로 채워진다”고 지적했다.

우리 학계가 유독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만 ‘편식’하는 이유는 뭘까. 일단 많은 학자들은 ‘자본의 편중’을 근본적 이유로 지적하고 있다. 지식인 사회의 자본 종속 현상 속에 이 문제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대에서 강의하는 박아무개 교수는 “한국 학계의 환경 속에서 학자들은 학술연구비를 지원해주는 곳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연구 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자와 자본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에서 교수들은 학술진흥재단과 기업들의 연구비 지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소위 프로젝트를 잘 따는 교수가 ‘유능한 교수’의 평가기준이 된 것이 현실이다. 연구비를 받는 게 학술활동의 목적이며 연구비를 많이 지원해주는 프로젝트를 잘 따는 교수에게 똑똑한 후배들도 몰리고 있다.”

자본이 점점 중요해지니 미국 편중도 심화됐다. 국내 학술비 지원 단체의 관계자는 “미국처럼 부유한 국가는 자기 나라에 와서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자에게 전적으로 지원을 해준다. 그러다보니 많은 한국 학자들이 미국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명 대학의 학과 홈페이지에 접속해봐라. 교수 소개란의 학위란을 보면 죄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학자들뿐이다. 서로 자신이 나온 학교 후배들을 끌어주고 챙겨주고 한다. 그러다보니 유럽권 대학을 나오면 학계에서 고립된다. 그나마 최근 중국 경제가 커지면서 중국파들이 많아졌지만 미국 유학파에 비하면 여전히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서울 한 4년제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인 이아무개씨(34)는 내년에 미국으로 ‘박사후과정’을 밟기로 했다. 원래는 영국 혹은 독일로 가려고 계획했다. 유럽 국가들은 무엇보다 장학지원제도가 많기 때문에 학비를 아낄 수 있다. 게다가 미국중심 사고를 벗어나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씨는 지도교수와 몇 차례 면담을 가진 뒤 최종 행선지를 미국으로 변경했다. “(박사후과정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뭐할 거냐”는 교수의 질문에 마땅히 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젊은 학자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뒤에도 결국 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유가 뭘까. 오늘날 대학원생이 학업을 이어가려면 ‘비용’이 뒤따른다. 하지만 대학원생들이 별다른 부업 없이 조교 월급이나 강사료만으로 연구와 생계를 이어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이 때문에 과외나 대필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연구자에게 고정 급여가 나오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박사과정생 이씨는 “학술 연구비 지원이 가장 많은 곳이 미국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연구 자료가 미국 자료인 경우가 많아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다면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 학계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측면을 고려해도 미국 출신의 이점이 있다. “학위를 받고 난 이후 교류도 미국과 더 활발하다. 전공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국내 대학에서 미국 유학파 출신을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건 사실”이라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애초에 취업 기회 자체가 불균형하게 주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유럽 박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울대 교수직에 세 번이나 떨어진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당시 그가 탈락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됐다. 서울대 경제학부가 미국 유학파를 우선시한다는 점과 주류 경제학자를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정태인 전 청와대 경제비서관이 쓴 칼럼에는 이런 배경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연전에 뮈르달 상을 받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서울대에 교수 신청을 했다. 그는 당시에 《케임브리지 경제학 논집》의 에디터였다. 유럽에서 유명 잡지의 편집자란 상상을 불허하는 권위이다. 한 서울대 교수가 한 마디 하셨다. ‘3류 잡지 에디터가 무슨…….’ 미국 것이 아니면 3류라는 이런 사고는 미국에서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케임브리지 경제학 논집》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경제학술지다.

현재 서울대 경제학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현직교수(부․조교수 포함)는 모두 38명이다. 이 가운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는 34명으로 전체 교수 중 약 89%를 차지하고 있다. ‘비(非) 미국출신’인 교수는 4명뿐이었다. 다른 대학도 상황은 비슷하다. 연세대 경영대의 홈페이지에서 확인되는 현직 교수 69명 가운데 미국 출신은 62명(약90%)이다.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비미국권도 대접을 못 받지만 한국 석․박사 출신은 아예 입도 못 떼는 분위기다. 박사과정생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이름 모를 지방대라도 나와야 한국에서 학자로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고 주변의 분위기를 전했다.

브렉시트 이후 표면으로 드러난 ‘비(非) 미국권 학자’의 부재는 한국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예정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브렉시트처럼 유럽권에서 이슈가 터졌을 때 국내에서 이를 객관적이고 전문적으로 짚어줄 만한 전문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과 대응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나마 국내에서 믿을만한 ‘유럽권’ 전문가 집단은 ‘대기업 계열의 경제연구소에서 유럽시장동향을 분석하며 단기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한 기업경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경제나 경영 쪽을 전문 분야로 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미국이 주 분야다. 유럽, 특히 유럽 대륙의 국가에서 공부하거나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내놓을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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