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위안화를 글로벌 통화로 만들어주나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08 18:55
  • 호수 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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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파운드화 가치 하락하면 중국 위안화 급부상” 전망

 


 

6월29일 중국 인민은행 산하 외환거래센터는 달러 대비 위안(元)화 기준 환율을 절상했다. 전날보다 0.31% 내린 달러당 6.6324위안에 고시했던 것. 환율이 떨어진 것은 그만큼 위안화 가치가 올랐다는 의미다. 24일 영국 국민투표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결정 난 뒤 위안화는 계속 약세였다. 하루 전만 해도 달러당 6.6528위안에 고시돼 2010년 12월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에 중국 금융계에선 “브렉시트로 파운드화와 유로화가 약세로 떨어지면서 위안화도 절하돼 달러당 6.7〜6.8위안대를 형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돌았다.

 

그러나 중국 중앙은행은 예상을 뒤엎고 하루 만에 위안화를 반등시켰다. 그뿐만 아니다. 같은 날 상하이종합지수는 전날보다 0.65% 오른 2931.59에 마감했다. 이는 6월 한 달 중 최고치를 기록한 6월3일의 2938.68에 근접한 수치다. 중국 증시는 브렉시트 전에는 2833~2905를 오가는 박스권 장세를 유지했었다. 한국·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의 금융시장도 안정을 되찾고 있지만, 중국보다 더딘 회복세를 보일 뿐이었다. 중국은 어떻게 브렉시트의 충격에서 빠르게 벗어났을까.

 

 

中, 브렉시트 충격에서 어떻게 빨리 벗어났나

 

그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중국과 영국의 관계를 되짚어봐야 한다. 18세기 중국 청나라는 ‘세계 질서의 중심’이었다. 이에 반해 영국은 식민지 미국이 독립하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서 지속적으로 쌓여가는 적자가 큰 골칫거리였다.

 

해마다 늘어가는 막대한 무역적자를 타개하고자,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몰래 수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들은 아편에 중독됐고 무역수지는 역전됐다. 청조는 강력한 아편 밀수 단속으로 맞섰다. 이를 구실로 1840년 영국은 현대화된 군함과 군대를 앞세워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두 차례의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쟁에서 완패한 중국은 급격히 몰락했다. 그 뒤 서구 국가들로부터 온갖 굴욕과 수모를 당했다. 1911년 청이 멸망한 뒤 대륙 곳곳을 서구와 일본이 지배했고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1949년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해 자력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일이 중국인들에게는 엄청난 쾌거였다. 

 

사회주의 정권은 영국과의 구원(舊怨)을 떨쳐내고 관계를 맺어갔다. 1950년 1월 영국은 중국을 승인하고 베이징(北京)에 임시대표처를 개설했다. 이는 미국과는 상반된 행보였다. 문화대혁명 초기 홍위병이 영국대표처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양국은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자, 양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 뒤 양국은 한동안 홍콩 반환문제로 부딪쳤다. 오랜 협상 끝에 1984년 12월 홍콩 반환에 합의했다.

 

1997년 7월 홍콩이 중국 품에 되돌아오면서, 양국은 역사적 앙금을 깨끗이 털어냈다. 물론 중·영 관계가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영국은 줄곧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왔고, 홍콩의 민주화에 간섭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2년 달라이 라마를 접견해서 중국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해 들어서 양국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지난해 3월 영국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주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장 먼저 가입을 신청했다. 또한 중국에 세계무역기구의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하는 데 찬성했다.

 

10월에는 자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극진히 환대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부부,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 등 3대가 총출동해 시 주석을 맞이했다. 중국도 화답해서 돈 보따리를 풀었다. 시 주석은 캐머런 총리와 30여 개 항목, 400억 파운드(약 62조2000억원)에 달하는 무역·투자 협정에 서명했다.

 

이처럼 중·영 관계가 어느 때보다 돈독한 데에는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영국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중국의 투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중국도 영국을 유럽연합(EU) 내의 적극 지지자로 만들 속셈이었다. 무엇보다 위안화를 글로벌 통화로 성장시키려는 중국에 EU 외환거래의 78%를 차지하는 영국은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지난해 중국은 국외 최초로 런던에서 50억 위안(약 8750억원)의 위안화 표시 국채를 발행했다. 또한 영국과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하고 그 규모를 확대했다.

 

양국의 금융협력이 숨 가쁘게 진행되면서 런던은 홍콩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위안화 역외결제센터로 발돋움했다. 지난 6월에는 30억 위안의 위안화 표시 국채가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기도 했다. 브렉시트 직전까지 영국이 위안화 국제화의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물론 중국이 영국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중국은 위안화를 국제통화기금 특별인출권(SDR) 준비통화 바스켓에 편입시켰다. 또한 한국과는 원·위안화 직거래시장을 서울과 상하이에 개설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금융을 제외한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은 그리 심도 깊지 않다. 지난해 영국은 중국의 전체 대외무역에서 2.02%에 그친 9번째 교역국이다. 유럽에서는 독일·네덜란드에 이어 3위다. 중국의 해외 직접투자에서도 영국은 미국·홍콩·오스트레일리아·말레이시아·프랑스 다음으로 6위를 차지했다. 이런 연유로 브렉시트가 중국의 경제성장, 대외무역 및 투자 등에 끼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빠른 회복세를 보인 중국 증시와 위안화의 절상이 이를 증명한다.

 

 

브렉시트, 중국에 미치는 영향 크지 않아

 

오히려 브렉시트는 위안화를 글로벌 통화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국제 금융계에서는 브렉시트가 도래하면 중국이 영국과의 협력 아래 추진했던 위안화 국제화가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실제 영국이 유럽 금융허브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면 위안화 국제화 거점을 파리·프랑크푸르트·룩셈부르크 등지로 분산해야 한다. 이럴 경우 중국이 지출해야 할 비용은 커지지만, 위안화가 전체 EU 시장으로 확산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6월27일 후웨샤오(胡月曉) 상하이증권 수석 애널리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 중문판에 기고한 글에서 “장기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영국의 비중이 축소되고 파운드화의 가치가 하락하면 위안화가 그 공백을 차지해 무역거래의 결제화폐로 급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를 보여주듯, 지난 5월 위안화의 국제결제 비중은 1.9%로 전월보다 0.08%포인트 상승했고 파운드화는 8.4%에서 7.87%로 급락했다. 어두웠던 중국과의 과거를 청산하고 ‘황금관계’를 열어젖혔던 캐머런 총리의 자충수 브렉시트. 착실히 다져왔던 양국의 협력을 수포로 만들지, 오히려 중국에는 전화위복이 돼 위안화를 글로벌 통화로 만들어주는 선물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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