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대선 막판 ‘이인제 전도사’로 나선 YS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28 09:41
  • 호수 139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JP 파기 노리면서 ‘DJ 비자금’ 악영향 차단으로 昌 견제

이회창(昌) 대표가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여권은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50%를 상회하는 지지율이 이를 말해준다. 昌과 김대중(DJ), 김종필(JP) 3자 대결을 가상한 여론조사 결과도 분명했다. 한국갤럽은 ‘37.9대25.5대6.4%’, 동아일보는 ‘40.4대26.6대7.1%’. 보통의 경우라면 선거일 4개월여를 앞둔 시점에서의 이런 추세가 말하는 것은 자명하다. ‘당선’이다. 보이지 않는 공권력의 지원과 압도적 자금동원력을 갖춘 여당 후보의 우세가 뒤집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변고(變故)’가 없는 한 그러하다. 그런데 변고가 너무나 많았다. ‘昌 아들 병역 면제 의혹 시비’, DJP연합, 그리고 선거일 직전 터져 나온 국가부도(IMF)사태 등등.

 

‘병역 면제 의혹’ 이른바 병풍(兵風)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선후보가 된 지 40일 만인 8월말 조사에서 昌 지지율은 반 토막 이하(15.2%)로 내려앉았다(리서치앤리서치 등). DJ에게도 10%포인트 뒤지는 것은 물론 IJ(31.7%)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병풍의 위력이 엄청났음을 웅변한다. 경선 패배 후 기회를 엿보던 IJ의 출마의욕도 부채질했다(IJ 지지율은 그러나 9월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24%로 줄어든다. 반면 DJ는 5% 상승).

 

“당 사무총장으로서 7·21 전당대회를 치르기까지의 도정(道程)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뜩하다. 제 뿔뿔 설치는 정당의 속사정이 어떨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터다. 총선을 치르고 난 당의 곳간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간 당 살림은 당 총재인 대통령의 지원금과 당 재정위원회 헌금으로 꾸려왔는데 두 파이프 모두 막혔다. 아들을 교도소에 보내느냐 마느냐(결국 구속)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대통령은 당 살림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청와대를 향해 손 벌릴 염치도 없었다. 또한 누가 ‘차기(次期)’인지 불투명한 마당에 재정위원들이 지갑을 열 리가 없었다. 기부금을 내더라도 잠룡 개개인에게 향할 것은 불문가지다. 여당이라는 게 야당과 달리 운영자금이 많이 드는 조직이다. 그런데 기름이 바닥났으니 이래저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손 큰’ 서청원 사무총장(현 새누리당 의원)의 ‘넉넉한’ 당 운영 뒤끝이라 더욱 옹색했다. 

 

당 대표 昌이 경선에 나섬으로써 제기된 불공정 시비는 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를 정리하려 했다면 더 큰 혼란이 초래됐을 게다(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했기 때문에 요즘 같은 비상대책위 체제는 거론되지 않음). 진흙탕 싸움판 한가운데서 잡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다. 7월 전당대회 날자가 정해졌지만 대회장을 임차할 돈조차 없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지인에게서 빌린 2000만원 등 4000만원을 들여 간신히 대회를 치렀다.” 말이 집권당이었지 각개약진이 일상화된 야당만도 못했다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푸념이다. 그는 “불공정 시비라는 하자가 없지 않으나 여당이 경쟁을 통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회창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다음 날(1997년 7월22일) 열린 축하연. 손을 맞잡고 승리를 다짐하지만 탈락한 ‘잠룡’들의 속은 전혀 달랐다. 왼쪽부터 이한동·이회창·김영삼 대통령·이수성·김덕룡·최병렬·이인제


 

 

초기엔 ‘가져오는 돈’도 뿌리친 昌

 

“전당대회 직후 당 재정위원인 기업가 A씨가 昌 후보 면담 주선을 신청해왔다. 솔직히 말해 반가웠다. 내 방에 들어선 그의 손에는 ‘예상대로’ 가방이 들려 있었다. 몇 억쯤 들어 있을까 싶었다. 곧바로 대표실로 그를 안내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대표실을 나왔다. 그의 얼굴엔 불쾌감이 가득했고, 손에는 방금 전 들고 간 가방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웬일이시냐’는 내 물음에 그는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뭐 얻어먹자다는 게 아니고…돕겠다는데.’ 한마디 내뱉은 그가 떠난 뒤 昌을 만났다. ‘어찌 된 영문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는 물음에 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싫은 소릴 좀 했지.’ 어이가 없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돈 얘기를 꺼냈다. ‘나는 해야 할 일은 틀림없이 해냅니다. 어렵다고 회피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예외입니다. 돈을 잘 모릅니다. 돈 만드는 일은 못합니다. 그런데 선거를 치르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합니다. 과거 대선 때 여당 후보들이 조(兆) 단위를 쓴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어찌하시렵니까. 결국 돈은 사무총장 소관인데 나는 소질도, 재간도 없으니 물러나겠습니다.’ 昌은 만류했지만 나로선 아닌 것은 아니었다. 깨끗한 선거를 치르자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현실이 그건 아니지 않은가.” 박 전 국회의장은 “정말 큰일이다 싶었다”고 회고한다. 

 

모시러 가도 부족할 판에 오는 사람을 쫓다니 기가 막혔다는 것이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큰돈’을 가져오는 이는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들기 마련인데 대쪽 이미지를 견지하려는 昌과는 상치(相馳)되는 것. 당시 박 전 의장이 느꼈을 당혹이 충분히 이해된다(현직 대통령과 대립각 세우는 것을 넘어 진검(眞劍) 대치 지경에 이른 昌 대선 캠프는 빈한했다. 사람은 득실댔지만 금고는 비었다. 와중에 캠프 핵심 S 의원 등의 ‘자금 빼돌리기’도 심심찮았다. 15대 대선 막판 부산 공방전이 벌어졌을 때 현지 선거대책본부가 4억원 긴급 투입을 요청했으나 당의 금고가 텅 비어 지원을 못할 정도. 昌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하다. YS의 자금지원을 기대할 수 없자 10월 하순부터 독자적 모금에 나선다. 지방 순회 유세를 벌이다 야간에 서울에 올라와 ‘물주(物主)’를 은밀하게 만나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昌 친동생인 이회성과 昌 최측근인 서정우 변호사가 주도하는 비선조직 부국팀은 국세청 차장 이석희를 앞세워 기탁을 독려하는 등 자금마련에 전전긍긍했다. 대선이 끝나고 6년 뒤인 2003년, 검찰은 이석희가 23개 기업으로부터 166억원을 모금했다고 밝히면서 昌이 당시 국세청장에게 모금을 독려한 사실도 공개한 바 있다. 이른바 ‘세풍(稅風)’이다. 昌은 야당이 돼 대통령 재수(再修)에 나섰던 2002년 대선 후 검찰의 ‘차떼기’ 수사로 곤욕을 치렀는데, 자금에 쪼들린 1997년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데서 비롯한 반사적 무리가 빚은 업보인지 모른다).

 

 

강삼재, ‘실제’인 DJ 비자금 폭로하고 큰 손해

 

“YS가 후임을 물으면 울산 출신 김태호 의원(새누리당 이혜훈 의원 시아버지)을 천거하리라는 구상을 갖고 청와대로 향했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사무총장 사퇴 의사를 밝히자 YS는 ‘본인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라며 선뜻 받아들였다. 그리곤 곧바로 ‘강삼재를 후임으로 하지’라고 했다. 나에게 ‘후임을 누구로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지도 않았다(강삼재 의원은 이원종 정무수석 등과 더불어 ‘신민주계’ 핵심으로 꼽히던 인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어서 그의 사무총장 소식이 전해지자 DJ 캠프는 아연 긴장했었다. 우려하던 대로 ‘DJ 비자금’ 상세를 폭로, 파란을 일으켰다. ‘공작정치’라는 역풍만 초래했다. 그는 훗날 ‘안기부 자금’ 수사 과정에서 ‘상도동’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민주계와도 등졌다. 후일 노무현 대통령 지지를 선언).” 박 전 의장의 말에는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난다.

 

“떠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나. 강삼재의 덤비는 스타일이 마음에 걸려도 도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어코 사고를 쳤다. ‘DJ 비자금 폭로’는 자충수(自充手)였다. 지지율 만회에 급급해 저지른 전략상 실패다. 강이 까발린 DJ 비자금 내역은 맞다. 은행 계좌번호, 액수 등등 정확하다. 통장사본까지 있다. 구구한 변명이 소용없는 확실한 증거다.” 박 전 의장은 상대방을 옥죌 카드를 주도면밀하지 못한 일처리로 사태만 악화시켰다고 진단한다. “도둑을 잡았다가 교통위반 했다고 혼난 셈”이라고 했다.

 

대선 2개월 전인 10월7일 첫 폭로가 있은 뒤 이어진 신한국당의 ‘DJ 비자금 폭로’ 과정에서 나타난 대통령 YS의 처신은 YS의 ‘이인제 지원설’ 논란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670억원의 계좌번호, 입출금 일자 등 증빙 자료가 있는 팩트(fact)였고  따라서 DJ에게 치명상을 입힐, 여당에는 DJ 덜미를 잡을 호재(好材) 중의 호재다. 그렇지만 YS는 묵살했다. ‘YS가 한마디만 하면 주저앉을 IJ’가 경선 불복자라는 비난도 감수하며 뛰어든 배경은 따질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지 않으면 되레 이상하다는 것. YS의 ‘IJ 지원’과 관련한 억측은 구구한데, 교사(敎唆)를 넘어 훈수(訓手)한 흔적도 도처에 널려 있다.

 

 

화형식까지 당한 YS, ‘IJ 훈수’ 본격화

 

검찰이 DJ 비자금 수사 착수 하루 만에 유보로 돌아서고, 그 3일 뒤인 10월24일 YS와 독대한 DJ는 “대통령의 중립을 평가한다”고 했다. 昌으로서는 복창(腹脹) 터질 만하다. 9월말, YS를 뒷방(명예총재)으로 밀어내고 총재를 겸했던 昌은 아예 탈당하라고 압박했다. 말이 탈당이지 ‘나가라’는 출당(黜黨) 요구였다. 당원들이 ‘YS 인형 화형식’까지 벌이자 YS는 11월7일 탈당을 선언했다. 그의 ‘국민들이 선택하면 누구든지 지지하겠다’는 탈당 즈음 선언은 ‘昌은 아니다’는 말과 진배없다.

 

YS의 ‘DJ 비자금’과 관련한 조치는 분명 DJ에 호의적인 행보다. 그러나 ‘지지’가 아님은 물론이다. YS의 ‘방해하지 않겠다’에, DJ가 ‘중립을 지켜준다면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한다’는 정도의 교감이 있던 것으로 보는 게 적확할 터다. YS가 DJ와 JP 간 연대를 끊기 위해 부심한 족적이 그를 방증한다. JP는 “9월 들어 YS가 한 고위 인사를 내게 보내왔다. 둘이 손잡고 내각제를 추진하자는 제의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YS의 은밀한 제안은 현실성이 떨어졌고, DJ와는 그간의 모든 것을 없던 걸로 하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그래도 싶어 여권 의중을 떠보기 위해 5일 기자회견에서 ‘내각제 개헌을 위해 대선을 연기할 수 있다’고 천명했으나 무반응이었다. 힘 빠진 대통령의 생각뿐이었음을 확인했다”고 회고록에서도 밝힌 바 있다.

 

‘병풍’으로 일격을 맞은 昌 지지율은 IJ에 10%포인트나 뒤지는 3등이었다. 昌 캠프는 이 부진을 YS 탓이라고 단정, YS와 거리두기에 나섰다. 그리곤 지지율이 계속 바닥을 기자 ‘YS 때리기’에 나섰다. 이에 YS는 탈당과  “누구든지 지지한다”는 선언으로 응수했다. ‘독이 오른’ YS는 昌 낙선을 위해, IJ 당선을 위해 막후에서 움직였다. ‘IJ가 중도 포기 않고 완주하도록 한다’는 DJ 대선 전략 제1조는 저절로 맞아떨어졌다. 

 

 

昌, 2차 투표서 60대40으로 ‘IJ연합군’ 물리쳐

 

1997년 7월21일, 신한국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이회창(昌) 대표를 제15대 대선후보로 선출. 1차 투표 1·2위 득표자를 놓고 치러진 결선 투표에서 昌이 이인제(IJ) 후보를 60대40으로 누른 것.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이한동·김덕룡·이수성이 사전 약속대로 IJ에게 표를 몰아줬으나 ‘대세론’을 업은 昌에겐 역부족이었다.

 

경선 레이스에는 당초 ‘9룡(龍)’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박찬종·김윤환·이홍구 3인이 중도하차하고 최병렬 의원이 가세, ‘6룡’이 경합했다. 경선 초반 1위를 차지했던 박찬종은 중반 들면서 당권을 거머쥔 昌에게 백중지세(伯仲之勢)를 허락하더니 종반 들어 추월당했다. 조직 없이 이미지에 의존하는 독불장군 박찬종의 한계였다(불공정 게임을 이유로 경선 포기를 선언했던 박은 대선 직전 신한국당을 탈당, 역시 탈당 후 독자 출마한 IJ를 지원).

 

 

1997년 3월13일 열린 신한국당 전국위원회에 입장하는 YS. 昌은 이날 당 대표에 선출됨으로써 경쟁자들을 압도할 기반을 마련했다.


 

1차 투표 때 昌 득표율은 40.9%, IJ 14.7%. 이한동은 IJ보다 0.1%포인트 적은 14.6%. 이한동이 2위였다면 ‘IJ 독자출마 사태’는 없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가정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인제·이한동·김덕룡 3인이 K-2(경복고)  동문인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