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디지털 온라인 시장’으로의 권력 이동
  • 허남웅 영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29 14:45
  • 호수 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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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 기존 극장 개봉 일변도에서 IPTV·디지털 케이블TV· 인터넷 VOD 서비스로 헤게모니 변화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1980년대 할리우드 SF영화를 대표하는 《블레이드 러너》 얘기다. 《마션》(2015)을 연출한 세계적인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미국 개봉 당시 제작비의 절반도 건지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지금 이 영화가 누리는 지위와 유명세를 고려하면 믿기 힘든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199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재편집한 《블레이드 러너》 ‘감독판’이 재개봉되면서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냈다. 개봉 당시 철저히 외면받았던 영화가 이후 걸작의 반열에 오른다?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2차 판권 시장에서 부활

 

올해 상반기 최고의 문제작을 꼽으라면 단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배트맨 대 슈퍼맨》)이다. 아이언맨·캡틴아메리카·앤트맨 등 마블 슈퍼히어로들의 독주에 맞서 배트맨과 슈퍼맨, 즉 전통의 슈퍼히어로가 힘을 합친다는 것만으로 팬들의 기대감은 상당했다. 결과는?

 

마블 영화의 경우, 슈퍼히어로 각각의 개별 작품을 먼저 선보인 후 ‘어벤져스’에서 뭉치는 방식으로 팬들의 기대감에 부응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반해 《배트맨 대 슈퍼맨》은 배트맨과 슈퍼맨 외에 원더우먼·플래시·아쿠아맨·사이보그 등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을 모두 소개하려다 보니 151분의 상영 시간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혹평에 시달렸다. 비슷한 시기에 국내 개봉했던 《캡틴아메리카: 시빌 워》가 86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에 반해 《배트맨 대 슈퍼맨》은 225만 명에 그쳐 체면을 구겼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원더우먼》 《저스티스 리그》 《그린랜턴 군단》 등 2020년까지 10편의 영화를 차례로 선보여야 하는 DC의 ‘저스티스 리그’ 입장에서는 출발부터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해결책은? 기존의 극장판에 30분의 추가 장면을 더해 181분의 확장판을 선보이자, 기존과는 다른 평가가 줄을 이었다. 극장판에서 설명이 부족했던 설정들, 예컨대 극 중 배트맨과 슈퍼맨을 파멸시키려는 악당 렉스 루터와 슈퍼맨의 연인 로이스 레인을 미끼로 삼는 테러 조직과의 연관성, 클라크 켄트가 어떻게 렉스 루터가 연설하는 자선행사장을 찾아 브루스 웨인과 만나는지의 과정이 더해지자 이야기의 개연성이 높아졌다.

 

《배트맨 대 슈퍼맨》 확장판은 IPTV와 디지털 케이블TV, 그리고 인터넷 VOD 서비스(‘디지털 온라인 시장’)를 시작한 첫 주에 3위를 기록했다. 실망스러운 극장 흥행을 고려하면 꽤 선전(善戰)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향후 ‘저스티스 리그’의 개봉이 줄을 잇고 있어 개봉 때마다 연관성을 찾기 위해 관객들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을 통해 《배트맨 대 슈퍼맨》을 더 찾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극장 개봉 이후 잊힐 운명이었던 《배트맨 대 슈퍼맨》은 2차 판권 시장이라는 일종의 패자 부활전을 통해 기사회생한 것이다.

 

이는 극장 개봉 수익에만 의존했던 2000년대 영화산업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디오 시장이 궤멸하고 불법 다운로드가 비일비재했던 당시에는 극장이 아니면 영화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종종 DVD로 극장에서와는 다른 버전이 소개되어 영화 팬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극장 입장료의 2~3배를 상회하는 판매 가격은 일부 마니아를 제외하고는 애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들어 디지털 케이블과 IPTV가 도입되고, 인터넷 VOD 서비스가 일반화되는 등 2차 판권 시장이 살아나면서 극장의 판도 또한 급격히 변화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한국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2010년 이후 IPTV 및 디지털 케이블의 매출액은 2010년 491억원에서 2014년 2254억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인터넷 VOD 또한, 2010년 267억원에서 2013년 729억원의 매출액 상승을 기록하며 2차 판권 시장의 부활을 견인했다.

 

 

2차 판권 시장, 제작사·감독·업체 모두 윈윈

 

이와 같은 ‘디지털 온라인 시장’의 급격한 팽창은 수입 영화의 확대를 불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매주 개봉하는 신작이 10편을 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지금은 무려 20편 이상이 될 정도로, 디지털 온라인 서비스가 극장가에 불러온 파급효과는 대단하다. 영화를 제작하는 것과 달리 수입할 경우,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을뿐더러, 설령 극장 개봉 수익이 여의치 않더라도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이를 만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디지털 온라인 시장’이 확대되고 매체와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배트맨 대 슈퍼맨》처럼 극장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작품의 확장판뿐만 아니라,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들도 ‘디지털 온라인 시장’ 이용자를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관객몰이에 나선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그렇다.

 

《아가씨》는 극장 개봉 당시 428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찬욱 감독의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중 최고 수익을 올렸다. 박 감독은 기존의 144분 버전에서 20분을 추가한 감독판으로 2차 판권 시장을 공략한다. 이는 제작사와 감독에게 ‘디지털 온라인 시장’이 극장 개봉만큼이나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봉 당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그 기세를 이어가는 게 보통이다. 《곡성》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 풀린 6월말 이후 지금까지 줄곧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그런 상황에서 감독판이나 확장판으로 새롭게 선보일 경우, 이미 극장에서 본 관객을 ‘디지털 온라인 시장’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판권을 가지고 있는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수익이 늘어나고, 감독은 애초 자신이 의도한 버전을 소개할 수 있고, 또 디지털 온라인 업체는 다양한 콘텐츠로 이용자의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으니 모두에게 ‘윈윈’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극장에서의 마이너스 수익을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은 영화의 수입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어 시장의 건전성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더군다나 케이블 TV 간의 과열 경쟁으로 시장의 적자 폭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큰 문제다. 제2의 《블레이드 러너》는 건강한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할 때 가능한 현상이다. 극장에서 이뤄지는 1차 시장과 디지털 온라인 서비스를 안방에서 즐길 수 있는 2차 시장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영화산업은 비로소 안정을 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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