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에 비춰보는 세월호 참사의 극복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6.08.01 18:21
  • 호수 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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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도호쿠대 교수의 조언 “세월이 지나도 당사자들은 재난의 현재를 산다”

재난은 개인과 지역, 사회 전체가 상처를 입는 일이다.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 같은 반응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을 겪은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유족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이인자 일본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는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북지역에서 초대형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후 5년간 피해 지역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를 해 왔다. 희생자 유족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재난 이후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그런 이 교수가 한국을 다시 찾았다. 7월29일 고려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열린 ‘트라우마의 회복과 공동체 성장’ 세미나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세월호 참사로 피해를 입은 가족들과 지역사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일하는 ‘안산온마음센터’가 주관한 이 세미나에는 정신건강과 재난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교수는 “세월호 참사가 시사하는 바를 함께 생각하고 공유했으면 좋겠다”며 입을 열었다.

  

이인자 일본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이 교수가 말하는 일본 동북지역의 지진과 세월호 참사. 형태는 다르지만 닮은 점이 많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오카와(大川)초등학교에서는 재학생 108명 중 74명, 교직원 13명 중 11명이 희생됐다.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이 희생을 키웠다. 50여 분이라는 대피 시간이 있었고, 학교 옆에는 피난할 만한 산도 있었다. 산으로 가자고 먼저 얘기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피난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기 지시’를 받고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은 쓰나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고 선실 안에 그대로 있었던 세월호 희생자들처럼, 오카와초등학교 학생들도 어른들의 말을 믿고 기다렸을 뿐이다. 

 

순식간에 아이들을 잃은 유족들은 분노했다. 유족들은 학교와 시, 시교육위원회에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건을 축소하기 위한 거짓말만 난무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알 수 있는 거짓말들이었다. 이 교수는 “이 흐름도 우리나라 세월호 참사 이후 상황과 비슷하다. 유족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처와 설명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인자 교수는 재난 후 ‘위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월11일 일본 전역에서 열린 동일본 대지진 5주년 추모식(왼쪽 사진)과 4월15일 안산에서 열린 세월호 2주기 추모제


가장 중요한 것은 ‘위령’

 

시간이 지나면 재난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잊게 된다. 처음에는 놀라고 안타까워하지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시간 자체가 ‘위로’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난의 당사자와 유족들에게 사고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희생자라면 유족들은 더욱 재기하기 힘들다. ‘아이를 잊은 것 아니냐’는 주변의 시각, ‘내가 아이를 잊은 건가’하는 자신의 마음에 갇혀 사람들의 접근과 도움 자체를 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수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은 ‘위령(慰靈)’이라는, 넋을 달래는 작업이다. 그로 인해 유족들이 미래를 위한 행위를 준비할 수 있는,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신원 불명의 주검들이 안치소에 놓였다. 사람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을 찾기 위해 피난소와 안치소를 뛰어다녔다. 폭풍우처럼 몰아친 슬픔 이후 언론의 관심은 소송을 준비하는 유가족들에게만 집중됐다. 남은 것은 같이 피해를 공유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위령’을 하기로 했다. 스스로 부흥위원회를 결성하고, 아이를 기억하기 위한 특별한 묘를 만들어 생각날 때마다 찾아갔다. 정신적 케어를 해 줄 수 있는 담당자들도 등장했다. 종교를 바탕으로 한 수양과 각종 교육들이 이어졌고, 유족들끼리 모임을 갖고 대화를 나누며 슬픔을 위로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가족, 아직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들은 지금도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그것을 인정한다.

 

이 교수는 “재난을 잊기 위해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없애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가시적인 부분에 치중해 재난의 흔적을 없애버린다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없애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가 말하는 위령의 방식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일본이 대지진 이후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름에 등장하는 꽃과 불상을 이용한 묘를 만든 것도, 미국이 9·11 테러 이후 큰 기념관을 건립해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으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게끔 하는 방식도 모두 옳다. 재난을 겪은 당사자와 유족들이 그 취지에 공감하고 위령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다.

 


“장기간 들여다보지 않으면 재난에 대해 알 수 없다”

 

이 교수는 각종 지원단체와 연구단체를 비롯해 재난 극복을 돕는 유관기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재난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교수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하게 된 케이스다. 일본의 경우 연구 시작 이후 5년간은 개인의 업적이나 성적을 내기 위해 발표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긴 기간 동안 심도 있는 연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연구자들과 6개월 정도 공동 연구를 거치는 동안 한국의 연구자들이 갖는 압박감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연구는 1년이 (연구기간으로) 긴 편이었다. 한국의 연구진들은 몇 개월 단위로 두꺼운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며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풍토 안에서 연구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그는 “큰 재난이 있을 때 재난을 연구하거나 분석하는 사람에 대한 유관기관의 배려도 필요하다. 장기간 들여다보지 않으면 (세월호와 같은) 재난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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