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진세 논란 ①] ‘부유한 사람 = 전기를 많이 쓰는 사람’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8.11 09:59
  • 호수 139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는 전업주부 송아무개씨(31)는 지난해 혼수로 장만한 에어컨을 두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에어컨을 틀자니 월말 전기요금 폭탄을 맞을까 걱정이고 안 틀자니 도저히 집안에서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생후 4개월 된 아이가 있어 더더욱 에어컨 없이는 여름을 보낼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전력 사용량을 줄일까 싶어 밤에라도 에어컨을 꺼두고 싶지만 사상 유례없는 열대야는 이조차도 쉽지 않게 만들었다. 송씨는 “나 혼자 살면 밖을 나가든 찬물 샤워를 하든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있겠지만 아이가 있다 보니 에어컨 사용을 할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지었다. 

“내가 전업주부이고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우리 집엔 늘 누군가가 생활을 하고 있다. 요즘 같은 날씨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에어컨을 돌려야 한다는 의미다. 전기를 낭비하거나 그러는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하는 전기로 내야할 누진세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 서울 한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장아무개씨는 2년 전 부모 집에서 독립해 나오면서 산 에어컨을 올 여름 처음 사용했다.  그마저도 하루 1시간 정도뿐이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면 한낮 동안 뜨거워진 집안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잠시 에어컨을 돌린다. 

직업상 집을 자주, 그리고 오래 비우기 때문에 장씨의 사용 전력량은 매우 낮다. 장씨는 “이번 여름에는 밤에도 더워서 평소에 비해 에어컨을 ‘펑펑’ 쓰고 있는데 그래봤자 하루 2시간 정도 쓴다”며 “정확하게 확인해봐야겠지만 아무리 많이 써도 전기요금이 2~3만원에서 크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앞의 두 사례 중 어느 가구가 더 많은 전기 요금을 부담하게 될까. 물론 첫 번째 집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어느 가구가 사용량 대비 더 많은 전기 요금을 부담하는 게 사회적 형평성에 맞을까. 육아를 위해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송씨의 집이라고 답하는 게 과연 맞을까. 

 

‘누진세’ 논란이 뜨겁다. 연이은 폭염에 가정용 전력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누진세 폭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8월8일에는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를 상대로 ‘전기요금 부당이득 반환 청구’ 집단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소송에는 소송인원 모집 이틀 만에 이미 1만여 명이 넘게 참여했다. 현행 전기세 부과 방식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수한 누진세 논란 속에는 이 제도가 더 이상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누진세가 처음 도입된 배경을 살펴보자.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강타했고 산업발전 후발주자로서 경제성장을 국가적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달리고 있던 한국은 1974년 전기세에 누진제도를 적용했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명목은 ‘비산유국으로서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가정용 전기 소비를 억제해 산업용 전력을 원활히 공급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가정용 전력에는 가파른 6단계 누진제를 적용하면서 산업용 전력은 오히려 싼 가격에 공급했다. 국가적 과제보다 더 고결한 건 없던 시기 때 얘기다.

 

가정용 6단계 누진세 적용은 경제력의 격차에서 비롯되는 자원 소비의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제도다. ‘많이 버는 사람이 결국 전기도 많이 쓴다’는 단순한 명제가 논리의 바탕이 된다. 과거는 이런 명제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시대였다. 

 

반면 지금은 어떨까. 앞선 사례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의사로 근무하며 혼자 사는 장씨가 여름철에 에어컨 사용량이 적은 것은 전기 절약을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생활하는 송씨가 에어컨을 끄지 못하는 이유는 ‘낭비’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누진세를 고수하겠다는 정부의 제도는 이 같은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많이 쓴 사람이 사용 전력량보다 더욱 많은 돈을 낼 뿐이다.

 

많이 쓴 사람이 더 많은 비용을 내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하지만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많은 전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더 이상은 ‘전기를 많이 쓰는 사람=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는 등식에서 ‘=’ 부호가 성립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의 ‘뿔난’ 여론이고 1만여 명이 넘는 소송인단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