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여명의 원혼은 어디로...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8.11 10:05
  • 호수 139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잊힌 ‘기막힌 진실’…조선인 최대 7000명 희생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 놓여 있던 20세기 초의 한반도. 점령군이었던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남성들은 전쟁터나 공사현장에 강제로 끌려갔고, 여성들은 성노예로 강제 동원됐다.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 자행했다. 익히 알려진 일제의 만행이다. 

 

하지만 알려진 내용은 일부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한·일 관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의 영향으로 진실의 빛을 보지 못한 사건들이 있다. 특히 일본이 패전 직후 한국인들을 집단학살한 사건들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 사건들은 여전히 규명되지 못한 채 역사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다.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우키시마호) 폭침사건도 그중 하나다. 해방 직후 수많은 조선인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출항한 이 배는 이틀 만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일본 인근 해안에서 침몰했다. 최소 524명(일본 정부 공식 발표)에서 최대 7000여 명(생존자 증언)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대부분 해방의 기쁨과 함께 그리운 고향을 찾던 조선인들이었다. 이때 수장된 수많은 영혼들은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일본 근해 갯벌 깊숙한 곳에 여전히 묻혀 있다.

 

1945년 8월24일 해방 직후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이 사고로 조선인 최대 7000명 (생존자 주장)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희생됐다.


“물귀신이 된 친구들이 보고 싶소”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쯤. 일본 교토 북쪽 마이즈루(舞鶴) 만에 있는 작은 군항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바다에서 큰 배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였다. 이 배는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조선인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서서히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장됐다. 

 

이철우옹(89·충남 아산)은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생존자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건강도 좋지 않지만 ‘그때의 일을 이야기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함께 일했던 친구들의 영혼을 고국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철우옹이 전하는 그날의 상황은 처참했다. 폭발음과 함께 배가 기울어진 직후 인근 바다는 기름으로 뒤덮였다. 선실 안으로 바닷물이 솟구치자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갑판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부서졌다. 배가 폭발하면서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든 이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줄지어 서로 부둥켜안고 침몰하는 배의 밧줄에 매달려 있다가 맨 위 사람이 줄을 놓쳐 바닷물 속으로 몽땅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구조에 나섰던 일본 민간 어선들은 물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달라붙어 뒤집히기도 했다. 물속에서 헤엄치다가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너무 사람이 많아 발목이 잡혔다. 그는 물속으로 잠수해 멀리 가다가 떠내려오는 판자를 잡고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이철우옹과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끌려갔던 강제징용 노동자들이었다. 이철우옹 또한 주재소 순사와 면 노무계원에 의해 연행된 뒤 일본까지 끌려갔다.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만에 있는 일본통운주식회사에 배속돼 군수물자 하역작업을 했다. 추위와 배고픔, 노동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고향의 부모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아내겠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윽고 일본의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감개무량함을 가슴에 안고 오른 귀국선은 끝내 고국에 도달하지 못했다.

 


숨길 수 없는 ‘고의 폭침’ 정황

 

이철우옹은 “그 배(우키시마호)에 8500명 정도가 탔는데 1500명 정도 살고 나머지는 다 죽었다”며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안하기만 하다”고 하소연했다. “물귀신이 된 친구들, 이제 그들의 영혼이라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우키시마호가 일본군에 의해 고의로 폭침됐다는 충격적인 증언도 이어졌다. 두 동강 난 배의 침몰 원인을 밝히는 핵심 증거, 바로 생존자들의 증언이었다. 20여 년간 일본을 오가며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온 전재희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회장에 따르면, 생존자였던 고(故) 주윤창씨는 ‘일본 헌병 미나미가 배 밑부분에 (폭탄의) 전기선이 늘어져 있는 것을 절단하려 했으나 기구가 없어서 자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폭발 직전 일본 해군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배를 미리 빠져나갔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사건 이후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조기과에서 근무했던 사사키는 “기관실 옆 창고에 폭발물이 설치돼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위치는 일본 해군기지에서 불과 300여m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일본 해군은 구조를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가 미국의 기뢰에 의해 폭파됐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물기둥이 치솟아야 한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물기둥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폭발 당시 우키시마호는 완전히 멈춰선 상태였다. 감응 기뢰는 수압이나 직접 접촉으로 폭발하고 음향 기뢰는 기관 소리에 반응하는데, 우키시마호는 이 모든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키시마호 출항 배경도 고의 폭침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당초 일본 정부는 9월 중순부터 조선인들을 돌려보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성은 패전 3일 후인 1945년 8월18일 느닷없이 우키시마호에 “즉각 현지 조선인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라”고 명령했다. 일본 측 자료는 “조선인 해군 군속들이 고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호소하는 등 불온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패전 직후 제 앞가림도 버거웠던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고향에 보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군함을 움직였다는 얘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돌발적인 출항 명령에 우키시마호의 일본 해군 병사들조차 “부산에 가면 연합군 포로가 된다”면서 항명소동을 벌일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배에는 부산까지 항해에 필요한 해도(海圖)조차 없었다. 패전 후 오미나토 경비부의 디젤 엔진용 석유가 바닥나면서 우키시마호는 연료조차 보급받지 못했다. 우키시마호의 항로 또한 부산으로 향하는 뱃길과 달리 일본 본토를 끼고 인근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위 사진은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생존자 소종규·지홍석·정기영·이철우씨가 지난 2001년 폭침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모습이다. 아래 자료는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가 찾아낸 일본 군부의 고의 폭침 정황 증거자료

 

고의로 만들어진 ‘미제사건’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정황도 곳곳에서 포착됐다. 일본 정부는 사건 발생 7일 만에 사망자 수가 524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조선인 승선인원 3735명 가운데 52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편승자 명부’와 ‘사몰자 명부’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 명부를 공개하지 않았다.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는 260명으로 보고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마저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본 측 생존자 가운데서도 일본 정부 공식 발표보다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실제 승선인원이 7000~8500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장교와 군인들이 객실에 타고, 조선인들은 탄약고와 기관실, 갑판, 창고 등에 탔는데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승무원이었던 하세가와 모토요시는 “나는 (승선 인원이) 8000명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에 응했던 이철우옹조차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그는 “멀쩡한 사람까지 죽었다고 하는 거 보면 일본이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죽지도 않은 나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 놓았다”고 경악했다.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원인 규명과 희생자 수습을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인 규명과 희생자 수습을 위해선 선체 인양과 사체 수습이 중요함에도 일본 정부는 유가족들의 줄기찬 요구를 무시한 채 우키시마호를 바닷속에 방치했다. 소속사 오사카상선이 침몰 선박을 재사용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에 인양을 요구했고, 사고 발생 5년 후인 1950년 3월 첫 인양을 시도해 선미 부분을 인양했다. 그러나 기관 파손 상태가 심각해 인양은 중단됐다. 그러다 한국전쟁 발발 뒤 고철 가격이 급상승하자 1953년 고철 회수를 위해 우키시마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해체한 후 조각난 선체 일부를 끌어올려 인양했다. 이 과정에서 배 안에 남아 있던 많은 사체들이 유실됐고, 103구의 유골만 수습됐다고 전해졌다. 이 유골마저 여러 조각으로 나눠 일본 전범자들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보관하고 있다.

 

일본은 왜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을 학살한 것일까. 군사기밀 유출을 막고 강제징용의 참혹성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에 대한 군부의 항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오미나토 주변에선 일부 해군이 “해군은 전쟁에 지지 않았다. 계속 싸워야 한다”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일본은 그동안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은 해방 이후의 사건이므로 피해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보상은 이미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1992~94년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법원은 사죄 요구를 기각한 채 한국인 15명에게 모두 4500만 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안전수송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이조차도 2003년 오사카 고등법원 항소심과 2004년 최고법원 상고심에서 깨지고 패소 확정됐다. 

 


해방 직후 이뤄진 집단학살 재조명해야

 

해방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일본 패잔병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은 우키시마호 침몰뿐만이 아니었다. 국가기록원은 2012년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한 러시아 정부의 1946년 보고서 초안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현 우글레고르스크) 지역에는 조선인 1만229명이 살았지만, 전쟁 후 5332명밖에 남지 않았다. 한인 인구가 50%가량 감소한 것이다. 당시 소련 측 보고서에는 한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 이유로 피난·귀환과 함께 일본의 집단학살을 지목했다.

 

해방 직전 소련 국경과 인접해 있는 가미시스카 지역은 일본군 부대가 진주하고 있었다. 제지 공장과 탄광이 많은 산업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철도와 도로, 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많이 보내진 곳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 직전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후퇴하며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이 시작됐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도울 것이다. 조선인들은 소련의 스파이다”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그러자 1945년 8월18일 일본 헌병들은 카미시스카 경찰서 유치장에 조선인들을 몰아넣은 뒤 불을 질렀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사살했다.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탑승하게 한 후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증언, 해방의 기쁨에 만세를 외쳤던 비행장 건설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형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 같은 행위는 최근까지 밝혀지지 않다가 당시 만행을 소상히 기록한 소련군과 KGB의 수사 자료가 공개되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8월20일부터 25일 사이에 한 마을의 조선인 전체가 학살당하는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러시아 사할린 서쪽 큰 항구도시인 홈스크(마오카)로부터 내륙으로 40km 정도 떨어진 포자르스코예(미즈호) 마을의 일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 병력이 도달할 당시 마을에는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남아 있었다. 예비군 훈련에 동참했던 재향군인회와 마을 청년단 소속 일본인들은 의용전투대를 결성한 뒤, ‘상부의 지시’라며 조선인 27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희생자 일부는 냉동창고에 갇힌 뒤 얼어 죽고 바다에 던져졌다. 희생자에는 부녀자 3명과 어린이 6명도 포함돼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