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김정은의 ‘평양 건설’ 드라이브에 담긴 통치코드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12 09:45
  • 호수 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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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으로 건설하라 했는데 이행하지 않았다”

평양의 스카이라인이 변모하고 있다. 대동강변에 초고층 아파트와 현대식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고 시가지 곳곳에 새로운 거리가 조성되고 있다. 최근에는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영구 보관되고 있는 금수산태양궁전 부근에 여명거리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3월 조성을 지시한 이곳은 한여름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공사 속도를 높이고 있다. 북한의 대외홍보용 잡지인 ‘금수강산’ 7월호는 ‘70층짜리 고층 살림집과 함께 35~55층까지의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고 소개했다. 건설현장 관계자는 “70층짜리 살림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다”면서도 창전거리와 미래과학자거리 공사 성과를 내세우며 공사 강행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창전거리와 미래과학자거리는 김정은이 핵·미사일 개발에 기여했다는 김일성대와 김책공대 교수·연구사 등에게 시혜성으로 선물한 아파트가 새로 지어진 곳이다.

 

김정은은 2012년 집권 이후 건설과 건축 분야에 애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양에 신시가지를 건설했을 뿐 아니라 능라인민유원지와 문수물놀이장 같은 위락시설도 지었다. 평양 순안비행장과 원산비행장을 국제 규모의 공항으로 만들겠다며 수천억원을 들여 새로 짓다시피 리모델링했다. 강원도 문천에는 마식령스키장과 호텔을 지었다. 이 모두가 자기식 건설·건축 미학을 세우겠다는 김정은의 의지에서 비롯된 결과다. 북한의 관영 선전매체들은 김정은 시대를 ‘주체건축의 새로운 전성기’라고 강조하며 건설부문의 업적을 부각하고 있다. 특히 ‘오늘 평양에서는 사회주의 문명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며 이를 김정은의 ‘정력적인 영도가 낳은 결실’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평양 시내 모습


北 관영 매체 ‘주체건축의 새로운 전성기’

 

물론 건설 분야에 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각별한 관심은 김정은이 처음은 아니다. 아버지이자 선대 수령인 김정일도 1974년 2월 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받기까지 20년간 김일성 유일영도체계 확립과 함께 대형 건설·건축 프로젝트에 주력했다. 평양시 창광거리와 문수거리에 고층아파트를 비롯한 현대적 주거시설을 건설하고 주체사상탑이나 개선문, 평양산원 등 북한이 체제 선전 차원에서 자랑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김정은의 경우는 건설·건축 분야에 도를 넘는 집착 수준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2013년 말 평양에서 ‘건설부문 일꾼 대강습회’를 개최한 그는 “최근 연간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많이 세우는 과정에서 설계일꾼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설계 수준이 높아졌지만 당과 인민의 요구, 세계 건축발전 추세에 비춰볼 때 아직 뒤떨어진 것이 적지 않다”고 분발을 촉구했다. 김정은이 자신이 스위스 조기유학 때 접한 서방 사회와 북한이 처한 현실 사이에서 고심하는 모습은 2012년 5월 평양 만경대유희장을 찾았을 때 잘 드러났다. 김정은은 당시 공원 보도블록 사이로 자라난 잡초를 보고는 “관리실태가 한심하다”고 질타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허리를 숙여 풀을 뽑았다. 절대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이런 모습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옆을 따르던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간부들이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해하는 게 드러났다. 김정은은 격한 어조로 “시설이야 그렇다 치고 잡초는 신경 쓰면 제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일꾼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경종을 울려야겠다”고 말했다. 이런 소동은 이튿날 노동신문에 그대로 소개됐다. 

 

자신의 뜻대로 공사가 추진되지 않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평양 순안국제공항 공사를 총괄 지휘한 마원춘 국방위(현 국무위원회) 설계국장은 2014년 11월 현지 점검을 나온 김정은이 “이런 식이면 어느 나라의 공항과 다를 게 없다. 주체적으로 건설하라 했는데 이행하지 않았다”고 불호령을 내린 뒤 가족과 함께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추방됐다. 1년 만에 복귀했지만 유난히 핼쑥해지고 김정은의 곁에 접근하는 걸 꺼리는 듯한 겁먹은 표정이었다. 공포정치 속에 건축 분야도 숨을 죽이고 김정은의 지시만 무조건 따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김정은이 지시한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4년 5월에는 건설 중이던 평양 평천 구역 23층 아파트 붕괴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김정은은 건설 책임자들이 주민들 앞에서 공개 사과하는 장면을 관영 매체로 보도시켰다. 하지만 부실공사는 이어지고 있다. 여명거리 공사 소식을 전하는 북한 매체들은 연일 속도전 자랑에 나서고 있다. 북한의 한 인터넷 선전매체는 최근 “여명거리 건설장에서 70층 살림집 골조공사가 불과 74일 만에 완성되는 눈부신 기적이 창조됐다”고 주장했다. 또 노동신문은 “한 개 층 골조를 올리는 데 드는 시간을 36시간에서 24시간으로 줄인 데 이어 지난 7월에는 다시 16시간으로 단축했다”고 주장했다.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에 빗댄 ‘천리마운동’은 김정은 시대 들어 만리마운동으로 강도가 높아졌고, 현재는 경제 분야의 생산성 향상 운동인 ‘200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김정은 지시한 공기 맞추기 위해 무리수

 

김정은의 이 같은 건설 드라이브가 부실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경제·핵 병진 노선 때문이다. 핵 보유로 재래식 무기에 투입될 군사비를 덜 수 있게 됐으니 이를 민생경제에 돌리겠다는 그럴싸한 논리지만 실제로는 이행되기 불가능한 주장이다. 무엇보다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한 상황에서 건설·건축은 물론 다른 분야의 경제도 숨통이 트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김정은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4년 넘도록 손에 잡히는 성과는 보여주지 못했다. 북핵과 미사일 도발에 따른 대북제재 국면에서도 김정은은 평양을 중심으로 체제 과시성 건설·건축에 상당한 경제자원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이다. 자신의 권력 지지기반인 특권층의 환심을 사고 리더십을 부각·선전하기 위한 통치코드다. 하지만 민생을 팽개친 듯한 그의 행보에 실망한 주민들은 등을 돌리고 있고, 핵심 엘리트들의 피로현상도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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