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하고 법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정의는 법철학의 중심에 있는 개념인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 민법총칙을 공부하면서 책표지 안쪽에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의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意)를 네임펜으로 멋지게 적어놓는 친구들이 있었다. “정직하게 살아라.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 왠지 심오한 의미가 있어 보였다. 2011년경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정의라는 난해한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음에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필자와 같은 법조인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정도나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을 샐러리맨이나 가정주부까지 구독했다고 하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한때는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원시인 취급을 당할 정도로 많이 회자됐다. 그렇다면 샌델 교수가 독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의를 속시원하게 설명해줬을까. 이 책을 읽어 본 분들의 소감이 궁금하다. 필자는 법대에서 법철학 시간에 정의에 대해 공부한 바 있고 법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법시험에서도 법철학을 선택과목으로 택해 시험공부를 했으며 이후에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가 샌델 교수의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몇 번 읽어 봤다.
샌델 교수의 책을 읽으면 재미있는 사례들이 쏟아지고 적절히 철학자들의 견해도 정리돼 있어 진도가 잘 나가는 것 같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래서 정의가 무엇이라고 하는 건지 잘 잡히지 않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지도 모를 일이다. 정의와 같이 폭넓고 불확정한 개념을 충분히 시원하게 설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실제로 시대의 대철학자라는 사람들이 내린 정의에 대한 정의를 보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다. 이런 동어반복형의 정의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과연 정의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가능할까. 한스 켈젤은 정의의 여러 원리들을 하나하나 분석해가면서 정의란 ‘아무런 내용도 없으나 동시에 어떠한 내용도 받아들일 수 있는’, ‘동어반복적 개념유희에 불과한’, ‘어떠한 종류의 실질적 원리도 내세울 수 있게 하는’, ‘정반대의 가치판단도 배제하지 않는’, ‘내용이 공허한, 전적으로 무가치한’…. 그야 말로 공허한 형식이라고 비판했다. 이 말을 한 구절 한 구절 분석해보면 켈젠의 섬세한 분석에 웃음 짓게 된다.
샌델 교수의 책을 좀 더 편하게 읽기 위해서는 정의에 대한 논의가 어떤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정의라는 말을 우리는 아주 다양한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의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확정해야 하고 그 차원에서 논해야 한다. 개념이 논의되는 차원을 넘나들게 되면 논쟁도 되지 않고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정의는 적용의 차원에 따라 인간윤리의 보편적 원리 또는 인간의 덕목을 의미하는 주관적 정의(예를 들어 어떤 행위는 옳지 못하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할 때), 사회구성원들이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모든 영역(예를 들면 공동체에 참여할 기회, 공동체의 보존과 유지를 위한 부담)에서 권리와 의무의 올바른 분배나 구현을 목표로 하는 객관적 정의 또는 사회적·정치적 정의,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에 타당한 보편적 덕목, 가치의 정점을 의미하는 최고의 진리로서의 정의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구분을 하고 나면 정의는 도덕적 영역에 있는가, 법적 영역에 있는가, 정의에는 의무만 존재 하는가 요구할 권리도 있는가 등 샌델 교수 책에 나오는 각종 난해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질문의 목적은 아마도 위와 같이 여러 차원의 정의의 개념을 구분해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글에는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정의에 대한 논의들을 필자의 견해에 따라 간단히 정리해 보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