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이회창 1인 체제” 비난하며 탈당한 ‘박근혜 부총재’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25 09:33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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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 조언도 맘에 안 들면 묵묵부답…고집 못 꺾어

“이제 한나라당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는 2002년 2월28일 기자회견을 자청, “이회창(昌) 총재의 ‘1인 지배체제’에 실망했다”며 탈당을 발표했다. ‘박근혜 신당’ 지지율이 25%를 상회했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지만 대선을 10개월 앞둔 마당이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재섭 부총재 등 대구·경북지역 의원 20여 명이 긴급회동을 갖고 탈당 번복을 위해서 노력하기로 했으나 허사였다. 

 

 

상대 설득에 “그리 생각 않아요” 단칼에 일축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희망2002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부총재인 내가 위원장을 맡았다. 건네받은 6인 위원 명단을 받아보니 박 부총재가 빠져 있었다. 곧장 昌에게 잘못임을 알렸다. ‘출마 의사가 있는 박 부총재 본인은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썽 생긴다’고 했더니 昌은 ‘좋은 지적’이라며 포함에 동의했다. 이렇게 출발한 2002특위 간사가 김문수 의원이다. 그런데 박 부총재가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하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론을 못 내고 산회하는 경우가 잦아 나와 김 간사가 애를 태웠다. 특히 박 부총재가 국민선거인단 50%를 주장하면서 파열음이 새나왔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분쟁 조정의 명수. 그가 지난 8월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비롯, 2007년 대선 경선관리위원장 등을 맡게 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2002년 ‘희망특위위원장’ 때는 ‘박근혜 부총재’가 경선 방식에 반발, 탈당했다. 사진은 17대 대선 당시 경선 후보들과 건배하는 박 전 의장


昌은 박 부총재가 사조직 ‘박사모’를 대거 밀어넣어 세를 불리려는 시도로 파악, 반대했다. ‘정당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고 법 해석상으로도 昌의 말이 맞았다. 때문에 나머지 위원 6명이 불가하다고 했음에도 박 부총재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회의가 파장 난 뒤 박 부총재에게 그날 밤 만나자고 제의했다. 

 

박 부총재가 외부인, 특히 남성과 식사하는 것을 꺼리는 사실을 익히 알기에 저녁식사 후 만날 시간·장소를 일임했다. 그가 지정한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17층 와인바에서 대좌했다. 내가 막바로 ‘당신은 1952년생, 나는 1938년생’ 했더니 박 부총재는 ‘왜 그러세요. 갑자기 나이를…’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당신은 3선, 나는 6선’ 하니까 ‘왜 그러세요’다. 나는 직답 대신 ‘당신은 퍼스트레이디 했는데 나도 대통령 비서실장·정치특보로서 청와대 경험이 있소’라고 한마디 더 덧붙인 다음 ‘내가 세상살이를 더한 인생 선배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달라’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는 내 주장만 펴선 안 된다. 남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다들 찬성하는데 혼자만 계속 반대하며 고집을 피우면 곤란하다.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게다. 내일 (안건을) 통과시킬 터이니 그리 알았으면 한다.’ 내 말에 공감하나 싶었는데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박 부총재는 ‘저는 그렇게 생각 않는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음 날 아침 昌에게 전후 과정을 그대로 전했다. 이후 박 부총재는 昌과 만나 본인의 입장을 피력한 뒤 탈당을 결행했다. 사실 박 부총재와 昌이 직접 충돌한 게 아니다. 나와 박 부총재가 부딪친 것이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회고다.

 

박근혜 부총재는 제15대 대선이 한창이던 1997년 12월 사촌오빠 박재홍 전 의원의 소개로 대선후보이던 昌을 만나 8일 뒤 昌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었다. 그리곤 이듬해 4월 昌의 권유로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입후보, 여의도에 입성했는데 5년 만에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昌과 정면대결을 벌인 것. 한나라당을 뛰쳐나간 지 50여 일 만인 4월22일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박근혜 총재’의 행로는 순탄치 못했다. 6월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역·기초 단체장은 단 1명도 못 냈고 광역의원 2명의 당선자를 건지는 졸전에 그쳤다. 창당발기인 38명 가운데 정치인이라곤 (박 총재를 제외하면)전직 의원 1명뿐인 아마추어 정당의 한계였다. 고집불통 박 총재였지만 16대 대선 한 달 전 미래연합을 접고 한나라당에 복귀했다.

 

“나처럼 ‘정치인 박근혜 의원’과 가까운 정치인도 흔치 않을 게다. 둘 다 국회 외무통일위를 떠나지 않았고 ‘박-박’이라 항상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저 장관 거짓말하고 있지요?’ 등등 호기심 많고 성실한 ‘박근혜 의원’은 궁금한 게 있으면 빼놓지 않고 물어왔고 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그랬기에 ‘박 의원’도 내가 허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내가 그의 유머감각을 돕기 위해 신경 쓴 것도 알았다(박 대통령의 썰렁 개그 몇 개는 박관용 의원이 ‘원작자’로 알려져 있다. 박관용 의원은 박근혜 의원이 사투리 등을 이해하기 쉽도록 자세한 설명까지 첨부했다고 한다). 내가 과거 청와대에서 사용하던 추억 어린 전용 식기 세트를 선물하자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말이 통하는 듯했으나 그의 고집은 별개였다.

 

그가 탈당하기 전 일이다. ‘정당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지율이 높다 어떻다 하지만) 막상 나가 보면 다르다. 창당에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고 조언을 줬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또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도 하고, 잘못’이라고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5월 중 평양 방문을 감행했다. 국회의장을 자유 경선할 때 일이다. 나에게 감정이 있는 게 분명한 우리 당 소속 의원 3명의 이탈이 예상됐다. 한 표가 소중할 때라 박근혜 의원에게 지지를 요청했으면 싶었지만 탈당한 그에게 부탁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의미 있는 방북이었습니다’라는 리본을 단 난 화분을 그의 의원사무실에 보냈다(‘의미’에는 반드시 좋다는 게 아닌,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으니까 그의 방북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왜곡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는 비서가, ‘박관용 의원이 꽃을 보내왔다’고 보고하자 ‘저분 참 좋은 분이에요’라고 했다고 한다. 국민선거인단을 둘러싼 의견충돌 뒤 탈당까지 했던 터라 조심스러웠는데 안도가 됐다(박관용 의원은 박근혜 의원과 민주당 J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이 아닌 의원 7명 정도가 자신을 지지해 국회의장이 됐다고 판단한다. 박 의장은 258명의 투표자 가운데 136표를, 민주당 김영배 의원은 112표를 얻음).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겸손을 모두 물려받은 박 의원이 어찌도 그리 고집이 강한지, 한 치도 양보를 않는지 의아스럽다.” 

 

박 전 의장은 박 대통령의 ‘불청(不聽)’ ‘불통(不通)’은 의원 시절에도 엄연하던 원초적인 것이라며 차라리 기대 않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고 딱해 한다.

 

 

다투고 떠났지만 ‘박관용 의장 후보’에 한 표

 

“박근혜 대통령 임기 개시 8개월여 지났을 때다. 청와대 오찬에 초청받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갑자기 ‘박 의장께서 한 말씀 하시라’고 권했다. 24명이나 모인 자리에서 무슨 진지한 얘기가 가능하겠는가.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일어섰다. ‘박 대통령께서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열심히 하시던 일을 정반대로 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일순 긴장이 흘렀다. ‘아버지는 하나만 낳자고 하고, 지금 박 대통령은 많이 낳으라고 한다’고 하자 그제서야 웃음이 터졌다. 그 틈을 이용, 한마디 했다.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다. 대통령이 국민을 다 만날 수 없으니 여야 정당·의회 지도자들을 자주 만나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게 필요하다.’ 사실 이 말을 한 게 잘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날 대통령 좌우엔 김용준 초대 총리지명자와 김성주 적십자사 총재가 앉고 나는 김 지명자 옆에 앉았었다. 내가 김 지명자에게 물었다. ‘청와대에 자주 오느냐’고. 그의 대답은 ‘오늘이 처음’. 다음 날 우연히 만난 김 총재도 같은 대답이었다.” 가장 가까울 만한 이들이 이 정도이니 씨도 안 먹힐 소통(疏通) 주문은 부질없다는 박 전 의장의 말이다.

 

아무튼 박 전 의장은 ‘박근혜 부총재’가 그토록 강조하던 ‘국민 50%’는 ‘여론조사’로 대체해 분란(紛亂)을 막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의원이 탈당했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해야 했다. 며칠 잠을 설치던 중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론조사’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여론조사다. 얼마든지 장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디어를 냈지만 폐지 의견을 내가 낸 것도 그래서다.”

 

한나라당 2002특위 위원장으로서 소임을 다한 박관용 부총재는 7월, 의원들 자유투표를 통해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격동의 2002년

 

야당(한나라당) 출신 박관용 의원이 국회 의사봉을 잡은 2002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다. 김대중(DJ) 대통령의 임기 5년 차이자, 제1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12월19일)된 이 해는 특히 정치사적으로 ‘기념비적’ 사건·사고가 넘쳐났다.

 

DJ는 세 아들들이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가 구속(장남 김홍일 의원만 신병 등이 감안돼 구속을 모면)되는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고 결국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약칭 민주당)에서 탈당(사실상 黜黨(출당), 5월6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년 전 평양을 방문, 북한 김정일과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던 업적도 북한의 6월30일 서해 도발(제2 연평해전)로 완전 퇴색됐다.

 

권위가 실추된 임기 말 대통령은 총리조차 갖지 못했다. 그가 지명한 첫 여성 총리 후보 장상에 이어 장대환 총리지명자도 국회 인준과정에서 낙마했다. 2년 전 16대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된 야당(한나라당, 133석)은 여권을 마구 두들겼다.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로 JP(김종필)마저 떠난 소수 여당은 흠결까지 지닌 총리 후보들을 감싸줄 방도가 없었다. 국정 주도권은 다수당의 총재로서 확실하게 당권을 장악한 이회창(昌) 한나라당 총재 몫이었다.

 

16대 대선 열기가 한창 달아오른 2002년 5월, 북한 김정일 초청으로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 의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박 의원의 방북은 ‘김정일 환대’와 민감한 시기 때문에 관심이 더욱 증폭됐다.


대통령이 흔들리는 가운데서 여당은 돌파구를 찾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민주당은 12월 대선을 목표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대선후보 조기 선출을 통해 일대 국면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이른바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린 국민경선제는 대성공이었다. 당원과 ‘일반 국민’의 의사를 절반씩 반영해 후보를 선출한다는 전대미문의 특이한 방식이 먹혀들었다. 3월9일 제주에서 시작된 경선이 전국 16개 시·도 순회를 마칠 즈음엔 DJ의 실정(失政)이 거의 잊힌 듯했다. 국민경선 도입 전 확실한 1위 이인제는 기세를 계속 더해 가는 ‘군소후보 노무현’에 눌려 사퇴(한화갑·김근태·유종근 3인은 앞서 사퇴)했다. 완주한 후보는 정동영(17대 민주신당 대선후보) 한 명뿐이었다. 경선 초반 노 후보가 한나라당 昌과 양자 대결에서 우세하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특공 기동부대로서 위력을 발휘한 ‘노사모’가 결정적이었다. 4월26일 서울에서의 마지막 경선이 끝나 공식 후보로 결정됐을 당시 노 후보 지지율(조사에 따라선)은 60%까지 나오는 등 昌을 압도했다. 역대 대선후보 최고치다.

 

그러나 노 후보의 기세는 5월 DJ 차남 홍업과 3남 홍걸 비리가 불거지면서 민주당 지지율과 더불어 완전히 꺾였다.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지지율은 반 토막 났고 ‘후보 교체론’이 고개를 들었다. 민주당 터줏대감 격인 최대 계파 중도개혁포럼에선 “양자(養子)를 잘못 들였다”는 자성 속에 파양론(破養論)이 비등했다. 월드컵 바람을 탄 정몽준이 등장한 9월 이후엔 10%대의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

 

민주당의 국민경선 흥행 돌풍에 놀란 한나라당은 4월13일부터 5월9일까지 지방을 순회하는 경선을 실시했으나 흥행 성적은 초라했다. 최병렬·이부영·이상희는 들러리였다. 昌으로 이미 결판 난 경선이, ‘관객이 결과를 다 아는 연극’이 국민적 관심을 끌 리 없었다. 아니 당 총재 昌은 경선 전부터 ‘대선후보’였다. 昌은 1997년 대선 패배 후 ‘세풍’ ‘총풍’ 때문에 DJ로부터 시달림을 받았고 소속 의원 40여 명이 여당으로 둥지를 옮기는 등의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총선에서 승리, 재기 발판을 다졌다. 당 내부적으론 오세훈(후일 서울시장) 등 ‘젊은 피’를 수혈, 상도동계 등 당내 기득권 세력을 평정했다. ‘대통령 재수(再修)’에 나선 昌과 그나마 맞선 인사가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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