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6. 속아서 온 기지촌 여공의 젊음이 꺼져갔다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8.30 15:41
  • 호수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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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위안부’ 김숙자 피해자의 증언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함민복, 《달의 눈물》 

 

1971년 촬영된 서울 금호동 ⓒ연합뉴스


서울 금호동 산동네에는 경사진 언덕을 따라 낡고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40년 전, 김숙자씨(가명·57)는 고된 하루를 마치고 이 비탈길을 걸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9살 때 서울로 이사 온 숙자씨. 금호동 산동네에 살던 그녀는 10대 초반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어린 시절은 힘들게 보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굶을 때도 많고. 그때는 굉장히 어려웠으니까, 집안 사정이. 옛날에 금호동 산동네 하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못사는 동네야.” 

어린 여공 숙자씨는 고된 노동을 했지만 자주 월급을 떼였다.

 

“그때 한양대 쪽에 공장이 있었어. 거기서 주물로 냄비 만들고 하는 그런 것들 했었어. 일했는데 월급 안 줘서 사장님 집에도 찾아갔어.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결국 (밀린 월급을)안 주더라고. 공장을 많이 다녔는데 월급을 제대로 받고 다녀본 적이 없어.”

1970년대, 빈곤층 여성들은 미성년자 때부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임금체불도 잦았다. ⓒ연합뉴스


숙자씨가 월급을 받지 못한 채 일자리를 잃은 것은 17세 내지 18세 때다. 다시 일해야 했다. 마침 구인광고를 봤다. ‘숙식제공’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책자에서 숙식제공을(‘식제공’이라 적힌 광고물을) 보게 됐어. 일단 가서 일하려면 숙식제공이 돼야 하잖아. 오라 해서 갔더니 직업소개소였던 거야. 거기서 소개했는데 속아서 기지촌에 들어오게 된 거지.”

숙자씨는 경기도 의정부의 기지촌에 도착해서야 속은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포주가 고용한 사람은 숙자씨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늘 감시했다. 그녀는 먼저 온 여성들이 도망치려다 매 맞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저녁에 미군을 받는지 몰랐지. 화장을 막 시켜줘서 나갔는데 클럽이더라고 거기가. 미군이 들어오니까 너무 무섭잖아. 그때는 외국사람 잘 보지도 못했을 시대야. 굉장히 무섭고 위축되고….”

의정부 고산동 기지촌의 한 클럽 ⓒ두레방


속아서 오게 된 기지촌에서 두려운 마음을 안고 며칠을 보냈다. 그때 누군가가 약을 주며 먹어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 뒤부터 그 약이 있어야만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게 됐다. 그때만 해도 그 약이 중독성이 있는 줄 몰랐다. 약의 정체는 향정신성 약물인 옥타리돈, ‘유사마약’이었다. 

 

“그때는 약국에서 100알, 200알을 아무 제한 없이 살 수 있었어. 포주가 (약을) 권하는 경우도 많았어.…(중략) 기지촌 여성 90~100%가 마약에 노출돼. 빚을 갚을 수 없는 구조가 되는 거야.”

빚은 그녀를 기지촌에 더 단단히 묶어뒀다. 아무리 일해도 빚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포주가 숙자씨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빚에도 높은 이자를 물렸기 때문이다. 특히 숙자씨는 동생 학자금을 포주에게 가불한 뒤부터 더 빚에 허덕였다. 

 

“100만원이 빚이면 월에 10만원씩(이자를) 받아. 돈이 부족하니까 또 갖다 쓰게 되고. 자기네 계산법으로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야. 어릴 때니까, 나는 계산할 줄도 몰랐어.”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숙자씨는 경찰과 포주가 유착됐다고 기억했다. 포주는 ‘매일 돈통을 방에다 쏟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경찰은 이를 지켜만 봤다. 기지촌 여성이 신고하면 경찰은 포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과거 기지촌 모습.(숙자씨와 무관) ⓒ햇살복지회


빚 외에 기지촌 여성들을 힘들게 한 건 또 있었다.

 

“난 미군한테 해를 당하거나 그런 적은 없지. 그런데 주변에 진짜 처참하게 당한 사람이 많이 있어. 새벽에 칼 들고 와서 강간하는 경우도 있었지. 돈 내고 하기 싫으니까. 옛날엔 집들이 다 허술했어. 여기도 시골집들이라.”

‘범죄’ 이야기에 숙자씨는 한 사건을 떠올렸다. 

 

“이 동네 기지촌 여성이 한 명 없어졌어. 미군하고 결혼한 여자인데. 동네 사람들하고 아가씨들하고 다 찾으러 갔어. 결국 산에서 시체를 찾았어. 남편(주한미군)이 (부인을)산에 데려가서 죽인 거야.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 유모가 그때 남편(미군)이 피 묻은 옷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걸 본 거야. 그 미군은 소파(SOFA)협정 때문에 우리 경찰에서 (수사)못하고 미국 법정에 섰어. 유모(목격자)는 증인으로 가서 법정에서 아내를 죽인 미군하고 마주쳤대. 유모가 미군한테 ‘니네 애기는 어떻게 해’ 하니까 그 미군이 xx욕하면서 가버리더래. 그 미군은 어떻게 처벌받았는지 모르겠어. 애기는 입양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당시 이 사건을 다룬 기사는 한 줄도 없었다.

 

1980년대 후반, 숙자씨는 일한 지 약 10년이 지나서야 기지촌을 빠져나왔다. 몰래 도망쳤다. 기지촌 생활은 그녀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먹던 약을 끊으니 후유증이 왔다. 몸무게가 38kg까지 줄었다. 6년간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금단 증상과 약물 부작용은 아직도 숙자씨를 괴롭힌다. 현재도 허리 통증 탓에 앉아서 잘 때가 많다. 

 

기지촌 삶의 후유증은 몸을 상하게 한 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더 고통스러운 게 있다. 세간의 시선이다. 숙자씨는 2014년 처음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배상청구소송을 낸다고 했을 때 부정적 입장이었다. 기지촌 여성을 보는 시선이 따가울 것을 걱정했다.  

 

“니들이 좋아서 기지촌에 간 거 아니냐. 이런 얘기 분명 나올 거라 생각했단 말이야. 사실은 그게 아닌데….”

숙자씨는 소송 과정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소송을 통해 진실을 알렸으면 했다. 세상이 기지촌 여성을 보는 오해를 바로잡고 싶어 한다.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기자회견. ⓒ연합뉴스

취재진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기지촌 여성을 어떻게 생각해 줬으면 할까. 

 

“우리는 괴물이 아니고…똑같은 대한민국 국민….”

40년 전 월급을 떼인 채 금호동 비탈길을 걷던 어린 여공, 숙자씨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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