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마약 왕국’“경찰이 마약 판다”
  • 구민주 인턴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6 10:24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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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국민 10% 마약과 연관”…자수한 마약 용의자만 70만 명

마약 범죄의 소굴인 필리핀. 지금 제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취임한 지 갓 두 달이 지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 척결 의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자수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는 그의 엄포로 지금까지 70만 명에 달하는 마약 범죄자와 판매원이 스스로 경찰서를 찾았다. 엄포를 거부한 용의자 2000여 명은 재판 없이 즉각 사살됐다.

 

가차 없는 전쟁 분위기에 필리핀 거리 곳곳에는 경찰에 사살된 시신들이 매일 밤 나뒹굴고 있다. 대통령의 이런 핏빛 전쟁에 종교계와 인권단체 등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나오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그를 향해 90% 이상의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번쯤 치러야 할 전쟁이다.” 두테르테를 지지하는 이유다.

 

90% 지지의 밑바닥에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다. 필리핀에서 마약이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한 공감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현재 필리핀에 300만 명의 마약 중독자와 최소 3만 명의 밀매업자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속의 손길을 벗어난 부분을 감안하면 약 1억700만  필리핀 국민 중 10%가 마약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만큼 마약이 국민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는 얘기다. 한 해 필리핀 내에서 거래되는 마약 총액은 최대 5000억 페소(필리핀 화폐 단위), 한화 약 1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필리핀 정부 총예산의 4분의 1 수준이다.

 

800명 수용 규모로 지어진 필리핀 케손시티 감옥에 약 3800명이 수감돼 있다. 두테르테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 후 필리핀 교도소는 유례없는 포화상태를 겪고 있다. © AFP 연합


저렴하고 대중적인 ‘샤부(Shabu)’ 애용

 

마약의 유입 정도는 필리핀 내에서도 지역마다 다르다. 필리핀 국립경찰청(PNP)에 따르면, 전국 4만2000여 개의 바랑가이(필리핀의 마을 단위) 중 30% 정도에 마약이 침투하고 있다. 여기서 침투란 마약 복용자나 제조자, 밀매업자 등이 해당 마을 내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수도이자 관광객이 가장 많은 마닐라는 무려 92%가 마약 영향권으로 지정됐다. 마닐라는 마약 용의자가 가장 많이 사살된 곳이다.

 

나라 밖에서도 필리핀인의 마약 밀매는 활발하다. 조사가 시작된 1993년에 단 2명이었던 해외 수감자는 현재 710여 명으로 늘었다. 위험부담이 큰데도 수많은 필리핀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약 밀매의 덫에 빠지고 있다.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보니 다른 국가에서 마약 환적(換積)지점으로 삼기에 용이하다는 점도 필리핀이 마약을 쉽게 떨칠 수 없는 이유다.

필리핀에서 거래되는 대표적인 마약류는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는 ‘샤부(Shabu)’다. 메스암페타민인 필로폰을 뜻하는 현지 용어인데, 필리핀 전역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유엔마약범죄국(UNODC)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샤부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나라다. 공원이나 바, 길거리 코너마다 널리 퍼져 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간 필리핀에서 압수된 샤부의 양은 10톤을 훌쩍 넘는다. 2014년 한 해 동안 필리핀 경찰이 압수한 마약의 89%가 샤부였다. 마리화나와 코카인이 그 뒤를 이었다. 인구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가톨릭 주교회의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큰데, 여기서 지난해 샤부를 우려하는 교서를 배부할 정도였다. 올해 초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국제마약통제전략보고서에서도 필리핀 내 마약 문제가 줄어들지 않는 가장 큰 주범으로 샤부를 지목했다.

 

샤부가 좀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저렴한 매매 가격 때문이다. 현지에서 1g당 1000페소,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바로 구입할 수 있으며, 그마저도 2012년 이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가난한 자의 코카인’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싸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공급과 운반도 현지 택시기사나 마을 청년 등 서민들이 맡는다. 그만큼 확산이 빠르고 깊을 수밖에 없다. 현지에서 10년간 유학생활을 한 김유리씨(가명·28)는 “학교 뒤에서 학생들끼리 거리낌 없이 샤부를 말아 피우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그럼에도 국가에서 마약예방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성년자도 마약의 유혹에서 예외일 수 없다. 마닐라 경찰에 따르면, 현지 청소년 10명 중 9명이 마약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주요 이용 연령은 16세부터 64세까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수입이 없는 학생들은 밀매업자가 원하는 최적의 일꾼이다. 그래서 학교마다 마약 밀매업자들이 은밀하게 침투해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게 현지 경찰의 얘기다. 지난 5월에는 시내의 한 콘서트장에서 판매하던 마약을 복용한 10대 소녀 5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마약을 구입한 학생 중에는 12살짜리도 있었다.

 

 

청소년 10명 중 9명 마약 영향 받아

 

그간 국내외에서 숱한 마약 범죄가 발생했지만 필리핀이 마약 국가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는 이유는 경찰·공무원 등 파수꾼들이 오히려 깊이 연루돼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마약단속청(PDEA)은 현지 경찰들이 부업으로 샤부 등의 마약을 헐값에 판매한다고 밝혔다. 마약단속청 관계자는 “경찰 등 법 집행자들이 가장 거대한 마약 밀매자”라며 “이들과 접촉해 마약을 얻으면 큰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9월초, 마약 밀매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되는 판사·경찰·의원 등 150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감시 대상에 올라 있는 300명을 계속 수사하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마약 유통경로의 출발점부터 제대로 뿌리 뽑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필리핀 당국은 ‘마약 통제를 위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마약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마약 생산과 유통을 사전에 막을 방법을 모색하고, 연루자를 처벌하는 법을 명시하는 등 그동안 없던 체계를 다져놓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마약 문제 해결은 단순히 국가 안보와 공공위생 차원을 넘어 사회·경제·국민안정 등 필리핀 전체를 위해 이제라도 해야 할 임무라는 게 필리핀 정부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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