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아집·독선 vs 소신·용기’ ‘마구잡이 vs 솔직·담백’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8 20:02
  • 호수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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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 전 국회의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필요한 도발이 사태 키워”

참여정부 시절, 아무래도 ‘반(反) 노무현’이 절대적이던 우리나라 골프장에는 금기(禁忌)가 있었다. ‘노무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벌타(罰打)를 먹는 ‘한국형(型)’ 규칙이다. 이유는 동반자의 기분을 잡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건평 동생’이라는 말로 대신하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렇듯 보수 기득권층에는 노 전 대통령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이들이 널렸다. 많은 비판자들이 노 전 대통령을 희화화(??化)할 때 원용하는 것은 그의 말투와 화법이었다. 

 

반면 노사모를 비롯, 다수의 지지자가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서다. 아니 마력(魔力)이란 표현이 훨씬 적확할 만큼 열광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자기주장을 고수하는 강기(剛氣)에 더해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화법도 추종자를 늘리는 동력이었다. 반대쪽이 비난하는 아집(我執)과 독선은 이들에게 소신과 용기였고, 품격 없는 마구잡이 말투는 솔직?담백이었다. 대선전이 한창일 때 그는 아킬레스건(腱)이라고 할 장인의 부역(附逆) 논란을 “그렇다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는 한마디로 잠재웠었다. 국민들, 특히 여성들의 정서를 파고든 이 하나로 색깔론 전체를 퇴색시켰다. 계량은 어렵지만 ‘노풍연가(盧風戀歌)’가 득표에 큰 도움이 됐다는 데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필자가 그의 순발력 넘치는 재기를 가까이서 확인한 비화 한 가지-. 2002년 월드컵 열풍에 힘입어 정몽준 의원이 급부상하고 ‘노 후보’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던 9월, 어느 상가(喪家)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했다. 필자가 서먹해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나누라고 권했다. 정 의원이 “열심히 하시더군요”라고 운을 떼자 노 후보는 “열심히 끌어모았는데 정 후보 바람이 한꺼번에 쓸어갔습니다”며 웃음으로 응수, 어색한 분위기를 씻어냈다. 노 후보가 돌아간 뒤 정 의원은 필자에게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는데 훗날 정 의원은 “첫 대면에서의 호의적 감정도 ‘후보단일화’ 합의에 적잖이 기여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청와대와 야당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2004년 1월8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칠레 FTA 비준안 처리 등을 당부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 의장실에서 박관용 의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4당 대표를 만났다. 대통령 왼쪽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 등 청와대 고위 참모들이 배석했다. © 국회사진기자단


박관용 “최소한의 금도는 지켰어야”

 

김종필(JP) 전 총리 등이 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대목의 하나도 거침없는 입담과 대중을 싸안는 열변이다. JP는 노 대통령 취임 후 2개월 즈음의 4당 대표와 골프회동 당시를 가끔 떠올린다. 그는 “라운드 후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대행)가 ‘오늘 싸움하러 왔다’고 작심한 듯 포문을 열자 노 대통령은 ‘겨누기만 하고 쏘지는 마시라’며 넌지시 받아넘겼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에는 순진한 맛이 담겼고, 이날 대북송금특검법 개정도 타결됐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반칙과 특권, 기득권이 승리하고 정의가 패배한 역사(3·1절 기념사)”라고 규정하는 역사인식과 국가관은 문제였다면서 2003년 12월 대통령 초청으로 4당 대표가 청와대 회동을 가졌을 때는 이런 것들이 엉켜 감정적으로 부딪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회동 뒤 정치가 더 경색되면서 탄핵정국으로 치달았다는 것. 소신과 솔직함이 밴 화술은 대단한 강점이었으나 ‘문제 있는’ 역사·국가관과 함께 분출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는 지적이다. 물러설 줄 모르는 이의 왜곡된 주관은 더 위험하다는 말이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회고는 신랄(辛辣)하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3개월 되던 (2003년) 5월, 미국을 방문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친미적(親美的) 모습을 보였다. 그의 방미 전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 정치 지도자들은 그가 선거전 때 ‘반미(反美) 좀 하면 어떠냐’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체니 부통령이나 하원의장은 노 대통령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 요청을 들은 척도 안 했는데 실제 방문 때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적이 안도했다. ‘53년 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는 등의 발언은 우려들을 불식시켰었다. 나는 귀국한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잘하고 오셨다’고 인사했다. 그런데 자신의 지지층인 좌파 진영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말을 바꿨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선 ‘(방미 중) 조금 오버했다. 안 했으면 하는 말도 없지 않다’고 했다. 일국의 대통령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가 주관이 없고 상황에 따라 가볍게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한나라당은 ‘대통령을 도둑맞았다’며 분개하고 있다. 이회창 총재 아들 병역 의혹과 20만 달러 수수(이를 터뜨린 설훈 의원은 나중에 허위사실 유포로 유죄판결) 등 상대의 흑색선전으로 다 이긴 선거에서 졌다며 가슴을 친다. (새천년)민주당은 입양(入養)시켜서 대통령 만들었더니 딴살림 차렸다고 길길이 뛰었다. 게다가 터줏대감 격인 호남 중진들을 부패분자들로 매도하고 선거 빚 44억원까지 덤터기 씌웠으니 그 속이 어떨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터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게 당연하다. 개혁 명분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도를 넘었다. 아무리 정치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를 헤아리는 최소한의 금도(襟度)는 있어야 했다.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상대 세력이 절대 다수였으니 강약·완급 조절이 필수였다. 총선이 임박해 마음이 다급하더라도 그렇다. 한데 야당을 다독이는 시늉은커녕, 내놓고 신당(열린우리당) 지원을 넘어 거듭된 선관위 경고까지 무시하니 사달이 안 나려야 안 날 수 없게 됐다.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 돕는 꼴’ 발언도 그렇다. 차기 총선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떠나는 비서관·행정관 9명과의 비공개 오찬이라면 차라리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든지…. 일반 정치인이 아닌 대통령 발언으로는 걸맞지 않았다. 시비 상황을 자초했다. 수도권 등지에서의 ‘열린-민주’ 경합을 의식한 것이라 하더라도 민주로서는 펄쩍 뛸 만했고, 곁들인 ‘한나라당은 타이태닉호와 비슷’은 한나라당의 골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가 ‘배신을 넘어 대결과 반목을 조장’, 한나라당이 ‘대통령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작태’라며 핏발 선 비난을 가할 법했다(이 비공개 발언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관련, 우연한 누출이 아니라 호남과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을 겨냥한 전략적 발언이라는 관측이 많다). ‘새 정치세력(열린당)과 낡고 부패한 정치세력(한나라당)의 양강(兩强) 대결에서 ‘호남자민련(즉 민주당)’을 표방하는 지역주의 세력은 선택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대통령 발언 직후의 열린당 논평도 그런 방증으로 제시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총선 관련 발언을 보도한 당시 TV 화면. 위는 2004년 2월24일자 방송기자클럽 연설 내용 자막이 실린 노컷V, 아래는 SBS의 3월4일 선관위 결정 관련 보도 © 노컷뉴스 화면캡처·유튜브 화면캡처


조순형 대표, ‘탄핵’ 두 글자 정식 거론

 

2004년 새해는 의례적인 덕담(德談)조차 실종된 가운데 시작됐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 전쟁판에는 비수(匕首)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살기(殺氣)만 그득 찼다.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것이므로 탄핵 사유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해 둔다(1월5일)”고 천명하면서 ‘탄핵(彈劾)’이란 두 글자가 정식으로 등장했다. 한 달 뒤에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국회 대표연설을 통해 “탄핵을 포함한 모든 조치 검토”를 선언했다. 홍사덕 한나라·유용태 민주당 원내총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김학원 자민련 총무는 조정자 역할을 자임한 JP 총재 때문에 한발 비켜선 모양새였는데 자민련 소속의원들의 탄핵 의지는 다른 야당에 비해 확실히 미적지근했다.

 

민주당의 대(對)열린당 최전방 공격수인 김경재 의원은 1월말 “동원그룹이 노무현 대선캠프에 50억원을 건넸다”고 국회 법사위에서 폭로했다. 노 대통령은 대선 불법자금 시비가 일자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50억원이 추가되면 10분의1을 훌쩍 넘는 게 되는 심각한 사태였다(검찰수사 결과 한나라당은 823억, 노 대통령 캠프는 113억원으로 드러남). 동원그룹의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 제기로 총선  한 달 뒤 30억원 배상 판결을 받고 구속되기도 했던 김 의원은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면서 “증거 없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했지만 실은 같은 당 최명헌 의원이 가져온 문건을 폭로한 것”이라고 했다(최 의원은 50억원 파문이 커지자 골프를 친다며 필리핀으로 도피했고, 때문에 당 청년당원 8명이 체포조가 돼 필리핀으로 몰려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를 피해 몰래 귀국, 여동생 집에 은신했던 최 의원은 정부의 칼날이 부담스러워 피했었노라고 사과했었다는 김 의원의 전언. 김 의원은 11일간 구속으로 30억원을 탕감한 게 괜한 것이겠냐고 반문한다).

여야라는 두 열차는 탄핵이라는 지점을 향해 본격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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