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초강경 이민 정책, “집토끼만 잘 관리해도 승리한다”
  • 김원식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9 09:30
  • 호수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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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중산층·노동자층 집중 공략

지난 9월1일(현지 시각) 오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캠프의 선거 대책 회의에 트럼프가 참석하자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힘찬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서로 말만 안 했을 뿐, “역시 트럼프다”라는 찬사의 목소리에 모두 다 동의하는 박수였다. 왜 그랬을까? 바로 전날(8월31일) 트럼프는 또다시 자신의 초강경 이미지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의 전략이 나름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전날 자신의 이민 정책 발표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멕시코를 전격 방문해 엔리케 페냐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 그가 회담을 가진 직후, 언론은 트럼프가 다소 완화된 이민 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예상을 또 뒤집었다. 

 

그는 애리조나주(州) 피닉스에서 한 이민 정책 연설을 통해 “미국에 사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더는 사면은 없을 것”이라면서 “대통령이 된 첫날 범죄를 저지른 불법 이민자들을 쫓아내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라며 초강경 이민 정책을 그대로 발표했다. 본선에서의 표를 의식해 히스패닉계와 소수계를 끌어안는 차원에서 이민 정책의 일부 완화를 검토했으나, 지지자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이 엇갈리며 논란만 거세지자 다시 초강경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그제야 트럼프에 비판적인 언론들은 트럼프가 멕시코를 방문하는 등 마치 이민 정책을 다소 완화할 것이라는 인상을 풍긴 것은 하나의 ‘책략’이었을 뿐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소 완화된 이민 정책을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히스패닉계 트럼프 지지 단체의 대표자들도 하나씩 트럼프 지지를 철회하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오른쪽)가 8월31일(현지 시각) 멕시코를 전격 방문, 엔리케 페냐 멕시코 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 연합

 

 

 

트럼프 ‘나만의 계산’ 고집…“올 표는 온다”

 

그러나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로 귀결됐다. 이날 하루에만 트럼프 캠프에는 하루 모금 최고 금액인 500만 달러(약 56억원) 이상의 선거자금이 모였다. 또 10% 이상 차이가 나던 민주당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의 격차를 박빙 수준까지 줄였다는 여론조사가 여기저기서 발표됐다. 결집 표만 노리는 선명한 초강경 전략이 그대로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증명한 하루였다. 결국, 트럼프 캠프 내부에서도 “초강경의 강력한 이미지와 리더십을 보여줘야 오히려 부동층(浮動層)의 표를 더 끌어올 수 있다”는 강경파의 주장이 대세를 장악했다. 이는 트럼프의 기존 성향과 맞물리면서 이날 트럼프 캠프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분위기에 한껏 취한 이유였다. 

 

트럼프의 초강경 이민 정책 발표에 따른 이날의 결과는 앞으로도 트럼프 진영이 민주당 지지 성향이 높은 흑인 계층이나 히스패닉 등 소수 계층보다는 자신의 핵심 지지 기반인 백인 중산층이나 노동자층의 표만 집중 공략하겠다는 전략을 더욱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돌아오지 않을 ‘산토끼’를 잡는 것보다는 있는 ‘집토끼’를 확실히 잡겠다는 전략이다. 

 

도대체 트럼프의 이 같은 계산은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백인 다음으로 인구비중이 높은 히스패닉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5541만 명(전체 인구의 17.4%)에 달해 이번 대선의 캐스팅보트를 쥘 가능성이 크다. 공화당도 2012년 대선 패배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새로운 이민 정책을 만들지 않는다면, 급증하는 히스패닉계의 표를 잡지 못하고 또 패배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현재 히스패닉 유권자는 약 20%만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어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미트 롬니의 지지율 27%보다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만의 계산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히스패닉계 등 소수계가 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낮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경합주 져도 승리 가능” 트럼프의 자신감

 

이에 관해 미 공화당의 한 관계자는 “불법 이민자는 미국 시민이 아니라서 투표권 자체가 없다”며 “투표권을 가진 히스패닉계는 나름대로 어렵게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인데, 이들이 모두 불법 이민의 합법화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고 귀띔했다. 트럼프의 초강경 이민 정책이 실제로 투표하는 히스패닉 등 소수계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반감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 공화당 대선후보들은 외연 확장 등을 이유로 히스패닉이나 소수 계층에 힘을 쏟았지만, 결과적으로 올 표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판단이다. 즉 민주당 지지 성향 계층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그동안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았던 백인 지지층에 더 집중해서 그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겠다는 전략이다. 

 

트럼프 진영의 이러한 판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는 분위기다. 트럼프 캠프의 선거대책본부장인 켈리엔 콘웨이는 9월4일 방송 인터뷰에서 이른바 경합주(Swing State)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대선 승리가 ‘당연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쇠락한 공업지대를 뜻하는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불리는 이 지역은 백인 노동자층이 주류를 이루지만, 아직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가 힐러리에 8%포인트 가까이 뒤처진 지역이다. 하지만 콘웨이는 “이기기 위한 여러 다른 길이 있다”며 선거인단이 20명이나 걸린 펜실베이니아에서 선전(善戰)하지 못하더라도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한 지역에서는 다소 힐러리에 뒤처질지 모르나, 시간이 지날수록 백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트럼프 지지표는 더욱 결집될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미국 대선의 판세는 이른바 ‘컨벤션 효과(Convention Effect)’를 보인다는 양당의 전당대회 이후 또 트럼프의 막말 파동이 겹치면서 한때 힐러리가 10%포인트 이상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스캔들이 잇따라 다시 터지면서 힐러리의 지지율은 감소했다. 이 사이에 트럼프는 멕시코 대통령 회동과 초강경 이민 공약 발표 등 굵직한 이벤트를 선보이며 점수를 만회했다. 특히 트럼프가 강경한 이민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양측 간의 대립 전선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평가다. 더구나 초강경 이민 정책 발표에서 드러났듯, 트럼프는 ‘나만의 길을 간다’며 강공 일변도로 나올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따라서 오는 9월26일 열리는 양자 간의 첫 대선후보 TV토론회가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올 표는 온다”는 트럼프의 도박이 성공할지 여부가 미 대선판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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