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에 숨겨진 ‘유령 작곡가’들의 눈물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6.09.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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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프로그램 음악에 작곡가 아닌 회사 대표 이름 붙이고 노동력 착취해…공정위에 2차 신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는 작곡가가 만든 창작곡이나 기존 곡들이 배경음악으로 들어간다. 방송이 끝나고 나서 흐르는 자막에는 창작 음악을 만든 작곡가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5년 동안 로이엔터테인먼트에서 작곡가로 일한 김인영(35)씨의 이름은 프로그램 자막에 나온적이 없다. 자막에는 김씨가 아닌 로이엔터테인먼트 회사 대표의 이름이 들어갔다. 이렇게 음악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작곡가들은 자신을 ‘유령 작곡가’라고 칭했다. 인기 프로그램의 그림자 뒤에 가려져 음악을 쓰는 유령 작곡가라고.

 

로이엔터테인먼트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송곳》, 《프로듀사》와 예능 《삼시세끼》, 영화 《조선명탐정2》 등의 음악을 제작한 유명 방송∙영화 음악 제작사다. 로이엔터테인먼트 피해자모임인 '로이대응모임'에 따르면 이 회사의 작곡가들은 월 8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매월 20곡 가량의 곡을 만들어야 했다. 김씨는 로이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저작권 침해를 일삼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작권 계약에서 김씨의 몫은 점점 줄어들었고, 한 곡당 평균 보수는 1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회사가 작곡가들의 노동력을 착취했고, 불공정 계약을 강제로 맺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불공정 계약을 거부하자 돌아온 결과는 ‘계약 해지’였다. 계약이 해지된 작곡가들 중 일부는 현재 독립영화 쪽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김씨는 “저와 제 팀은 직장을 잃고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고통을 받았다”며 “이 문제는 작곡가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문화계의 고질적 관행이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 힘없는 창작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로이엔터테인먼트 대응모임은 광화문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로이엔터테인먼트를 고소했다. 사진은 대응모임이 만든 피켓 중 하나.


계약이 해지됐지만 작곡가들이 만든 음악은 방송에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다. 작곡가들이 만든 음악을 발매한 라이브러리 CD를 구매해 프로그램에서 사용한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자 자막에는 로이엔터테인먼트 이사의 이름이 들어갔다. 음악 CD 회수를 요청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이 해당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방송사인 JTBC와 tvN측에 공문을 보내 음악을 사용하지 않도록 감시해달라고도 요청했지만 계속된 관행은 걸러지지 않았다. 예술인소셜유니온에 따르면 유일하게 작곡가들의 이름이 자막에 들어간 것은 영화 《조선명탐정2》뿐이었다. 이마저도 작곡가들이 건의한 것을 제작사인 청년필름에서 받아들여 이루어졌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장지연 정책위원은 “대표 이름으로 (자막이) 나가다가 작년부터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자 이후에는 이사 이름으로 나간 것”이라며 “단일 프로그램마다 제작하는 팀이 다르고, 제작팀들도 (음악이 이렇게 사용되는) 사안을 모두 아는 것이 아니다보니 모니터링을 하기 쉽지 않다. 시청자들이 직접 방송을 보다가 음악을 듣고 자막을 캡쳐해 보내주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런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문화예술단체와 시민단체, 법률단체가 공동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지난 3월 광화문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로이엔터테인먼트를 고소∙고발했다. 단체들은 “로이엔터테인먼트소속 작곡가들은 부당한 계약 탓에 자신이 생산한 음악을 회사명 또는 대표 이름을 달고 방송에 공급할 수밖에 없었다”며 “소속사 측이 계약 당시 ‘저작권과 저작인격권을 회사가 영구히 행사한다’는 계약서를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또 “작곡가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쿵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며 비난의 화살을 피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예술인소셜유니온 장지연 정책위원은 “쿵엔터테인먼트는 로이엔터테인먼트 전에 시작한 사업자명이다. 로이엔터테인먼트를 만든 이후 쿵엔터테인먼트를 없애지 않고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으로 표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9월23일, 이들은 로이엔터테인먼트를 공정거래위원회에 다시 신고해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불공정 행위에 대한 공정위의 적극적인 조사와 처벌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는 로이엔터테인먼트 피해자들을 비롯해 문화창작자의 권리 찾기에 적극 개입해 온 손아람 작가, 공정위 2차 신고 당사자인 예술인소셜유니온 사무처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강신하 변호사 등이 참석했다. 공정위 신고는 두 가지로 이뤄졌다. 로이엔터테인먼트와 피해자 간의 계약서가 약관 규제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것, 로이엔터테인먼트가 거래상 지위를 남용해 불공정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작곡가들의 이름 대신 회사 임원 이름이 표기된 자막 (로이엔터테인먼트 대응모임 페이스북 갈무리)


국정감사에서 로이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증인으로 채택해 문화예술계 불공정행위를 쟁점화 할 계획도 갖고 있다. 예술인소셜유니온 하장호 사무처장은 “지난 해 가을에 처음 로이엔터테인먼트 소속 작곡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재밌게 지켜보고 열광했던 《응답하라》시리즈의 그림자 뒤에서 작곡가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지를 보며 깜짝 놀랐다”며 “작곡가 뿐 아니라 문화예술계에 횡행하는 이런 행위들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현행법도 작곡가들을 비롯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처우를 제대로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유명한 예술인들도 정상 창작 활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신하 변호사는 “최영미 작가와 같은 유명 작가도 주민센터에서 생계보조비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며 “현행 예술인 복지법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법인데, 이들에 대한 불공정 행위를 하더라도 처벌이 미약하다. 창작자들이 제대로 활동을 해야 한류 문화도 확산될 수 있다. 지금은 저작권을 양도를 받아 저작자인 것처럼 (작품을) 판매하는 등 유통 질서도 어지러워져 있다”며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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