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대구’, ‘참외는 성주’ 공식은 이제 옛말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9.27 16:13
  • 호수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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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 사라진 지역 특산물…지자체 과열 경쟁이 한몫

일제강점기인 1933년, 열아홉의 나이로 충남 천안에 갓 시집을 갔던 심복순씨는 남편과 함께 병과를 만들게 됐다. 빵틀에 밀가루 반죽과 호두·팥 앙금을 넣어서 구운 호두과자였다. 천안역 앞에 낸 조그만 가게는 호두과자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철도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기차를 타는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유용한 간식이었다. 천안의 특산물 호두과자는 이제 전국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흔히 어떤 지방에서 특별하게 생산되는 물건을 특산물이라 한다. 기온이나 일교차, 지리적 특성 덕택에 해당 지역에서만 재배되거나 특별한 맛을 지녀 사람들의 손길이 이어진다. 비가 적게 오고, 일조량이 많은 덕분에 ‘대구 하면 사과’를 떠올리게 됐다. 길게 뻗은 낙동강 덕분에 습한 땅을 가진 성주는 농가의 절반 이상이 참외를 재배하고 있다.

 

하지만 특산물은 더 이상 특별함을 잃었다. 대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사과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20여 곳에서 특산물로 내세우고 있다. 참외 또한 품종을 개량해 다른 지역에서 성주 참외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기후 변화로 특산물의 경계가 모호해진 데다 각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특산물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각 지역마다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특산물은 더 이상 특별함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사과를 특산물로 내세우는 지역만 20여 곳, 포도 축제를 여는 지역은 15곳에 달한다. © 시사저널 임준선


특산물 사과인 지역만 20여 곳

 

추석 차례상의 필수품이자 가을 제철 과일의 으뜸으로 꼽히는 사과. 아삭함과 담백함을 뽐내는 아오리 사과에서부터 추석 특수용으로 꼽히는 부사까지 품종만 10여 개가 넘는다. 늦봄 사과꽃이 지고 한여름 무더위를 거치고 나면 새빨간 사과가 열린다. 한때 대구사과가 가장 유명했지만 기후 변화로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그 지위를 상실했다. 이후 충북 충주, 충남 예산 등에 과수원이 대거 생겨나면서 대구사과의 명맥을 이어가려 했으나 이조차도 잠시였다.

 

현재 특산물로 사과를 내세우는 지역만 전국 20여 곳에 이른다. 경북 지역에서만 문경·영주·청송 등 5곳이다. 기초자치단체가 226개임을 감안하면 10% 가까이 특산물로 사과를 꼽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 지역적 특색에 맞춰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특산물’이 ‘흔산물’(흔하게 생산되는 물건)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비단 사과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을 햇살을 머금어 붉은빛을 띠는 고추도 마찬가지다. 충남 청양, 충북 음성·괴산, 전북 고창·진안, 경북 영양 등 10여 곳에서 고추를 특산물로 내세운다. 고추 재배에 나선 농가만 전국 31만5000여 가구에 이른다. 특산물로 내세운 지역에서조차 중국산 고추에 밀려 정부에서 사들이고 있지만, 비축량이 점점 쌓여만 가고 있다. 특산물이란 이름이 무색해진 상황이다.

 

충남 금산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인삼도 특별함을 상실했다. 경북 영주, 경기 파주, 충북 음성·증평 등에서 인삼 축제를 열며 자기 고장 특산물이라고 자랑하고 나섰다. 홍삼 전매제가 폐지되고 가공업체가 저년근 홍삼을 가공해 국내 업체끼리 경쟁하면서 품질 및 가격 차별성이 사라졌다.

 

때문에 전국 특산물이 관광지 기념품처럼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국 어느 관광지를 가나 파는 기념품은 똑같기 때문이다. 설악산·제주도는 물론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 판매하는 관광지 기념품이 모두 똑같다는 푸념이 나올 지경이다. 그렇다 보니 관광객들은 구매 의욕을 잃고 기념품 판매상을 찾지 않게 된다.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박진영씨(여·43)는 “이번 추석 명절 때 고향에 다녀오면서 4곳의 휴게소를 들렀는데 특산물이라고 내놓는 상품들이 다 똑같았다”며 “특산물 매장을 왜 마련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기후 변화로 모호해진 재배지

 

이 같은 현상의 일차적인 원인은 한반도의 기후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지역에서 특산물로 내놓는 농작물은 대부분 기온과 일교차, 강수량 등에 민감하다. 때문에 과거에는 특수한 환경에 적합한 일부 지역에서 유독 독특한 맛을 냈다. 하지만 기온이 상승하면서 재배지의 경계선이 모호해졌다. 전남 영암의 특산물이던 무화과를 충북 충주에서도 재배하고, 전남 곡성이 주산지이던 멜론을 강원 화천·양구에서 생산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됐다.

 

실제로 월동배추·겨울감자·쌀보리·사과·복숭아·감귤·녹차 등의 재배지는 이미 많이 북상했다. 1985년 이전 제주 지역에서만 생산된 월동배추·겨울감자는 남부 해안지방에서 많이 재배된다. 대구·경북에서 주로 생산된 사과 재배지역 역시 파주·포천·연천 등 경기 북부지역까지 넓어졌다. 복숭아는 동해(凍害) 가능성이 줄면서 경북에서 경기·강원까지, 감귤은 제주에서 거제·고흥·나주까지, 녹차는 보성·하동에서 강원 고성까지 한계 재배지가 올라갔다. 쌀보리의 안전지대도 충청 이남에서 경기 중부지역으로 바뀌었고 따뜻한 지형의 마늘 농사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가능해졌다.

 

반면 아열대 과일 재배가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지난해 충북 청주시 서원구의 한 도로변에 심은 바나나 나무에 열매가 달렸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일대 농가 21곳에서는 그동안 제주도에서나 재배하던 브라질 남부 원산지 열대 과일 ‘패션 후르츠(백향과)’ 재배를 올해 시작했다. 전남에서는 파파야·구아바·레몬그라스 등도 생산돼 수도권 유통업체에 납품까지 된다. 경남과 전북 등에서도 용과와 망고·파파야 등이 재배되고 있다.

 

한반도의 기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현재의 특산물 지도 또한 상당수 바뀔 것이란 전망도 있다. 농촌진흥청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과·포도·배·복숭아 등은 금값으로 치솟을 가능성이 크다. 2100년께에는 우리나라 사과 재배는 강원도 일부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예측됐다. 사과가 강원도만의 특산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여름철 김치의 주재료인 강원도 고랭지 배추는 갈수록 재배 면적이 급감해 2090년에는 사라질 전망이다. 배와 복숭아·포도는 21세기 중반까지 소폭 증가하다가 줄어든다.

 


지자체 과열 경쟁도 한몫

 

특산물의 경쟁력을 저하시킨 데에는 지방자치단체의 과열 경쟁도 일조했다. 지자체가 민선으로 바뀐 이후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너도나도 특산물 홍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차별화에는 실패한 채 지역 재배 농장물 대부분을 특산물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전국에 사과 축제를 여는 지자체만 10여 곳이나 된다. 포도 축제를 열며 판촉 행사를 벌이는 곳은 15곳에 이른다. 10월에 예정된 지역 특산물 관련 축제만 200여 개에 달한다. 지난해 한 지역의 인삼 축제는 출하 시기가 늦어지면서 다른 지역의 상품을 내놓고 브랜드를 홍보하는 웃지 못할 광경까지 연출됐다. 당연히 외부인들의 발길은 이어지지 않고 ‘그들만의 축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일부 지역은 특산물 브랜드를 놓고 원조 경쟁까지 벌이기도 한다. 매운맛의 대명사인 청양고추의 명칭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경북 청송과 영양 지역에선 과거 맵기만 했던 땡초를 개량해 청양고추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청송의 청(靑)자와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가 됐다는 의미다. 반면 충남 청양에선 예로부터 병충해에 강하고 재배하기 좋은 종자를 추천해 줘 지역명을 딴 것이라고 주장한다. 청양고추는 중앙종묘라는 회사에서 1983년 농림부에 등록을 마친 품종의 이름이다. 

 

특산물 홍보 경쟁은 가뜩이나 힘든 지자체의 재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난해 전국 234개 지자체가 특산물 축제 등 1만4000여 건의 축제를 여는 데 1조원 가까운 예산을 썼다는 통계도 나왔다. 충남의 한 지자체 관계자는 “다른 지역에서 특산물 축제를 열면 우리 지역 특산물의 브랜드 가치 하락을 우려해 불가피하게 열게 되지만 효과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지역 농가들의 요구로 인해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일부 지자체에선 작목별로 개최됐던 축제를 하나로 묶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충북 충주시는 그동안 작목별로 개최됐던 밤축제·천등산고구마축제·사과축제와 체험농장 홍보행사인 와유바유축제 등 4개 축제를 하나로 묶어 ‘충주농산물 한마당축제’를 개최했다. 일부 지역은 지역 축제를 축소하고 서울이나 부산 등에서 판촉 행사를 벌이는 방향으로 전환했더니 오히려 판매 실적이 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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