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전락한 美 대선
  • 김원식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0.18 10:37
  • 호수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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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문 폭로전’ 트럼프 공화당 내서도 외톨이 신세

“드디어 해냈다!” 지난 10월7일(현지 시각),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 편집국에서 기자들 사이에 터져나온 함성이다. 그 이유는 미국 대선판을 크게 뒤흔들,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음담패설이 담긴 녹음파일 내용을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까지 언급한 트럼프의 성적인 막말이 그대로 드러나자, 트럼프는 거의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사실 이날 공개된 이 녹음파일은 미 NBC 방송이 이미 확보해서 공개 날짜를 벼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NBC 방송 데스크에서는 플로리다 등 미 동부 해안을 강타하던 허리케인 ‘매슈’의 상륙으로 온갖 이슈가 거기에 맞춰질 것으로 예상하고 보도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해당 녹음파일은 워싱턴포스트에도 전해졌다. 결국 워싱턴포스트가 발 빠르게 치고 나갔고, NBC 방송은 덩달아 보도에 나선 꼴이 되고 말았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음담패설 녹취 폭로 보도’로 위기에 빠졌다. © EPA 연합

 

주류 언론의 치열한 ‘트럼프 추적’

 

이미 올해 초부터 워싱턴포스트가 사활을 걸고 ‘트럼프 죽이기’에 나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난 5월에는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의 특종 보도로 유명한 이 신문의 밥 우드워드 대기자가 기자 20명을 투입해 트럼프의 과거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 회장이 기자들에게 “트럼프를 죽여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소문을 그대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특명으로 워싱턴포스트는 그동안 수차례 트럼프의 과거 행적에 대한 보도를 해 왔지만, 이번처럼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거 유부녀를 유혹하는 트럼프의 경험담과 그것도 여성 신체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내세운 내용이 그대로 드러났다. 트럼프가 “당신이 스타면 그들(여배우)은 뭐든지 하게 허용한다. (여성의) ○○를 움켜주고, 어떤 것도 할 수 있다(Grab them by the p---y, You can do anything.)”고  발언한 내용은 거의 핵폭탄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핵폭탄급 폭로가 없었다면, 미 대선판은 오히려 민주당의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에 의해 힐러리 캠프 운영자의 해킹된 메일이 공개되고 그 내용이 알려져 힐러리가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었다. 이른바 ‘이메일 스캔들’ 조사와 관련해 힐러리와 미 국무부 및 법무부와의 유착 의혹이나, 힐러리가 월가(街)의 후원금 행사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입장으로 발언한 내용들이 알려졌다. 하지만 트럼프의 음담패설 핵폭탄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자신의 음담패설이 담긴 녹음파일의 공개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는 이에 맞서기 위해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과거 ‘섹스 스캔들’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10월9일 펼쳐진 대선 2차 TV토론 직전 빌 클린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4명의 여성을 기자회견장에 내세우며 반격을 시도했다. 2차 TV토론에서도 트럼프는 그러한 음담패설은 남자들끼리 나눈 ‘탈의실 대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그저 말만 했을 뿐이지만, 빌 클린턴은 수차례 행동으로 옮겼고, 힐러리 클린턴은 피해 여성을 모욕했다”며 힐러리의 과거사를 물고 늘어졌다. 그는 또 화제를 ‘이메일 스캔들’ 등 힐러리의 추문으로 돌리는 데 나름 성공해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에서 기사회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마저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다. © AP 연합

 

‘이메일 스캔들’ 덮어버린 ‘음담패설 스캔들’

 

하지만 이번에는 뉴욕타임스(NYT)가 나섰다. 이 매체는 10월12일, 과거 트럼프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 2명의 구체적인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며 트럼프가 “말만 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에 카운터펀치를 안겼다. 트럼프에게서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트럼프가 키스하거나 자신의 몸을 만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에 대해 ‘인격 살인’이자 ‘완전한 허구’라는 입장이다. 그는 또 “사기꾼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려는 재벌 언론들과 힐러리 캠프의 조작”이라고 반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트럼프의 말대로 거의 모든 주류 언론들이 트럼프 공격에 나서고 있다. 한 여기자는 자신이 직접 과거에 트럼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기사를 게재하는가 하면 모든 매체가 앞 다퉈 트럼프의 과거 전력 캐기에 나서고 있다. 대선 초기부터 예상은 됐지만, 선거를 불과 3주 정도 남겨놓고 트럼프는 미 대다수 주류 언론들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대선은 졸지에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돼 가고 있다.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파일 공개를 두고 논쟁을 벌인 2차  TV토론은 이미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추잡한(nasty)’ 토론회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종 매체들이 트럼프의 과거 성추문을 구체적으로 들춰내기 위해 해당 여성들의 피해 주장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3류 잡지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 대선은 이미 예전에 정책 대결은 실종되고 자극적인 네거티브 공격이 판을 칠 것이라는 미국 정치분석가들의 예상이 적중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의 모든 공격이 트럼프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음담패설이 담긴 녹음파일이 공개되자, 공화당의 일인자인 폴 라이언 미 하원의장마저 지지를 철회하는 등 트럼프는 거의 외톨이로 전락한 신세다. 현실적으로 민주당의 힐러리가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많은 대형주를 장악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른바 ‘경합주(swing-state)’를 모두 장악해도 역전이 힘들다는 분석이 대다수다. 한때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40%대까지도 올라갔었지만 이제는 거의 10%대로 낮아졌다.

 

하지만 미국 대선이 힐러리의 확고한 승리로 끝날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과거 성추문으로 완전히 망가지고 있는 트럼프지만, 아직도 실낱같은 이른바 ‘막판 대반전’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과거 성적 추문에 휩싸이고 있는 트럼프의 상황이 과연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주로 백인 블루칼라층이나 노동자층으로 이뤄진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미 미 주류 언론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 언론들의 이러한 보도가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결집표를 유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CNN 방송에 관해서도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Cable News Network)’가 아니라 ‘클린턴 뉴스 네트워크(Clinton News Network)’라고 비꼬고 있는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즉, 트럼프의 돌풍은 이러한 주류 언론에 대한 반감에서 트위터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불어온 것이기에 그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주류 언론이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더 큰 반감을 불러와 그들을 투표장으로 나오게 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분석이기도 하다.

 

‘트럼프 파문’으로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 EPA 연합

 

트럼프, 결정적 ‘반격 카드’ 있을까

 

또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패배가 거의 확실한 트럼프 진영에서 막판 대반전을 노리는 결정적인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설도 파다하다. 이미 대선이 서로 상대방의 신뢰를 박살내는 네거티브 상황으로 돌입한 이상 선거 최종 막판에 힐러리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릴 ‘결정타’를 폭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또 어떤 방식을 통해서 터져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일각에서는 힐러리의 건강 상태에 관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문서가 공개되거나, 혹은 힐러리가 사설 이메일을 사용했을 당시 국가안보에 관한 ‘1급 기밀’ 내용이 담긴 문서가 공개될 수도 있다는 추측도 나돌고 있다. 그동안 주로 해킹으로 힐러리 보좌진의 메일이 공개됐던 것에 반해 힐러리 본인의 비공개 메일이 전부 공개돼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추측들도 난무한다. 

 

과거 공화당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트럼프에 대한 성추문 관련 폭로는 이제 더 나와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선거일을 한두 주 앞두고 힐러리에 관한 대형 폭탄이 터진다면, 힐러리 캠프는 이를 수습할 시간도 없을 것”이라며 트럼프의 대반전 카드가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진영에서는 10월19일 펼쳐질 마지막 대선 TV토론을 전후해 비장의 카드를 들고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트럼프 진영의 ‘대반격’ 폭로가 실제로 이어진다 해도 과연 힐러리 쪽으로 이미 기울어진 판세를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이번 미국 대선은 누가 승리를 차지하더라도 더욱 정치 불신을 가중시킨 사상 유례없는 선거였다는 평가는 지우기 힘들 전망이다. 선거 막판까지도 온갖 폭로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정치 불신 분위기가 투표율을 더욱 떨어뜨려 일반적으로 투표율이 높은 백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트럼프가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분석마저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숨겨진 백인 표’의 혁명적인 ‘반란’이 일어나야 가능한 상황이다. 온갖 추문과 폭로전을 이어가고 있는 이번 미국 대선이 현재 판세대로 힐러리의 승리로 끝날지, 아니면 다시 선거 초창기의 ‘트럼프 돌풍’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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