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대통령이 조금만 더 일찍 사과했더라면…”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0.18 17:32
  • 호수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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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길었던 하루’ 2004년 3월12일을 보낸 국회의장의 회한

“헌법 제65조 2항 단서에 의거, 대통령 노무현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2004년 3월12일 오전 11시55분, 박관용 국회의장은 노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선포했다. 헌정사상 초유로 대통령이 파면된 것이다. 의장석을 점거하던 여당 의원들을 들어내고 야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뤄진 결정이었다. ‘195명 참석에 찬성 193, 반대 2’. 11시22분 제2차 본회의 개의를 선언한 지 30여 분 만에 탄핵 드라마 제1막은 종료됐다.

 

△오전 11시, 박관용 국회의장 (국회사무총장에게) 질서유지권 발동 지시 △11시4분, 한나라당·민주당 의원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 입장 △11시5분, 박 의장이 국회 경위들의 호위 속에 본회의장 입장 △17분간 의장석 점거를 위한 여야 의원 간 몸싸움 △11시22분, 박 의장 의장석 등단·개의 선언 △11시23분, 탄핵안 상정 △11시50분, 찬반 투표 시작 △11시55분, 탄핵안 가결 선포. 시간 순으로 정리한, 긴박했던 그날의 국회 움직임이다.

 

“의장실에서 본회의장까지는 몇 발짝도 안 된다. 내가 회고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라고 토로했듯이 지척의 본회의장도 그리 멀게 느껴졌다. 달리 선택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입법부 수장으로서 주어진 책무를 수행한다는 각오로 의장실을 나서긴 했지만 갑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전말과 어제 대통령의 회견으로 극에 다다른 정치권 갈등의 장면 장면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정말 여야, 청와대 모두가 미웠다. 없어야 할 사태, 없어도 될 사태를 자존심 지키겠다고 현실화시켰으니 욕을 먹어도 싸지만 애꿎은 국민들은 어찌하는가. 야당이 다수를 무기로 여당을 압박한 것과 별개로, 여야 각자의 정치적 복선(伏線)은 차치하고, 국정 최종·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 여당은 달라야 했다. 측근 비리나 선거개입 시비, ‘10분의 1 이상이면 책임’ 등은 어쨌든 빌미를 준 게 아니던가. 막판까지 버티며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대응은 잘못이었다.” 박 의장은 불필요한 여야의 자존심 대결, 대통령의 오기(傲氣)가 없을 수 있었던 탄핵을 초래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2004년 3월12일 박관용 국회의장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을 선포했다. 본회의장에서 밀려났던 열린당 의원들이 뛰어들며 물건을 던지자 질서 유지를 위해 배치된 국회 경위들이 가로막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설마 하던 여당 대표는 직전에야 ‘사과’ 건의

 

노 대통령이 3월11일 회견에서 “사과는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탄핵을 모면한다는 뜻에서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야당이 마지노선으로 제시한 ‘사과(謝過)’를 차버린 게 모두를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는 말이다. ‘골을 질렀다’는 표현이 가장 적확할 수 있다. 국가 최고 책임자가 오기와 고집 때문에 사태를 막다른 골목에 밀어 넣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이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해 왔던 정동영 열린당 의장도 대통령 회견 이후 국회 내 반발과 여론 악화에 놀라 12일 새벽 ‘대국민 사과와 (대통령 회견 후 자살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에 대한 유감·위로 메시지 발표’를 청와대에 긴급 건의했다. 11일 아침까지만 해도 ‘진짜 탄핵은 없겠지’라고 했던 정 의장은  11일 밤, 형식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긴급 대표회동을 제의했으나 최병렬 한나라·조순형 민주당 대표는 단박에 일축했다. 

 

3월9일 전임 이회창 총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감옥에 가겠다. 대통령은 대의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는 3번째 대국민 사과 등으로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최 대표가 그 전날 검찰의 대선자금 발표와 안희정 등의 자금 추가 수수 및 ‘10분의 1’ 시비까지 겹침으로써 유리하게 다져진 국면을 지나칠 이유가 없었던 것. 정 의장의 긴급 연락을 받은 노 대통령은 3월12일 아침 지방 출장을 떠나기 전 “잘잘못을 떠나 죄송하게 생각하며 남 전 사장의 투신에 대해서는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하는 형식이었고,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을 멈추게 할 수준이 못 됐다. ‘설마’ 했던 탄핵이 현실로 다가선 것. ‘늦게, 대변인을 통해’ 유감 표명(3월12일 오전 9시50분)을 할 것이었다면 왜 ‘조금 먼저, 직접’ 하지 않았느냐는 박 의장의 탄식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안 가결은 그 자체가 일대 비극적 사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헌정 중단이라는 최악의 불행한 사태가 초래됐으니까. 그런데 이 ‘최악의 불행’에  ‘보태진 불행’이 또 있기에 노 대통령 탄핵은 더 비극적이다. 그나마 타협이 여의치 않던 ‘보수(保守)와 진보(進步)’의 대결 양상을 ‘죽기 아니면 살기’식 전쟁으로 변질시켰다는 점에서다. 오늘의 막가파 정치판, 그러니까 정치를 게임이 아닌 전투로 고착시킨 밑바닥엔 바로 이날의 ‘탄핵’이 자리한다. 없어야 할, 충분히 없을 수 있었음에도 자존심 대결이 국가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박 의장이 의사봉을 세 번 내리치는 것으로 탄핵 정국 제2막이 열렸다. 야당 의원들은 의기양양,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그제야 국회 경위를 밀치고 들이닥친 여당 의원들은 투표함을 내던지며 울분을 터뜨렸다. 통곡했다. 박 의장은 여당 의원들이 던지는 투표지 등을 막기 위해 앞을 가로막던 국회 경위들을 물리치면서 국회의장으로서 한마디를 남겼다. “이 불행한 사태는 여러분 스스로 초래한 자업자득입니다…대한민국은 어떤 경우라도 전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전진~’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극의 절차를 마무리 지어야 했던 당사자로서 수십 번 되씹었던 말이다. ‘자업자득~’은 ‘국회의장이기에 운명적으로 사회봉을 들기는 하지만 내 진정은 이게 아니다’는 원망과 회한의 표시였다. “이 엄청난 일을 치르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무척 고심했다. 그 결과가 ‘자업자득’과 ‘전진’이다. ‘없었어야 할’ 그러나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다음에 가야 할’ 길은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었다.” 피를 토하는 절규(絶叫)였다는 얘기다.

 

 

‘꼼수’와 자존심 싸움이 국가적 비극 초래

 

“원천 무효”(김근태), “치욕의 역사다. 국민이 심판할 것”(정동영) 등 탄핵을 저지 못한 것을 무릎 꿇고 국민 앞에 사죄하고 난 여당 지도부도 절규했다. 이부영 의원은 “쿠데타다.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의원직 사퇴서를 내겠다”며 대야(對野) 전면투쟁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열린당 의원들의 반응에 야당 의원들은 코웃음 쳤다. 한마디로 ‘쇼’라는 것이다. “육탄저지 운운했지만 그게 가능하다고는 본인들도 믿지 않았을 게다. 의장 사회봉을 감추고, 바닥에 드러눕고 하는 것은 약자(弱者)이기에 당한다는, 야당이 다수 횡포를 부린다는 그림을 국민에게 보이려는 술수일 뿐이다. 그러나 열린당이 상당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인 추미애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언급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대리인(청와대 대변인)을 시켜 사과하면서 국회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언했다.

 

“아수라장이 된 본회의장을 나와 의장실로 돌아왔다.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의장으로서 해야 할, 남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행정부에 국회 의결 결과를 알리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시키는 것과 대통령에게 통보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청와대 접수와 동시에 대통령 권한이 중지되기에 통보시간은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대통령이 지방 출장 중인 것을 알기에 그 점을 고려해야 했다. 부재중 통보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고건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리가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겠지만 총리에게도 정식 통보는 해야 했다. ‘대통령이 출장 중으로 아는데 언제 귀경하십니까.’ ‘오후 4시입니다.’ ‘그러면 이후에 접수시키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긴 하루였다.”  

 

 

사실상 대통령 1인이 대상인 탄핵(彈劾)…모두에게 불행한 이름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 원수(元首), 국정 최고 책임자의 위치를 법·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명문(明文)이다. 그러나 내란(內亂)·외환(外患)의 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그 자리를 잃을 수 있다. 무력(武力)을 동원한 쿠데타가 아닌, 합법적 절차로는 탄핵(彈劾)이 있다. 헌법은 국회가 탄핵 소추(訴追)를 의결하고, 헌법재판소가 국회 의결 180일 이내에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도 장관·법관 등 다른 고위 공무원처럼 헌법·법률을 위배하면 파면(罷免)되는 것이다. 다만 대통령 탄핵은 보다 엄격하다. 여타 고위직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발의-재적 과반수 찬성’으로 이뤄지지만 대통령은 ‘재적 과반수 발의-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된다. 대통령 탄핵은 헌정(憲政) 중단이라는 국가 초비상사태 그 자체이기에 모든 단계의 요건을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이외의 공무원이 다수 국회의원과 맞서 다투는 게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므로 탄핵을 대통령 1인 견제장치로 봐도 무방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가 자신에 대한 탄핵안을 의결하던 2004년 3월12일, 경남 지방을 순시 중이었다. 공장을 시찰하던 노 대통령은 4시간여 뒤 대통령 권한이 중지됐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탄핵 절차·효과 등은 국가마다 다르다. 양원제(兩院制)인 미국은 ‘하원 소추-상원 심판’으로 진행된다. 전적으로 의회 소관이다. 우리나라는 국회가 탄핵안을 가결하면 권한이 중지되지만, 미국은 하원의 소추가 있더라도 유지된다. 무죄추정 원칙 때문이다. 미국에선 링컨의 후임인 제1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처음(1868년)으로 탄핵 재판을 받았으나 1표 차로 부결된 이래 탄핵 도마에 오른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리처드 닉슨(1974년)과,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한 빌 클린턴(1998년) 두 사람이 전부다. 닉슨은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결의가 가결되자 자진 사퇴했고, 클린턴은 하원을 통과한 탄핵안(사유: 위증과 사법 방해)이 상원에서 부결돼 가까스로 살아났다. 200년이 넘는 동안 단 3명이 탄핵에 휘말렸으나 최종 탄핵에 이르진 않았다. 우리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안 의결로 권한이 중지됐으나 헌법재판소가 기각,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탄핵정국 전개 양상도 대비된다. 미국도 행정부 일시 마비 등의 혼란이 따랐다. 시스템이 확실하게 작동하는 미국은 그러나 한국처럼 국정이 전면 마비되고 온 국민이 편을 갈라 대립하는 극단의 사태는 없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아니 더 심화됐다. 그게 우리 정치의 후진성에서 비롯했건 어쨌건 그런 측면에서라도 ‘경계’해야 할 사태다. 하지만 탄핵은 ‘일상용어’로 자리했고 정파 간 감정대립을 촉발·고조시키는 게 지금의 딱한 상황이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최근 미르재단 의혹을 언급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거론했다.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 당시 김상곤 후보 등도 ‘박 대통령 탄핵’을 꺼냈다. 한 지상파 방송에 출연, 현 정부의 사드(THAAD) 배치를 반대하는 대목에서다. 그 뒤 사드 반대 김천 시민 집회 등에서도 탄핵 구호가 나왔다. 현직 대통령을 겨냥한 탄핵 주장이 거침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 탄핵 얘기가 있었지만 대개는 SNS상에서였는데 이젠 공공연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탄핵이 대수롭지 않게 운위되는 형국이다. 하기야 인터넷에는 더한 욕설도 난무하는데 무슨 대수냐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마구잡이로 주장하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대목이다. 대통령 탄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생하는 국가적 혼란과 국가 신인도 추락 등 직·간접 손실의 크기를 감안하면 최소한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담을 단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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