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더 이상 실망시켜선 안 된다
  • 김현일 대기자 (hikim@sisapress.com)
  • 승인 2016.11.04 14:04
  • 호수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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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최측근 총에 피살된 이후의 모든 대한민국 대통령을 봐왔습니다. 40년 가까이 정치현장을 돌면서, 그중 몇몇 분과는 술잔도 기울이곤 했습니다. 국가원수의 카리스마는 사석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간 대화 가운데 그분의 소싯적 ‘로맨스’까지 끼어 있었으니 그럭저럭 ‘근사한’ 자리였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장면 가운데 주로 떠오르는 대통령 기억은 임기 말·퇴임 후의 참담(慘憺)입니다. 의연한 듯해도 실은 회한(悔恨)이 잔뜩 서린 노인이었습니다. 퇴임 후  백담사에 유폐(幽閉)된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 1987년 체제 이후 들어선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만신창이로 청와대를 떠났습니다. 끝까지 버틴 이명박 대통령을 제외하곤 모두 소속 정당에서 떨려났습니다.

 

‘곁에 있으면 우리까지 망하니까 꺼지라’는 압력 때문입니다. 말이 탈당(脫黨)이지, 실제는 쫓겨난 출당(黜黨)입니다. 퇴임 노태우 대통령은 감옥에 갔습니다. 하지만 재임 중 친아들을 교도소에 보내야 했던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친형을 보낸 노무현·이명박 대통령도 나을 게 없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피붙이를 이랬던 심정이 어떨지는 상상이 갈 겁니다. 순간 대통령의 자존심은 까뭉개지고 권위는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런 대통령을 둔 국민은 어찌 됩니까. 눈물과 앙심으로 범벅된 대통령에게 국사(國事)가 제대로 보일 리 없을 것은 자명합니다. 나라 살림은 엉망이 됐고, 애먼 국민들은 그 실정의 찌꺼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 IMF 사태를 맞은 게 우연이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엉이 바위’ 비극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남들보다 가까이서 참상들을 지켜봤던 기자였기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자못  컸습니다. 과거 대통령들이 망한 큰 이유가 피붙이들의 권력형 비리였는데 그럴 소지가 적은 것도 한 이유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국정농단·레임덕이란 단어조차 한가로운 지금입니다. 최순실-. 그 말 많던 우병우, 문고리 3인방도 곁가지였습니다. 과거 대통령들은 그나마 본인이 당사자는 아니었습니다. 한데 박 대통령은 자신이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탄핵(彈劾)·하야(下野) 외침이 거침없이 터져 나옵니다. 정치 셈법이 빠른 야당 수뇌부만 손을 내젓습니다. 무당(巫堂)·사교(邪敎)라는 단어가 SNS뿐 아니라 메이저 언론들에 공공연히 등장합니다. 콘크리트 지지자들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듭니다.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내려앉는 게 시간문제일지 모릅니다.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정성을 안 보였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벌써 새누리당 의원들은 물론 공무원들마저 대통령을 안 무서워하는 모양새입니다.

 

ⓒ 연합뉴스


남은 길은 하나뿐입니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서정(庶政)이나 챙기는 게 최선입니다. 영(令)이 서지 않더라도 해 봐야죠. 그 전에 농단 ‘조역’들을 단죄하고 거국중립내각이라도 출범시키려는 노력은 당연합니다. 이 마당에  과거와 같은 배신자 원망 타령(가장 믿던 순실 때문에 사달이 났다는 사실을 명심하고)이나 해선 안 됩니다. 지금처럼 그냥 뭉개고 앉아 있어서도 곤란하지만 사태 반전을 노려 오기로 뭔가를 도모하려 든다면 정말 위태롭습니다. 불손·경망스럽게도, 과거 대통령들의 초췌한 모습과 ‘부엉이 바위’의 추억이 오버랩되니 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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