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수탉을 프랑스의 상징으로 만든 ‘선량왕’
  •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 경영연구원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11 09:26
  • 호수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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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내 왕국의 모든 국민들이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기를 원하신다”
앙리 4세 초상화

 

앙리 4세(1553~1610)는 34년간 종교전쟁으로 ‘사분오열’된 혼란기의 프랑스를 수습하고 근대국가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은 부르봉 왕가의 시조이다. 신교 세력 출신이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구교로 개종했고 이후 신교, 구교로 개종을 반복하는 험난한 생애를 살았다. 백성들이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기를 염원한 그의 “하느님은 내 왕국의 모든 국민들이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기를 원하신다”는 말에서 유래해, 프랑스에서는 닭 요리가 발달하였고 수탉은 국가의 상징이 됐다.

 

앙리 4세가 태어나기 약 200년 전에 벌어진 영국과의 백년전쟁(1337~1453)은 근대국가 프랑스 탄생의 사전준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66년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략해 왕위에 오른 노르만 왕조의 시조인 정복왕 윌리엄(1028~1087)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지배자 출신이었다. 이후 프랑스에 남아 있었던 노르망 왕조의 영토와 프랑스 왕실과 얽혀 있는 혈연관계가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영국 노르만은 혈연관계를 명분으로 프랑스 왕위를 요구했다. 결국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왕이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개막되었다. 시작 후 90년간은 영국의 우세가 지속되어 프랑스는 파리 등 중북부를 빼앗기고 남부로 밀려났다. 프랑스는 1429년 잔다르크가 나타난 오를레앙 전투에서 이기면서 전기를 마련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었다. 백년전쟁으로 영국 세력을 대륙에서 몰아낸 프랑스는 동부지역의 경쟁자 부르고뉴 공국까지 합스부르크 제국과 분할-병합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권역을 확립했다.

 

 

계속된 전쟁과 종교 갈등으로 피폐해진 프랑스

 

영국을 물리친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는 중앙집권적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세기 초반부터 독일에서 출발한 종교개혁의 바람으로 종교적 긴장도 고조되었다. 프랑스 남부로 이주해 온 스위스 칼뱅 계열 개신교 세력이 확산되고 귀족층까지 가담하면서 기존 가톨릭 세력과 갈등이 증폭됐다. 프랑수아 1세(1494~1547)와 그의 아들 앙리 2세(1519~1559)는 신교도를 엄벌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방식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앙리 2세가 40세의 나이에 마상 창 시합에서 입은 부상으로 비명횡사하자 어린 아들들이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아들 앙리 3세의 섭정이 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카트린은 취약해진 권력기반을 보강하기 위해 가톨릭계 귀족들과 강력한 동맹을 맺었고, 1562년 프랑스 정부군이 신교도들을 기습하면서 위그노 전쟁이 발발했다. 위그노는 프랑스 남부 칼뱅 계열 신교도들을 지칭하던 단어이다.
 

나중에 앙리 4세가 된 앙리 드 나바르는 남부 신교 세력을 대표하는 나바르 왕국의 왕이자 부르봉 가문의 장자였다. 위그노 내전 발발 후에 신·구교 갈등 해소책을 모색하던 중 신교의 대표적 가문 출신 앙리 드 나바르와 구교의 대표적 가문 출신 프랑스 공주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구교 측은 결혼식이 열리는 1572년 8월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하객으로 파리에 모인 신교 측 주요 인사들을 습격해 2000명을 살해했고 이후 2만 명의 신교도가 학살됐다. 앙리 드 나바르는 구교 측 포로가 되었고 강요로 구교로 개종했지만,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 다시 신교로 개종하고 신교 세력의 지도자로 구교 세력에 맞섰다. 1588년 구교파인 프랑스 왕 앙리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앙리 드 나바르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신교도 왕을 인정하지 않는 구교 측은 내전을 일으켰다. 장기전에도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 교착상태에 지친 구교 측과의 협상에서 앙리 드 나바르는 구교도로 다시 개종하는 조건으로 1594년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리고 앙리 4세가 됐다.

 

34년간의 위그노 전쟁(1562~1598)은 마무리 단계로 진입했으나 신·구교 어느 쪽의 승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개종을 거듭한 앙리 4세는 자칫 양쪽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을 수 있는 미묘한 입장이었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정공법을 택한 앙리 4세는 1598년 프랑스 남서부 낭트에서 종교적 자유를 공식화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위그노 전쟁은 종결됐다. 낭트칙령은 국교를 구교로 규정하는 등 전반적으로 구교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과거 이단으로 규정돼 엄벌에 처해지던 신교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신앙의 자유가 명확히 규정돼 종교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프랑스는 종교의 지배를 탈피하면서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이 열렸고, 앙리 4세의 통치는 사회경제적 개혁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고 귀족의 세금을 늘려서 조세 기반을 확충해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재정을 정상화시켰다. 또한 신교 세력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상공업자들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상공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앙리 4세는 선정으로 백성들로부터 ‘선량왕(善良王) 앙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루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신앙의 자유를 가져왔으며, 사회경제적 개혁의 성공으로 생활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종교 갈등을 일단락 지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종교 갈등의 희생물이 되는 운명이었다. 1610년 앙리 4세는 행차 중에 열성적 구교도의 칼을 맞고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구교와 함께 신교도 정식 종교로 인정

 

백년전쟁으로 프랑스는 대륙에서 영국 노르만 왕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지배권을 확립했고 뒤이어 앙리 4세가 종교 갈등으로 발발한 위그노 전쟁을 종결시키고 근대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닦으면서 프랑스는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부르봉 왕가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200년간 유럽 정치외교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앙리 4세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계자들은 종교적 관용정책을 이어가지 못했다. 손자인 루이 14세(1643~1715)가 1685년 낭트칙령을 폐지하면서 프랑스는 다시 구교인 가톨릭 국가로 회귀했다. 신변이 불안해진 위그노들은 대거 해외로 이주했고, 상공업과 전문직에 종사하던 30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빠져나갔다. 사회적 역동성이 떨어진 프랑스 경제는 심각한 침체로 들어섰고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100여 년 후 발발하는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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