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의 봄’으로 해금된 코미디 정치풍자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24 13:21
  • 호수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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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에서 ‘박근혜 게이트’ 푯말 등장…노골적 탄압 받았던 CJ도 분위기 살피는 듯

1970년대 유신의 억압이 1979년 10·26 사태로 끝난 후 다양한 목소리들이 일제히 분출되는 ‘서울의 봄’이 닥쳐왔다. 이처럼 최근 방송가에선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정치풍자가 일제히 분출되는 ‘최순실의 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 코미디 프로그램이고, 한때 풍자개그로 큰 인기를 끌었던 KBS2 《개그콘서트》가 그 중심에 섰다. 《개그콘서트》는 11월6일, ‘세젤예’ 코너에서 풍자의 포문을 열었다. 이수지가 흰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채 나타나자 유민상이 “아니, 이분은 요즘 떠들썩한 그분”이라며 최순실씨를 연상케 했다. 극 중에서 이수지는 모든 의혹에 아니라고 부인하다 태블릿PC가 나오자 자기 것이 아니라며 신발 한 짝을 놓고 도망갔다.

 

이 정도만 해도 최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풍자였다. 하지만 조롱의 초점이 최순실 개인에게 한정됐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그전부터 《개그콘서트》에서 약자나 여성을 조롱하는 개그를 해 왔는데, 이번에 최씨를 조롱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씨의 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사적인 차원에서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므로, 이것을 정치풍자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박근혜 정부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정치 풍자극 《SNL 코리아》의 ‘여의도 텔레토비’(왼쪽)와 11월6일 《개그콘서트》 ‘세젤예’ 코너에서 최순실을 풍자한 개그우먼 이수지 © KBS·tvN

“내가 이러려고 개그맨이 됐나…”

 

그러자 《개그콘서트》는 11월13일 한 걸음 더 나갔다. 유민상과 김대성이 ‘리얼 사운드’ 코너에서 ‘검찰청에서 곰탕 먹는 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코너가 ‘민상토론’으로 바뀌었다. 이 코너는 주제 자체가 ‘비선 실세 최순실 게이트’였다. 일반 코너에서 최순실 개인을 희화화하는 아주머니 캐릭터를 내세워 최씨의 인간적인 면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선 실세 게이트 사건 자체를 다뤘다는 뜻이다.

 

이 코너에서 유민상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라고 하자 김대성이 “많이 들어본 이야긴데? 아, 요즘 뉴스에 나오는 분들이랑 똑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형, 입을 다 맞춘 거야?”라고 한 것은 관련자들의 행태를 풍자한 것이었다. 검찰의 압수수색 상자 같은 것을 내놓자 그 안엔 달랑 종이 한 장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검찰의 압수수색 수사가 시늉 아니냐는 의혹을 표현한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상자 안에 내용물이 가득 차 바닥면이 터질 듯한 독일 검찰의 압수수색과 텅 빈 상자를 겹쳐 들고 가는 듯한 우리 검찰 압수수색의 대조적인 모습이 화제가 됐었는데, 그런 인터넷 민심을 기민하게 반영한 것이다. 김대성에게 ‘문고리 사인방’이라고 하며 청와대 전직 핵심 비서관들을 겨냥했고, “검찰 가도 팔짱 끼고 웃으면서 조사받을 수 있다” “눈에서 레이저 나간다”며 우병우 전 수석을 야유했다. 또 유출된 대본을 최순실씨 복장의 이수지가 뜯어고치고, 그 옆에서 흰 와이셔츠 차림의 남성이 시중드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최씨의 개인적 캐릭터가 아닌, 이번 사태의 내용을 풍자했다.

 

결정적으로 11월13일 《개그콘서트》는 그동안 우리 방송계가 꿈도 꿀 수 없었던 다소 충격적 장면을 내보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을 적시한 것이다. ‘민상토론’ 중에 ‘최순실 게이트’라는 문구가 나오자 유민상이 부인했고 그러자 송준근이 “아, 이게 아니다? 그럼 이게 맞는 거다?”라며 ‘박근혜 게이트’라는 푯말을 들어 보였다. 그동안 막연히 정치인들을 조롱하는 풍자는 있었어도 부정적인 사건에 대통령 이름을 정확히 거론하지는 못했었다. 박근혜 게이트라는 말에 유민상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부인하자 송준근이 “한 명만 조사받으면 된다? 그게 누굽니까? 설마!”라고 했다. 대통령이 의혹의 몸통이라는 표현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유민상은 “내가 이러려고 개그맨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했고, 송준근은 “다음 주 민상토론,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계속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통령 어록 패러디였다.

 

 

“요새는 정치 아이템 많이 통과되는 분위기”

 

11월13일에 방송된 《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의 한 장면 © KBS
그동안 방송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현직 대통령을 적시한 것이 ‘민상토론’이란 점도 흥미롭다. ‘민상토론’은 원래 정치 표현을 할 수 없는 현실을 풍자하는 코너였다. 이 코너에서 패널 개그맨들은 사회자가 아무리 질문해도 벌벌 떨면서 정치적인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랬던 코너에서 대통령 이름이 나온 것은, 이젠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시대라는 의미로 읽힌다. 바야흐로 ‘최순실의 봄’, 아니 ‘최순실로 인한 봄’이다.

 

현 정부 들어 CJ가 미운털이 박혀 납작 엎드렸다는 소문이 영화계에 파다했다. CJ E&M 센터 1층엔 문화창조융합센터가 들어섰고, tvN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없어졌으며, 여권 인사가 tvN 예능MC로 등장했다. 이 와중에 《SNL 코리아》의 풍자와, 풍자를 주도했던 장진 감독도 모두 사라졌는데, ‘최순실의 봄’은 죽은 《SNL 코리아》 풍자도 살려냈다. 11월5일 방송분에서 최순실씨와 정유라씨를 패러디한 것이다. CJ 풍자의 부활은 인터넷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11월5일 풍자는 아직 최씨 모녀의 캐릭터 조롱에 그친 것이어서 《개그콘서트》처럼 더 발전될 여지가 있었는데, 오히려 11월12일 방송분에선 풍자가 아예 자취를 감춰 눈길을 끌었다.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 등 오너 일가까지 위협당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상황에서, 아직은 현재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CJ의 한 일선 제작진은 “윗선에서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 관련 내용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일부에서 여전히 몸을 사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분위기는 바뀌었다. 과거 《SNL 코리아》 ‘여의도 텔레토비’ 심의착수, 2013년 《개그콘서트》 ‘용감한 녀석들’ ‘민상토론’ 행정지도, 2016년 《개그콘서트》 ‘1대1’ 어버이연합 피소 등으로 움츠렸던 상황이 아니다. 한 예능 PD는 “보통 (정치) 아이템을 낼 때 CP가 수위를 낮추거나 킬(kill)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요새는 아이템을 내면 많이 통과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최순실 사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워낙 크고, 그동안 풍자를 못해 쌓인 울분도 크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다양한 정치풍자가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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