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파문’ 닉슨 하야는 왜 2년이나 걸렸나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12.0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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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보다 ‘은폐시도․거짓말’로 시민 분노해

"박근혜 대통령 스캔들은 워터게이트보다 더 크다."

미국 언론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한국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비교대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탄핵논의’로 이어지는 한국의 상황은 1972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과 흡사한 점이 많다. 미국 현대사를 떠들썩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은 결국 닉슨 대통령(이하 닉슨)의 ‘하야’로 끝난다. 

 

1974년 8월8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워터게이트 사건’은 한국에도 꽤 알려진 얘기다. 그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하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워터게이트 논란의 시작은 1972년 6월17일이다. 그리고 닉슨의 하야는 1974년 8월9일이다. 사건 발생부터 대통령의 하야까지 2년이 넘게 걸렸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선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시 보자. 이 사건은 1972년 6월17일 ‘무단침입자가 있는 것 같다’는 신고에서 출발했다. 신고자는 워싱턴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이 있던 워터게이트 호텔 경비원이었다. 경찰은 즉시 출동했다. 그리고 워터게이트 건물에 있던 5명을 붙잡았다. 수사과정에서 이들은 3주전에도 이곳에 잠입했다는 점이 밝혀졌고, 이날은 민주당 사무실에 설치했던 도청장치를 확인하려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괴한 중 한명의 수첩에서는 백악관 보좌관 하워드 헌트의 연락처가 적힌 수첩이 발견됐다. 

 

그러자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시작됐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밥 우드워드, 동료 칼 번스타인도 괴한과 백악관의 연관성을 쫓았고, 닉슨의 선거자금 일부가 이 괴한들의 계좌로 흘러간 사실을 보도했다. 백악관은 이 파문에 대해 “전혀 관여한 적이 없다”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당시에는 꽤 많은 이들이 백악관의 주장을 믿었다. FBI는 공화당과 이 괴한이 관련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큰 파문은 일지 않는 분위기였다. 

 

잔잔한 파문이 계속되던 중 대선이 찾아왔다. 이 사건이 논란이 됐지만 아직 명확한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을 때다. 이 사건 때문에 닉슨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1972년 11월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과 겨룬 현직 대통령 닉슨은 538명의 선거인단 중 520명을 확보하며 압승했다.

 

높은 닉슨의 인기로 사태는 잠잠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1973년 1월 워터게이트 당사 침입자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잡힌 범인들 중 일부가 위증한 사실이 드러나며 상황이 변했다. 이를 입증하는 언론 보도도 이어졌다. 

 

그해 4월30일 닉슨은 참모진이 이 사건에 연루돼 있고 책임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대신 본인이 직접 연관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차단했다. 하지만 이 또한 거짓이었다. 그해 7월 청문회에서는 닉슨의 부보좌관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화를 녹음한다며 닉슨이 도청사건에 직접 개입한 내용을 폭로했다. 1973년 5월 출범한 특검, 그리고 의회는 이 테이프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도 닉슨은 잘못을 시인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짓말’, ‘사건 은폐’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녹음테이프 공개는 계속 거부하다가 이를 요구하던 특검을 해임했다. 이것이 1973년 10월20일 발생한 ‘토요일 밤의 학살’이다. 닉슨은 콕스 특검 해임을 법무장관, 법무차관에게 명령했지만 둘은 모두 명령거부 후 사임했다. ‘직무대리의 대리’를 맡은 법무차관보가 결국 콕스를 해임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 am not a crook.)”라고 자신을 항변하던 닉슨은 ‘숨길 게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시민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닉슨은 그해 12월 결국 테이프를 제출했지만, 몇몇 부분은 삭제된 채였다. 이를 두고 다시 비난이 빗발쳤다. 이듬해인 1974년 5월, 미국 하원은 닉슨의 대통령직 탄핵절차에 착수했다. 미국 정부는 이와 별개로 닉슨에게 테이프 공개를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었다. 

 

결국 1974년 8월5일 닉슨의 테이프가 공개됐다. 녹음에는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 지시했으며, 파문이 인 뒤에도 FBI 수사 방해공작을 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제 더 이상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닉슨은 ‘탄핵’ 압박에 몰리자 ‘사임’을 택했다. 결국 닉슨의 대통령직 하야는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촉발됐지만, 그 이후 일어난 ‘거짓말’과 ‘은폐시도’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부분이 컸다. 이 때문에 미국학자 노엄 촘스키는 닉슨이 국민을 속이다 하야한 것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왜 쓰러졌는지 자문해보십시오. 그는 아주 나쁜 실수를 했기 때문에 실각한 것입니다. 그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화나게 했습니다…정부는 권력 그 자체가 아닙니다. 진정한 권력은 사회를 소유한 사람들 손에 있고, 국가 관리자들은 통상적으로 공무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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