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시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문화란 ‘경제 살리는 수단’에 불과했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7.01.0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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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하늘의 바둑판》으로 미국 시카고 리뷰 ‘올해의 시집’ 선정…“문학, 시 통해 인간성 회복 가능”

2016년 끝자락, 국가 원수가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뒤숭숭한 사이, 한국 문학계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국문학계 원로 학자이자 현업 작가인 오세영(75) 시인이 2011년 출간한 시집 《밤하늘의 바둑판》의 영문판(Night-sky Checker Board)이 미국 ‘시카고 리뷰 오브 북스(Chicago Review of Books)’가 12월19일 발표한 ‘올해의 시집’ 중 한 권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시카고 리뷰 오브 북스는 이제 막 한 살이 된 신생 문학비평지지만, 소설․비소설․시․만화 등 장르에 구분 없이 영향력 있는 작가 및 평론가들의 글을 실어 단시간에 많은 독자층을 확보한 유력 평론지로 성장해왔다. 시카고 리뷰 오브 북스는 오세영 시인의 시집 《밤 하늘의 바둑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깊은 사색과 아름다음으로 가득 찬 훌륭한 시집”이라 평하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평소 문학, 특히 시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오세영’이라는 이름 석 자는 결코 낯설지 않다. 그는 1965년 《현대문학》에 〈새벽〉이, 1966년에 〈꽃 외〉가 추천되고, 1968년 〈잠깨는 추상〉이 추천 완료되면서 등단했다. 2007년 은퇴 전까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술활동과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히 이어왔다. 한국시인협회상, 녹원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2017년 정유년 새해 첫 월요일이었던 1월2일 오세영 시인을 시사저널 편집국에서 만났다. 트렌치코트에 두꺼운 모직 중절모를 눌러쓰고 온 그에게선 깊은 연륜과 문인(文人) 혹은 예인(藝人)으로서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유복자로 태어나 내향적인 성격으로 자라났다는 그는 시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말했다. 오세영 시인은 “감각적이고 탐닉적인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 대중들은 순수한 시(詩)로부터 멀어졌다”며 “인문학의 중심인 문학, 문학의 중심인 시를 읽음으로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며 한국사회의 세태와 지난해 한국문학계를 뒤흔든 이슈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시인 오세영 ⓒ 시사저널 고성준


먼저 시집 《밤 하늘의 바둑판》이 올해의 시집으로 선정된 것을 축하드린다.

 

감사하다. 사실 이 시집이 나온 지는 좀 됐는데, 번역을 해주신 서강대 안선재 명예교수 공이 크다. 안 교수는 고은, 이문열, 정호승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해온 이 분야의 실력자다. 안 교수와는 2008년 문화훈장을 받을 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안 교수는 우수한 한국 시를 세계에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상식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그 인연을 잊지 않고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 번역 지원사업으로 신청한 거다.

 

 

언어란 문학의 본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인데, 특히 언어문학의 정수인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학 창작 활동이 아닌가.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작품의 번역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문학작품의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정주 시인의 <국화 앞에서>란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한다고 하자.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국화’가 갖는 감성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국화는 그저 장례식에 쓰는 꽃일 뿐이다. 아무리 시를 있는 그대로 번역한다 해도 문학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민족 정체성을 살리긴 힘들다.

 

 

한국 문학계의 오랜 숙원인 시 문학을 통한 노벨문학상 수상에 어려움이 있는 것 역시 언어의 한계로 인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상대적으로 산문을 번역하는 것은 의미 전달에 큰 무리가 없다. 물론 가끔 시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시에 특징이 있다. 사회적 메시지, 상징성이 강한 시라는 점이다. 외부 맥락을 이해하면 시의 의미 전달이 비교적 수월히 된다.

 

하지만 순수한 시는 어떤가. 시의 본분은 존재 자체다. ‘시는 왜 쓰는가?’에 대한 답은 ‘인간은 왜 사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과 비슷하다.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언어 역시 도구의 언어가 있고 존재의 언어가 있다. 신문기사나 민중소설은 사회를 폭로하고 모순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적 언어인 셈이다. 반면 시는 아름다운 언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릇으로 치자면 시는 밥그릇이 아니라 관상용 도자기다. 있는 그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단지 보기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언어와 언어의 문학인 시를 아끼고 가까이 둬야 하는가?

 

사람은 시는 읽으며 감복(感服)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감수성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인간이 효용가치를 찾는 데 익숙해진 습성에서 벗어나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근원에 대한 성찰은 속된 말로 ‘돈을 벌어주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원래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돈을 투자해야 할 대상이다. 문학을, 인문학을 돈벌이와 연결 짓고 그 연관성 속에서만 판단한 결과를 우리는 목도하고 하고 있지 않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취임사에서 ‘문학’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문화’라는 단어는 19회로 제법 많이 언급이 됐는데, 이 역시도 ‘창조경제’와 연관성 속에서 이뤄진 것들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있어 문화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수단’이란 게 드러난 셈이다. ‘문화를 발전시키자’가 아니라 ‘문화로 경제 성장을 이루자’인 것이다.

 

이런 발상의 중심에 ‘한류’와 ‘문화융성’이 있다. 문화와 그 정수에 있는 문학이 경제의 수단으로 타락시킨 주범이 이번 국정농단 사건에서 밝혀진 최순실, 차은택 등이 아닌가.

 

 

인문학에 대한 성찰,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가 결국 국정농단의 배경이 된 측면이 있다는 말씀이신가?

 

이번 정부는 인문학을 마치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말만 인문학을 진흥한다고 하지, 실상은 돈이 안 되는 인문학은 처내고 있다.

 

2015년 한바탕 홍역을 치른 한국문학번역원 축소 방침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자주: 2015년 4월 기획재정부 주도로 한국문학번역원의 기능 등을 크게 축소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한 부서로 만드는 방안이 검토됐다 사실이 알려지며 문학계의 큰 반발을 샀다. 당시 기재부는 번역원 외에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오페라단, 국립극단 등 문화예술 단체를 통폐합하거나 이들의 중복되는 기능을 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엔 이들 단체가 타부처 소관 기관 대비 소규모여서 운영비 부담 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진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문학번역원은 우리 문학 발전과 외국으로의 진흥 활동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관이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예산 차원으로만 판단하고 줄이거나 없앤다는 발상을 한 거다. 만약 한국문학번역원이 사라졌다면 지난해 한강씨의 맨부커상 수상과 같은 쾌거는 없었을 거다.

 

문예지 지원도 결국 없어졌다. 정부 예산 지원으로 문예지를 꾸준히 지원해주고 있었는데, 예산 문제라며 지원이 갑자기 중단됐다. 순수 문예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예산이 한류나 문화융성 등 예산으로 많이 넘어갔다고 들었다.

 

 

시인 오세영 ⓒ 시사저널 고성준

문학에 대한 예의가 실종된 사회인 것 같다. 그런데 지난해 문학계 성추문 파문까지 터져 나왔다. 문학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많이 무너졌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문학인만의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권력의 사유화 문제다. 특히 인문 정신의 수호자이자 탐구자로서 인간에 가치를 더하는 역할을 하는 문인들이 권력의 사유화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실망하셨을 것이다. 문학계 내부 자성의 목소리도 많이 나온다.

 

문단계 성추문 문제는 작가들이 특별히 방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질의 문제다. 인간은 인격체 아닌가.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완성된 인격까진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수준의 인격은 갖춘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자질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시인이나 소설가가 된 것이 일단 문제다.

 

두 번째는 ‘문학 권력’이다. 문학엔 분명 권력집단이 있다. 문학은 작품이 발표돼야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작품을 발표시키고 안 시키고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작가를 ‘등단’시키는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신인들, 그러니까 문학계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성적(性的)으로 자유분방한 게 예술인의 자세다’ 뭐 이런 생각을 한 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제 3의 문제도 있다. 작가 본인이 ‘문학정신’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성적 착취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생각한 경우다. 모든 예술은 창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창조는 자유를 전제로 한다. 창조와 자유란 것은 궁극적으로 개성․독창성의 문제와 관련되는 데 이 개념을 오해한 것이라고 본다. 개성을 일탈, 타락으로 착각하는 거다. ‘개성을 위해선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야 한다’거나 ‘도덕관념은 무시해도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탈(脫)도덕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건 완전한 착각이다.

 

 

포크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대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 《밤 하늘의 바둑판》이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선 많은 분들이 시를 읽지 않더라도 외부에서 객관적 인정받은 것 같아 내심 기뻤다.

 

시는 암담한 우리 사회에 작은 위안을 줄 수 있다. 시인은 ‘등불’이라고 늘 생각한다. 스스로를 태우며 빛을 내는 등불. 어느 시대든 어두운 면이 있었다. 시인들은 다른 일반인들처럼 어둠 속에 묻혀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그럴 때일수록 자신을 불태워 미약하지만, 또 희미하지만 불을 밝혀왔다. 그게 시인이 느끼는 작은 보람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것이다.

 

개인적인, 그러나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국민들 앞에서 시 한편을 낭독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하는 국회 개원을 보고 싶고, 미술관에서 대법원장을 우연히 마주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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