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김정은 방어막에서 공격수로 돌아서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09 09:45
  • 호수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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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연 태영호…반(反)김정은 아이콘 내외신 주목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을 벗어나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공사(56)가 새해 들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2016년 7월 탈북한 태 전 공사는 관계 당국 조사와 정착 준비를 마쳤고 “2017년부터 김정은 체제의 허구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공개 활동을 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그는 1월5일 서울 도곡동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첫 출근했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이곳은 엘리트 외교관이나 노동당 고위 간부 등 탈북인사 1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태 전 공사가 북한에서 근무할 때 친분이 있던 인사들의 방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안부를 전했다”고 귀띔했다. 특히 북한 외무성에 근무했던 K씨를 비롯해 외교관 생활을 같이 했거나 평양국제관계대학 등 학연이 있는 인사들과는 반갑게 재회했다는 것이다. 또 이른바 항일빨치산 원로로 불리는 오백룡 북한군 대장의 가문으로 알려진 부인 오혜선씨(51)와 가깝게 지낸 인사들에게 안부를 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영호 전 공사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그에게는 국내 언론매체는 물론 외신과 해외 북한 관련 연구기관, 저명 싱크탱크로부터 섭외 요청이 쇄도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몇몇 국내 신문·방송에 신년 인터뷰 형식으로 응한 이후 다른 매체들과 외국에서의 요구가 끊이지 않고 밀려들고 있다는 게 국가정보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도 자택 도청으로 처형당했다”고 밝히는 등 김정은과 권력 엘리트들의 내밀한 정보를 폭로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어 관심이 증폭됐다는 분석이다.

 

탈북한 태영호 전 주(駐)영국 북한 대사관 공사가 2016년 12월23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정보위 위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경찰 아닌 국정원 직접 경호

 

태 전 공사의 경우 북한의 보복·테러 우려가 높아 경찰이 아닌 국정원이 직접 신변경호를 담당한다. 물론 그는 “이 한 몸 통일의 재단에 바쳤는데 김정은의 테러로 죽는다면 통일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관계 당국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중 삼중의 경호망을 치고 있다. 사무실이나 거처 노출을 우려해 주로 태 전 공사가 해당 언론사를 방문하거나 제3의 장소에서 만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이때마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다. 서울 주재 외신의 경우 전 매체를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한 뒤 개별 언론들과 만나는 형식이 검토되고 있다. 태 전 공사는 특히 런던 체류 때부터 친분이 있던 영국 BBC 기자와 가장 먼저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게 된 건 탈북·망명 과정에서 태 전 공사가 가졌던 상징성 때문이다. 사실 부대사급이라고 하지만 북한 대사관 공사라는 직책은 크게 주목받기 어려운 자리다. 해외 대사관이나 대표부에 근무하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 엘리트 가운데 태 전 공사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인사도 적지 않다는 게 관계기관 당국자의 설명이다. 그런데도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이후 최고위급이란 말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태 전 공사는 런던 체류 때 영국 외교부 관리나 현지 언론인 등과 접촉하며 두터운 친분을 다졌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해당지역 인사들을 상대로 김정은 체제를 옹호하는 소규모 강연 등을 자주 벌였고, 이 장면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올라 있다. 북한 엘리트 인사가 탈북·망명 한다 해도 얼굴이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아 확인이나 언론보도가 어려운 상황과는 차이가 난다.

 

 

김정은 정조준, 집안 문제는 발설 안 해

 

유창한 영어도 태 전 공사가 가진 무기다. 북한 엘리트로는 드물게 중학교 시절 중국의 국제학교에 유학까지 하면서 다진 영어와 중국어 실력이 탄탄하다. 외신 인터뷰는 물론 유엔이나 미 의회 증언 등을 통해 김정은 체제의 핵·미사일 도발과 인권 유린상을 고발한다면 폭발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태 전 공사는 “서방국가는 물론 중국에도 직접 가서 김정은 체제를 비판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며 의욕을 나타내고 있다. 통역에 의존하거나 건강상의 문제로 해외방문 등에 제한이 따르던 황장엽 전 비서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북한은 태영호 전 공사에 대해 강도 높은 비방을 펼치고 있다. 언론과의 첫 만남인 2016년 12월27일 통일부 기자간담회 사흘 뒤 대남 인터넷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태영호가 온갖 횡설수설로 제 몸값을 올리려 한다”는 비난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국가 자금을 횡령하였는가 하면 국가비밀을 팔아먹고 지어(至於·심하다 못해 나중에)는 미성년자 강간범죄까지 감행한 후 법적 처벌이 두려워 도주한 특정 범죄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 등 관영매체는 태 전 공사와 관련해 함구하고 있다. 일반 주민들이나 평양 내 엘리트 계층 사이에 탈북·망명 소식이 퍼질까 우려해서다.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통해 김정은 체제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내면서도 태영호 전 공사가 언급을 꺼리는 대목이 있다. 바로 김정은 위원장의 집안 내부 문제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의 형 김정철이 2015년 5월 런던을 방문했을 때 밀착 안내와 통역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김정철의 성향이나 언행은 물론 김정은과의 친밀도 등 내밀한 정보를 파악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가진 인터뷰 과정에서는 “김정철 개인의 신상 등은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니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 같은 대목을 두고 태 전 공사가 평양의 김정은에게 협상 가이드라인을 던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앞으로 북한 민주화와 대북 비판 활동을 벌이겠지만 김정철 등 김씨 가계와 관련한 민감한 정보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다. 여기에는 “북에 두고 온 친인척이나 서울의 처자식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태 전 공사는 치밀하게 탈북·망명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공금횡령’ 주장에 대처하기 위해 대사관의 경리장부를 복사해 오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북한이 조기유학까지 시키며 육성한 수재급 엘리트 외교관은 이제 김정은 체제의 유능한 방어막에서 공격수로 돌아섰다. 그는 지금 김정은 권력의 아킬레스건을 거머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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