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계’ 거꾸로 갔다 부활한 ‘유신 망령’
  • 유지만 기자 (redpill@sisapress.com)
  • 승인 2017.01.10 09:18
  • 호수 14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대 핵심 키워드로 분석한 유신 시대로의 회귀

#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이었다.”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이 2012년 1월 집필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언급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에게 권력이란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 맞는 맞춤옷 같은 것”이라고도 밝혔다.

 

# 경상북도 구미시에는 ‘박정희로’가 있다. ‘경북 구미시 박정희로 107’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의 도로명 주소다. 구미시는 200억원을 들여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을 지을 예정이며, 2002년에는 구미체육관의 이름을 ‘박정희체육관’으로 바꾸기도 했다. 구미시는 올해 40억원을 들여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탄신제’를 치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시사저널 미술팀

‘최순실 게이트’가 던져준 가장 큰 충격은 바로 ‘시스템 붕괴’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만들어진 ‘87년 체제’를 통해 대한민국은 현대적 민주주의 시스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때로 시스템의 부작용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국민의 손으로 만든 시스템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선실세로 꼽힌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앞에서 시스템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최씨를 비롯한 몇몇의 사익을 위해 시스템이 악용 당했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 시민들은 87년 6월보다 더 큰 분노를 보이며 광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의 붕괴는 곧 ‘민주주의 퇴보’를 의미한다. 한 언론인은 “스마트한 시대에 알맞은 형식으로 유신이 부활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신의 흔적’은 사방에서 보인다. ‘유신의 핵심인사’인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문체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일지에서 드러난 언론 탄압 흔적 등이다. 시사저널은 국정 농단 사태를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를 통해 박근혜 정권에서 나타난 ‘유신의 흔적’을 분석해 봤다. 세월을 거스른 것은 박 대통령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유신의 핵심’ 김기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현재와 유신 시대를 엮는 ‘연결고리’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의 기초를 닦았으며, 1972년 12월 내놓은 유신헌법 해설서를 통해 ‘유신헌법은 우리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며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지지한다’고까지 밝혔다. ‘유신의 설계자’인 김 전 실장의 앞에는 출세 길이 열렸다. 1973년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에 임명된 이후 1974년 30대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후 1979년 10·26 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 정권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의 몰락 후 한동안 권력에서 밀려난 듯했지만, 1988년 만 50세 나이에 검찰총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특히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혼란했던 정국을 정권에 유리한 쪽으로 되돌리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 사건은 24년 만인 2015년 재심 절차에서야 무죄 판결이 났다.

 

1992년에는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킨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측에 투신한 김 전 실장은 1992년 12월11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파문이 일었다. 김 전 실장은 이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지지만 자신이 당시 야인(野人) 신분이었다는 점을 이용해 대통령선거법을 위헌 제청 신청하는 묘수를 내놨다. 결국 헌재에서 대통령선거법의 해당 조항이 위헌으로 결정되면서 검찰의 공소가 취소됐다.

 

2004년 3선 국회의원에 오른 그는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도 꿰찼다. 그리고 당시 정권을 잡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에 앞장섰다. 국회를 통과한 탄핵안은 결국 헌재에서 기각 결정이 내려지게 됐다. 그는 2013년 8월, 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후임으로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기춘대원군’으로 불렸다. 결국 지난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드러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를 통해 세월호 여론 조성, 언론 탄압, 문체부 블랙리스트 작성 등에 관여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한 국정조사에 출석해 “최순실을 모른다”며 발뺌하던 중 최씨를 아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박정희의 통치 방식 ‘언론 탄압’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했다. 1961년 정권을 잡은 이후 민족일보를 ‘북한의 활동을 고무하고 동조했다’는 이유로 강제 폐간하고, 조용수 당시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건전신문기업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 언론 기업들에 저금리 융자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철권통치 아래 언론의 비판적 논조는 자연스럽게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유신 시절의 기조는 현 정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시사저널은 제1414호 ‘되살아난 유신 망령, 박근혜 대통령 “시사저널에 본때 보여야”’ 기사를 통해 현 정권의 언론 탄압 실태를 고발한 바 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를 통해 드러난 언론 탄압의 실상은 유신 시절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VIP 관련 보도-각종 금전적 지원도 포상적 개념으로. 제재는 민정이” “시사저널, 일요신문 - 끝까지 밝혀내야 - 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 선제적으로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 등의 기록에서는 친(親)정권 언론에는 당근을, 비판하는 언론에는 채찍을 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특히 ‘비서실장 지시사항’ 혹은 대통령을 의미하는 ‘領(령)’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언론에 대해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 드러난 ‘언론 탄압’의 흔적 © TV조선 캡쳐

실제로 정권의 탄압은 유신 시절 못지않았다. 본지에 대한 연이은 고소·고발은 물론 국세청 세무조사 및 가판 판매망에 대한 경찰수사까지 단행됐다. 비선실세에 대한 보고서를 폭로한 세계일보 역시 청와대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일보의 보도 3일 뒤 김 전 실장이 압수수색 장소로 세계일보사를 지목했다는 메모도 나왔다. 세계일보는 정윤회 문건 보도 이후 사장과 편집국장이 교체되는 내홍을 겪기도 했는데, 세계일보 내부에서도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한 이후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를 통해 문화예술계를 통제했다. 모든 음반에 대한 검열이 미풍양속 보존, 퇴폐문화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됐다. 검열제도로 인해 만화·애니메이션 등은 사회악으로 취급당했다. 일반 시민의 의복문화나 두발도 검열과 규제 대상에 올랐으며, 모든 음반에는 강제로 건전가요를 삽입해야만 했다. 금지곡 역시 정권의 입맛대로 결정됐다. 1975년을 문화예술계에서는 ‘가요대학살’이라 칭하기도 한다.

 

 

‘박정희 판박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이 같은 문화예술계에 대한 통제가 박근혜 정권에서 되살아났다. 2016년 10월12일 한국일보 보도로 문화예술인을 분류한 ‘블랙리스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2016년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의해 존재가 확인됐다.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서명자 594명, 세월호 시국선언을 한 문학인 754명,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한 문화인 6517명, 그리고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을 한 문화인 1608명 등 총 9473명이 대상자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 김종 전 문체부 2차관 등이 꼽힌다. 조 장관은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시점인 2014년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 중이었다. 조 장관은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지만, 최근 특검 수사에서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이와 함께 국정원 역시 이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영수 특검팀 대변인 이규철 특검보는 1월6일 브리핑에서 “공식적인 명칭은 블랙리스트라고 하지 않고 ‘문화계 지원배제 명단’이라고 하는데, 존재하는 것은 맞다”며 “일부 명단을 확보해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특검팀은 이 문건에 이름이 올라간 인사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 수사를 벌이는 중이다. 이 특검보는 “명단의 최종판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만들어졌고 관리됐는지, 실질적 조치가 행해졌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 계속 수사 중”이라고 말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인사로 지목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시사저널 박은숙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박근혜의 거짓말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본격화된 후 박근혜 대통령은 세 번의 대국민담화와 한 번의 신년 기자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박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최순실과의 관계, 삼성 합병 개입 의혹 등을 적극 해명했지만 이후 진행된 특검 수사와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거짓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의) 의견을 들은 적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두었습니다.”(2016년 10월25일 박 대통령 1차 대국민담화)

 

“저는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2016년 11월4일 2차 대국민담화)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께도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2016년 11월4일 2차 대국민담화)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저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2016년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

 

“(KD코퍼레이션) 그것도 그런 차원에서 기술력이 있다니까 여기도 큰 거대한 기업에 끼어서 제대로 명함 한번 못 내미는 것 아닌가, 알아보고 그런 실력이 있다고 하면 한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그런 차원이었어요.”(2017년 1월1일 신년 기자간담회)

 

“(삼성 합병 개입 의혹은) 완전히 (나를) 엮은 것입니다. … 그 누구를 봐줄 생각, 이것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제 머릿속에 아예 없었어요.”(2017년 1월1일 신년 기자간담회)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