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김광석을 다시 무대 위로 불러올리는가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11 17:32
  • 호수 14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년 만에 다시 우리 앞에 선 김광석…“살아 있다면 노래를 통해 지금의 아픔 위로했을 것”

공영방송사들이 지탄받는 시국에, KBS가 모처럼 찬사를 받았다. 2016년 12월28일과 29일에 방영된 《감성과학프로젝트-환생》(《환생》) 때문이다. 바로 고(故) 김광석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김광석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재현됐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료화면을 보여주는 차원이 아닌, 김광석이 직접 나와 노래를 부르고 내레이션까지 했다. 첨단과학기법의 개가(凱歌)다. 제작진은 공모를 통해 고인과 비슷한 배우를 뽑은 후 특수분장·컴퓨터그래픽(CG)·특수시각효과(VFX)·홀로그램 등의 기술을 덧붙여 재현했다. 목소리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녹음을 바탕으로 ‘음성 빅데이터’ 작업을 통해 되살렸다. 이를 위해 제작비 3억원, 제작기간만 6개월이 투입됐다.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디어 업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모처럼 KBS가 수신료 값을 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6년 6월10일 대구 김광석 거리에 있는 소극장 ‘떼아뜨르 분도’에서 가수 김광석의 생전 모습을 홀로그램 영상으로 재현한 공연이 열렸다.


구의역과 팽목항을 방문한 ‘김광석’

 

프로그램은 단순히 김광석을 기술적으로 재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스토리와 음악을 담았다. 김광석이 자란 서울 창신동과 음악활동을 했던 대학로 등을 그가 직접 찾아가 옛 추억을 이야기하고, 친구인 박학기와 생전에 약속했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이중창으로 불렀다. 그리고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가 났던 구의역과 세월호 참사의 팽목항을 방문해 시대를 위로했다. 제작진이 시민 2000명을 대상으로 ‘김광석이 살아 있다면 어떤 사건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을까’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구의역과 세월호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김광석의 노래뿐만 아니라 철학까지 이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 냈다. 2부에선 김광석과 여러 뮤지션들이 소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소극장의 관객들은 김광석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안방의 시청자들도 함께 울었다. 제작진이 “안방에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김광석이 등장하는 순간이 마법처럼 느껴지며 보는 이를 울컥하게 했다. 박학기와 생전에 약속한 이중창을 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감동을 선사했다. 게시판에선 ‘요즘처럼 혼란한 시국에 마음이 치유됐다’ ‘요즘 같은 시국에 예전 노래가 그립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진다’와 같은 반응이 나타났다. 《환생》은 문화-기술 융합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첨단기술로 아날로그 감성을 재현해 내는 것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도 확인시켜줬다. 앞으로 빅데이터·인공지능(AI)·특수효과 등이 발달하면 훨씬 정교한 재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제작진이 이 기념비적인 프로젝트를 하면서 대상자로 김광석을 선정한 것만 보더라도, 김광석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작진은 ‘지금 청춘들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대한민국은 세대 간 갈등이 크고, 감정연대가 끊어진 상황’인데 그것을 이어줄 가교를 찾았고, 결론이 김광석이었다고 한다. 제작진은 ‘김광석은 시대와 호흡했던 가객(歌客)이고, 살아 있다면 분명 시대의 아픔이 있을 때 노래를 만들어 위로해 줬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를 되살렸고, 시청자는 눈물로 화답했다.

 

2016년 12월28일과 29일에 방영된 KBS 《감성과학프로젝트-환생》의 故 김광석 모습 © KBS


갈수록 더 확산돼 가는 ‘김광석 신드롬’

 

김광석은 1964년 1월22일 태어나 1996년 1월6일에 33세로 생을 마감했다. 1982년 명지대 경영학부에 들어갔고, 노래에 빠졌다. 당시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에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 가던 무렵이었다. 다운타운에서 잠시 노래를 하기도 했던 김광석은 운동권 노래책의 노래를 불러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김민기의 《못생긴 얼굴》이었다. 결국 민중가요 노래패 운동에 뛰어들었고, 1984년 ‘노래를찾는사람들’(노찾사) 1집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그의 목소리가 대학가에 알음알음으로 파져 나갔고, 1987년 노찾사 정기공연 때 《녹두꽃》을 불러 압도적인 가창력의 노래꾼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다 방향전환이 이루어진다. 친구들과 녹음을 했는데, 김창완이 그것을 듣고 음반을 내자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물원 1집이 탄생하고,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거리에서》 같은 명곡이 나온다. 운동권 노래에서 멀어진 것이다. 동물원은 동호회 성격이었는데, 김광석은 보다 전문적이길 원했기 때문에 솔로로 데뷔한다. 《사랑했지만》이 히트하면서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렸고, 이러한 사랑노래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으로 이어졌다. 잇따라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을 발표하며 1990년대 포크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김건모·룰라가 가요계를 뒤흔들던 시절에 그가 포크의 명맥을 지켰던 것이다.

 

변절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후배들이 ‘무슨 사랑타령이냐’고 반발했다. 하지만 음악팬들은 끊임없이 그의 공연을 찾았고, 그는 과거 그를 울게 했던 김민기의 학전 소극장에서 무려 1000회 공연 기록을 세웠다(1995년 8월). 언제나 공연을 했기 때문에 별명이 ‘또해’였는데, 1000회 공연을 한 지 5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사망은 충격이었고 추모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21세기 들어 열기가 점점 커져 신드롬 수준까지 됐다. 매우 놀랍게도 김광석의 노래를 담은 뮤지컬이 세 작품이나 된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날들》 《디셈버》 등으로, 모두 2010년대에 만들어졌다.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LP도 2010년대에 발매됐다. 2009년에 김광석의 고향 대구에서부터 시작된 《김광석 다시부르기》 공연은 원래 그의 지인들이 조촐하게 시작한 추모행사였지만, 팬들의 호응이 워낙 커서 이젠 전국 순회공연으로 발전했다. 2010년엔 대구에 ‘김광석길’이 생겼다. 이런 식의 지자체 사업이 실패할 때가 많은데, 유독 이 사업은 성공을 거둬 지역재생 사업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2013년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고인의 모습이 나왔다.

 

2016년엔 그룹 동물원을 그린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이 선보였다. 《김광석을 보다》 전시가 펼쳐지고, 체임버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열정과 나눔(APS)’이 고인의 음악을 클래식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CJ E&M은 추모 앨범 《김광석, 다시》를 발매했다. 심지어 김광석 노래로 철학을 이야기하는 《김광석과 철학하기》라는 책도 출판됐다. 이러한 신드롬적 열기 속에서 KBS 《환생》도 탄생한 것이다.

 

김광석이 생전에 소극장 1000회 공연을 하긴 했지만, 김건모·룰라·신승훈과 같은 국민가수는 아니었다. 《가요톱10》에도 두 번 나간 것이 전부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인기가 커지면서 사후에 국민가수가 됐다. 김광석 신드롬의 시발점은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여기서 북한 인민군 역의 송강호가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라고 했고,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후배들이 잇따라 김광석의 노래를 리메이크했고, 음악예능에선 김광석이 반복적으로 조명됐다. 젊었을 땐 김광석을 여러 가수들 중 하나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젠 그를 자신의 청춘기를 대표하는 가수로 받아들이게 됐다. 왜 김광석은 21세기에 더 빛을 발하게 된 것일까?

 

2016년 4월1일 종로구 연건동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열린 《김광석을 보다展; 만나다.듣다.그리다》에서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그는 가수가 아닌 시대를 노래하는 歌客이라 불린다

 

김광석이 너무나 21세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인기 가요들은 아직까지 그 장르의 명맥이 이어지지만, 김광석과 같은 느낌을 주는 포크는 이제 주류가요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김광석이 과거 추억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김광석은 33세에 요절해, 마치 사진처럼 기억 속에 멈춰 있다. 그리하여 영원히 청춘의 아이콘, 과거의 아이콘일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사람들은 불안하고 지쳐 있다. 희망보단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없이 덮쳐오는 디지털 문명도 사람들을 피로하게 한다. 김광석은 현란한 1990년대에 포크의 영토를 지킨 사람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아날로그의 힐링을 전해 줄 수 있었다. 또 김광석에겐 요즘 가요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통과 비애, 고독의 감수성이 있는데, 이것도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해 줬다. 이것이 과거 추억이 없는 20대까지도 김광석에게 빠져드는 이유다. 마침 복고열풍도 불었다.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김광석만의 목소리, 가창력이 요즘 아이돌·힙합의 시대에 더욱 부각되는 측면도 있다. 또 김광석의 노래는 가사도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 한다. 《서른 즈음에》는 청춘을 떠나보내는 30~40대에게, 《이등병의 편지》는 젊은 남성에게,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중년 이상, 그리고 서글픈 사랑노래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녔다. 김광석이 사랑노래로 선회했을 때 비난도 있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더 폭넓은 공감이 가능했다. 운동가요의 사회성부터 사랑노래의 서정성까지 모두 갖춘 뮤지션이 된 것이다. 생전에 노래운동을 한 것이 요즘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그가 불의에 분노하고 약자를 위로하는 순수한 청춘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하여 그는 가수가 아닌 시대를 노래하는 ‘가객’(歌客)이라 불린다.

 

자살이라고 알려진 죽음과 관련한 미스터리도 그를 더 안타깝게 추억하도록 한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2016년에 이상호 기자도 김광석의 죽음을 추적한 영화 《일어나, 김광석》을 제작해 그의 사인(死因)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재조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기자는 네티즌의 집단지성을 통해 밝히자고 한다. 과연 21세기엔 1996년 김광석 죽음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