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집 교수의 시사유감]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 권상집 동국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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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매카시즘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

올해 미국 LA에서 진행된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배우 중 한 명이다. 메릴 스트립은 공로상 수상 소감을 통해 미국에서 가장 비난받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영화인과 외국인, 언론인이라며 트럼프 당선인의 반(反)이민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리고 이방인, 외국인 등과 함께 다양성을 추구하는 할리우드에서 이들을 쫓아내려는 트럼프의 비이성적 행태에 독설을 날렸다. 발끈한 트럼프 역시 자신이 애용하는 트위터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배우로 메릴 스트립을 꼽으며 둘의 논쟁은 온라인으로 확대됐다.

 

놀라운 점은 그녀의 수상 소감에 후배 배우들 역시 깊은 공감을 표시했으며, 미국 언론들 또한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을 지면에 옮기며 사회적 반향이 컸다고 강조한 것이다. 백악관 대변인조차 사려 깊은 메시지였다고 평한 그녀의 수상 소감을 지켜보면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아직도 홍역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해서 줄곧 모르쇠로 일관하던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당초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변명으로 청문회 출석을 거부하다가 동행명령장 발부 등으로 굴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부랴부랴 오후 청문회에 모습을 나타내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나는 몰라요’라는 입장만 표명해온 조윤선 장관은 위증으로 고발된 상태이기에 답변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다가,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의 지속된 추궁에 ‘블랙리스트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며 간접적으로 해당 리스트의 실체에 대해 실토했다. 조윤선 장관은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을 뿐이라며 막판에 해당 발언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상 주무장관이 직접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정치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문화예술 분야 인물들의 지원을 배제하는 1970년대식 공포정치에 의한 통제가 2016년에 벌어졌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소름을 돋게 만든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월9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의 7차 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돌이켜보면 조윤선 장관은 문화예술 분야에 관한 그 어떤 장점이나 전문성을 지니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방송, 영화, 음악, 예술, 애니메이션, 기타 문화콘텐츠 분야에 관해 어떤 식견을 갖고 있는지도 청문회에서 구체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됐으니, 그녀가 줄곧 쳐다본 건 문화콘텐츠 분야 창작자들의 애환과 고민이 아니라 대통령과 최순실의 사적인 지시였고, 그녀가 내내 주의를 기울였던 것도 청와대 아래 숨겨진 태양이었던 최순실의 심정 관리였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문건에 국정원이 직접 동원된 건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한 일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문체부 대외비 문건에 나타난 작가들의 리스트에는 국정원과 청와대가 직접 기록에 개입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제시돼 있다. 이에 반해 트럼프 당선인에 대해 굴복하지 않고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주장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CIA 국장은 지금도 정보기관을 무시하면 안보가 위험해질 수 있다며 트럼프에게 안보의식을 훈계해주고 있다. 한 나라의 정보기관은 외부의 적에 대한 위기관리, 정보수집에 관해 이처럼 노력해야 하는 곳이지 문화콘텐츠 창작자들의 성향을 조사하고 분류하는 곳은 절대 아니다.

 

사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 명단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인물도 상당히 많다. 강력하게 반정부적인 입장을 줄곧 피력해 온 인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인 방송이나 시사회 장소에서 메릴 스트립처럼 현 정부의 무능과 대통령에 대한 질타를 거세게 한 인물도 없다. 어떤 배우는 세월호를 언급했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어떤 배우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는 영화에 출연하거나 출연 의지를 표명했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또 어떤 감독은 국가 재난 사태에서 정부의 위기대처 미흡을 영화에 담아냈다고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렸다. 그리고 정부는 이렇게 검토 및 정리된 인물을 정부 비판세력으로 규정하고 보조금 지원을 축소하거나 제한하는 방안을 깊이 있게 고민 또는 실행해 왔다. 2017년을 살아가는 지금도 이렇게 구체제적인 행보를 청와대와 국가 정보기관, 문화체육관광부가 삼위일체로 노력했다니 한숨이 터져 나온다.

 

1970년대에나 존재할만한 블랙리스트에 현 정부는 왜 이렇게 집착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 실마리는 또 한 번 ‘실세실장’으로 불렸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공안검사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대공수사국장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위협과 국가 안보를 위해 지나칠 정도의 한국판 매카시즘을 발휘해왔다. 그 결과, 정부 정책에 반하는 언동 및 선언에 참여한 1만여명에 육박하는 주요 인사들이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반강제적으로 등재시켰다. 대한민국 5100만명 인구 중 1만명을 블랙리스트로 통제하는 현 정부의 인사관리 방식은 그야말로 비상식이자 몰상식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가 미국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존재한다는 폭탄선언을 한 시기는 1950년 2월이다. 그의 발언은 당시 냉전 체제에서 미국의 안보 강화를 위해 악용되었고, 미국 정부 및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한동안 활용돼 왔다. 그러나 지금 매카시즘에 대해 많은 미국인들, 더 나아가 유럽을 포함한 서구 시민들은 부끄러움을 넘어 가장 치욕적인 통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상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개인의 양심을 국가 차원에서 강제로 통제하고 일정 방향으로 유도했기에 서구의 상당수 학자들은 매카시 전 의원에 대해 ‘미국의 역사를 가장 후퇴시킨 인물’로 지금도 평가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매카시보다 더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1970년대 검찰보다 더 막강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에서, 1980년대에는 검찰총장으로서, 1990년대에는 법무부장관으로서, 2013년 이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무려 40년간 대한민국의 안보 수호라는 미명 아래 한국판 매카시즘을 주도하며 수많은 언론과 문화계 인물을 통제해왔다. 정부의 무능을 질타했던 시사저널을 포함한 일부 언론에는 칼날을 들이밀었으며 수많은 영화 및 소설, 주요 문화계 인물들에겐 매카시즘을 들이밀며 이들을 반체제, 반정부적 인물로 깎아내렸다. 박영수 특검에서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정관주 전 1차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장관 역시 관련 없는 일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2016년 12월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다시 미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 고별 파티에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배우 톰 행크스, 메릴 스트립, 로버트 드니로, 가수 폴 매카트니 등 미국을 대표하는 모든 연예인들이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에 비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에 공연을 요청받은 셀린 디옹, 앨튼 존 등의 A급 연예인들은 트럼프 취임식 초대를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한 미국인 대학교수는 최근 필자에게 ‘문화계 인물들이 자신에게 각을 세운다고 미국 대통령이 이들을 블랙리스트로 정리하고 지원 방안을 국가 차원에서 규제한다면 곧바로 대통령은 탄핵될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미국이 무서운 이유는 그들의 국방력보다 이처럼 통제와 감시가 아닌 개방과 유연성, 수평적 사고를 중시하는 정치 문화 때문이다.

 

문체부 전 장관과 차관 그리고 청와대 전직 정무비서관까지 구속되면서 모두 조윤선 장관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개입 여부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두 인물은 블랙리스트 작성 및 존재 여부에 대해 침묵하거나 부인하고 있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부당한 처우 및 탄압을 받은 피해자는 이렇게 많이 있는데, 가해자는 지금까지도 공개적으로 드러난 바가 없고 사죄를 표명한 적도 없다. 참고로, 세계경제포럼에서 2014년 조사했던 대한민국 정부 정책 결정의 투명성은 전 세계 144개국 중 133위였다. 블랙리스트를 작성 및 관리하기 시작한 시점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블랙리스트가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던 우리 정부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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