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위한 지하철 환승지도 체험해보니…
  • 김은샘 인턴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18 10:01
  • 호수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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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약자를 위한 지하철 환승지도 제작…“지도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됐으면…”

#1. 서울 천호역 근처에 사는 장애인 A씨는 얼마 전 혜화역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비장애인이라면 지하철 5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 4호선으로 환승하면 된다. 소요 시간은 약 30분. 하지만 A씨는 그럴 수가 없었다. 5호선을 타고 왕십리역에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탔다. 그리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다시 4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5호선 환승 구간에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이 구간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면서 불편이 많이 사라졌다. 

 

#2. 장애인 B씨는 주로 2호선을 이용한다. 일이 생겨 처음으로 6호선을 타게 된 B씨는 휠체어로 탈 수 있는 열차 칸을 찾지 못해 지하철 몇 대를 그냥 보냈다. 지하철을 운영하는 업체마다 휠체어 열차 칸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내표시의 위치 역시 제각각이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는 안내표시를 보기 힘든 경우도 많다.

 

#3. 반면 장애인 C씨는 ‘교통약자 지하철 환승지도’를 이용해 4호선 노원역에서 7호선으로 쉽게 환승했다. 그는 환승구간에 리프트와 엘리베이터 등이 설치돼 있는지 미리 확인했다. 휠체어로 탈 수 있는 열차 칸 위치와 위험 안내표시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시사저널 미술팀

직접 체험한 후 환승지도 제작

 

‘교통약자 지하철 환승지도’는 휠체어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엘리베이터와 리프트의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위험 안내표시도 있어 미리 대비가 가능하다. 이 지도는 장애인 협동조합 ‘무의’와 계원예대의 산학협력 작품이다. ‘무의’는 장애가 무의미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2015년에 세워졌다. 이 협동조합의 홍윤희 이사장은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김남형 계원예대 광고브랜드디자인과 교수와 함께 교통약자를 위한 지하철 환승지도 제작에 나섰다. 김 교수의 지도하에 계원예대 광고브랜드디자인과 학생인 문미현(23)·이지훈(25)·송현수(25)씨가 참여했다. 문씨는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중 교수님께서 무의와 연결시켜 주셨다”며 “이왕이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부터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교통약자 환승에 취약한 14개 지하철역을 직접 체험한 후 환승지도를 제작했다. 한국에서도 유니버설 디자인(장애의 유무나 연령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공급자 관점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외국인·어린이·학생 등 휠체어 사용자를 구체적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각각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인식은 어떤지, 리프트가 고장 난 곳은 어딘지, 안내표시는 문제가 없는지 등을 살피며 철저하게 사용자 입장을 고려했다. 공급자 관점이 아닌 체험을 통한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김 교수는 “데스크 리서치로는 한계가 있다”며 “현장을 직접 봐야 문제를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여름에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씨는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 장애인들의 이동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홍 이사장이 지하철 환승지도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다리가 불편한 딸과의 외출이었다. 고속터미널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를 찾은 모녀는 ‘수리 중’ 표시와 함께 안내문을 봤다. 7호선 환승을 위해서는 동작역에서 4호선 이수역으로 이동해 다시 갈아타라는 안내문이었다. 소요 시간을 살펴보니 40분 정도였다. 계단을 오르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역무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황당했다. 현재 위치가 계단 아래면 7호선을 관리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 위에 있다면 3호선 서울메트로에 연락을 하라는 것이다. 홍 이사장은 “이동권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특히 서울 지하철은 사업자가 나뉘어 있어 안내에 혼란스러운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장애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자는 협동조합 ‘무의’ 조합원들이 1월11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지하철역 환승지도 디자인 수정안을 놓고 의논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지도가 필요 없는 세상을 바라며

 

‘교통약자 지하철 환승지도’는 1월말에 무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현재는 윤경은 웹디자이너(40)와 함께 디자인을 최종 수정 중이다. 비장애인들은 원하는 장소에,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긴 여행의 시작이다. 집을 나서는 것조차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장애인 이동권이 확보되지 않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홍 이사장은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생존, 그리고 자유의 의미”라며 “이동이 제한되면 삶 자체가 위축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동권 향상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자유까지 보장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이들은 “우리가 제작한 지도가 필요 없는 세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실 사회에 인프라 구축이 충분히 돼 있고,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자리 잡혀 있다면 굳이 교통약자를 위한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는 문씨의 말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부설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에서 2013년 공개한 교통약자용 ‘지하철 환승 도우미’는 공개시점 이후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있다. 이마저도 너무 복잡해 불편하다는 의견이 많다. 김 교수는 “첨단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 관점에서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앞으로 많은 사람이 프로젝트에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을 보였다. 14개의 지하철역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에 많은 사람이 참여해 지도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홍 이사장은 “환승지도를 가지고 서울시에 제안해 놓은 상태”라며 “지도가 없어도 될 만큼 인프라가 개선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교통약자를 배려해 만들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6년 등록 기준 한국 장애인 수는 약 250만 명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쉽게 볼 수 없다. 홍 이사장은 “장애인들이 이동 중에 나쁜 경험을 하게 되면 바깥으로 나서는 것을 꺼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앞으로도 이들은 사회가 바뀔 때까지 프로젝트를 계속할 예정이다. 장애인의 이동, 여행에서 문제가 없어지는 날까지 이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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