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라에게 수백억원 퍼주며 백혈병 피해자는 찬밥”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7.01.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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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직업병’ 피해자들 서초동 삼성 본사 앞에서 470일째 농성 이어가는 이유

1월18일 오후 1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했을 때다.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 앞에서는 삼성직업병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인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의 농성이 한창이었다. 반올림은 2007년 11월 발족한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원회에서 시작됐다.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 진단을 받거나 이로 인해 사망한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주축이 돼 결성됐다.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한 남성이 확성기에 대고 “이재용을 구속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였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 “국정 농단 뉴스 볼 때마다 자괴감” 

 

이날로 469일째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그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와 삼성 개입 뉴스를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황씨는 “이재용 부회장 일가가 축적한 부는 유미 같은 근로자들의 희생을 통해 이룬 것”이라며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은 물론이고, 삼성이란 회사에 대해서도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삼성전자 본사 앞 삼성 직업병 피해자 모임인 반올림 천막농성장 ⓒ 시사저널 박정훈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드러났듯 삼성은 돈으로 권력을 매수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업환경을 조성해왔다”며 “이재용 부회장은 최순실 모녀에게 수백억을 지원하면서 정작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문제는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숨진 피해자들에게 500만원, 많아야 1000~2000만원을 건네고 ‘보상해줬으니 해결됐다’는 식으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삼성이 최씨 모녀에게 수백억원을 지원한 시기는 직업병 피해자에 대한 조정위원회가 만들어진 때와 겹친다. 피해자 보상과 사과, 재발방지대책 등에 대한 교섭이 한창 이뤄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삼성은 조정권고안 및 교섭단체 자격에 흠집을 내는데 몰두했다. 결국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무시하고 피해자들에게 일방적인 보상안을 강요했다는 게 이 노무사의 주장이다. 

 

시계바늘을 11년 전인 2007년으로 돌려보자. 수원 반도체공장에서 근무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삼성의 직업병 문제가 처음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황씨의 사망이 서울행정법원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된 것은 4년 후인 2011년이었다. 이후 삼성반도체 노동자 10여명이 잇따라 산재로 인정되자 삼성 측은 2012년 11월 반올림에 대화를 제안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보상․재발방지대책 등 마련을 위한 실무교섭이 이때부터 시작됐고, 반올림과 또 다른 피해자 가족단체인 가족대책위, 그리고 삼성의 입장 차를 조율하기 위해 마련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가 만들어졌다.

 

당시 삼성측은 2015년 12월까지 보상 신청한 피해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피해보상금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조정위가 권고한 보상 대상자 지위 및 대상 질병․발병 시기에 대한 기준과 비교해 상당히 축소된 한시적․제한적 보상과 사과였다는 것이 반올림 측의 주장이다. 

 

 

1월14일 79번째 백혈병 피해 사망자 발생

 

2016년 1월12일 조정위는 “재발방지대책에 대해선 양 측 합의가 이뤄졌으나 보상․사과에 관해서는 논의가 보류됐다”고 발표했다. 삼성은 2015년 9월부터 10월 사이 최순실씨 회사인 ‘코레스포츠’와 ‘미르재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등에 200억에 가까운 금액을 지원한 날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1월12일 삼성그룹은 ‘K스포츠재단’에 79억원을 출연했다. 이틀 뒤인 1월14일 삼성은 “백혈병 이슈가 9년 만에 해결됐다”며 전격 발표했다. 

 

삼성과 반올림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동안, 삼성직업병 피해자는 계속 늘어났다. 1월14일 삼성반도체·LCD 노동자로는 79번째, 백혈병 환자로는 32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한지 11년만이었다.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근무하다 급성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김기철씨는 올해 32세였다. 

 

숨진 김씨는 2006년 삼성전자 협력업체에 입사해 화성공장 15라인에서 근무했다. 입사한 지 6년 만인 2012년 9월경 혈액이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급성골수성 백혈병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2012년 10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보상 신청을 했지만 산재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유해물질 노출량이 특별히 높다는 증거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김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삼성과 노동부가 관련자료 제출을 거부하면서 자료제출 공방만이 이어지고 있다. 

 

1월14일 백혈병 피해자 김기철씨가 사망했다. ⓒ 시사저널 박정훈

반올림측에 따르면 제보를 통해 파악한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인원은 모두 378명, 그 중 사망자는 138명이다. 지난해 12월6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재용 부회장은 윤소하 정의당 의원으로부터 고 황유미씨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저도 아이 둘 가진 아버지로서 가슴 아프다”는 답변을 한 바 있다. 반올림 회원들은 이날 청문회 장소인 국회 앞에서 기습적인 시위를 벌이다 경호원들로부터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여전히 “삼성이 피해자 가족에게 개별 접촉해 협상하는 식으로 보상금을 깎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며 “삼성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 피해자가 배제되지 않는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 측 “피해 발생시 권오현 대표 서명 담긴 사과문 동봉” 

 

현재 삼성측은 보상과 사과, 재발방지대책 이행 약속과 이행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조정위 권고안을 거의 다 수용해 그 기준에 의거한 보상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시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의 서명이 담긴 사과문을 동봉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반올림에서 요구하는 ‘배제 없는 보상’은 ‘무조건 보상’하라는 것과 다름없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반올림 측에서 보다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들고 나온다면 언제든 다시 대화에 임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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